신앙과 위선
누가복음 13:10-17, 성령강림절후 제14주, 8월25일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최근에 저는 한 대형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19년 동안 간호사로 활동하다가 그 일을 그만두고 간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분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던 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에게 행하는 적극적인 연명치료에 대해서 회의가 들었다고 합니다. 연명치료란 기계에 의지해서 식물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의료행위를 가리킵니다. 아무리 의학기술이 발달해도 병과 장애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운이 좋게 그런 불행을 피하는 사람들이 있고, 운이 나쁘게 그런 불행에 빠진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에게 왜 이런 불행이 찾아오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이런 불행을 죄와 연결해서 생각했습니다. 불치병이나 장애는 조상이나 당사자의 죄가 원인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미련하게 보이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그런 불행한 일들이 그들의 인식 너머의 현상이기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죄를 원인이라고 해야 죄를 용서받고 치유될 가능성도 열리게 됩니다. 좋은 뜻으로 시작된 그런 생각이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더 옥죄는 수단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불치병 환자들이나 장애인들은 그 불행 자체도 힘들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서 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선입관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왜곡된 선입관에 저항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본문은 이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눅 13:10, 11)
본문에 두 가지 장면이 교차되어 있습니다. 한 장면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날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종교집회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주로 공생애 초기에 속하지만 안식일에 회당에서 종종 가르치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거룩한 일들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존재, 인간 역사와 구원, 하나님의 통치가 선포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장면은 그것과 대조됩니다. 18년 동안이나 허리를 펴지 못하는 장애를 앓고 있는 한 여자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척추에 염증이 생겨 척추를 펴지 못하는 병인 척추염을 앓고 있는 분으로 보입니다. 옛날에는 꼽추라고 불렀습니다. 그녀의 운명이 얼마나 기구한지는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의 비참한 운명을 저주하며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겠지요.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한탄스러웠을 겁니다. 이 여자가 안식일에 회당에 나왔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가능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 틈에 낀다는 것 자체가 불편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거나 연민의 대상되곤 합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장애인들은 가능한 집에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회당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까? 아니면 늘 회당에 나와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있었을까요? 누가복음 기자는 이 여자분에 관해서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음 이야기를 이렇게 이어갑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12절) 이 여자에게 안수 하자 그 척추가 펴졌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각자 다를 겁니다. 이 여자의 척추염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고쳐진 걸 보니 역시 예수님의 능력이 크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나도 그런 기적을 맛보고 싶은 분은 없으신가요? 또는 저 여자의 척추가 실제로 치료된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흥분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느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분도 있습니다. 이런 논란도 본문을 이해하는데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누가복음 기자의 설명을 더 따라가 봅시다.
본문 14절에 따르면 이 극적인 장면에서 회당장이 등장합니다. 그는 회당의 책임자입니다. 오늘의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책임을 지고 있는 회당에서 척추염 환자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으로 고침을 받았다면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이런 소문도 멀리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헌금도 늘어나겠지요. 예를 들어 어떤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열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부흥강사의 안수 기도를 받고 불치병 환자들이 실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의 책임자인 목사나 장로들은 그걸 널리 선전하려고 할 겁니다. 본문의 회당장은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입니다. 그가 화를 낸 이유는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위반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지금 회당장이 공연히 예수님을 트집 잡는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 공생애 중에 종종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처형도 따지고 보면 예수님이 공연한 일로 트집을 잡히고 누명을 쓴 겁니다. 예수님은 누가 보더라도 당시에 반로마 국가사범에게만 해당되는 십자가에 처형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유대의 산헤드린 법정과 로마의 빌라도 법정에서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누명의 전조가 오늘 분문에서 이미 시작된 게 아닐까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이들이나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병을 고친 예수님에게 화를 내는 회당장은 악의 화신들일까요?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이들이 당시 주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악의 대표자들이 아니라 정의의 보루로 인정받았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한 일을 한다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의를 실현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회당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비인격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고집불통도 아닙니다. 마음이 비비 꼬여서 공연히 트집만 잡는 괴팍한 성격의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위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위 앞에서 분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직접 따지지는 않고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게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이 회당장의 논리는 정연합니다. 장애인 치료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안식일만 피해서 그런 일을 하라는 겁니다. 18년 동안 척추염을 앓던 사람이 안식일 다음날 치료받는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당장 죽을병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만 피하면 모두에게 좋은 겁니다. 회당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안식일도 지키는 것이고, 불행한 운명에 처한 사람들도 구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제가 보기에도 이 사람의 생각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틀린 게 없습니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안식일 제도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안식일은 창조와 출애굽 사건에서 시작되는 유대교의 종교 전통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마지막 날에 안식하셨다는 사실과 유대인들을 애굽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일주일에 하루만은 모든 노동을 멈춰야했습니다. 그 날이 안식일입니다. 안식일 개념의 뿌리인 창조와 출애굽은 인간의 천부적 존엄성을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해방된 존재들입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습니다. 왕, 귀족, 기업가, 노동자, 비정규직, 백수 등등,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똑같습니다. 이미 3천 년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은 위대한 민족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제도를 십계명의 하나로 삼았습니다.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시행세칙도 엄밀하게 규정했습니다. 이런 전통을 지켜나가야 할 회당장의 입장에서 볼 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행위는 안식일 규정의 위반입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유대교의 체제 자체가 붕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앞으로는 안식을 피하고 나머지 엿새 동안 와서 병 고침을 받으라고 충고한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꽤 설득력이 있는 제안입니다.
본문 15절부터 예수님의 반론이 이어집니다. 반론의 핵심은 16절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안식일 제도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경건한 형식, 또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전락해 버린 안식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지적하신 겁니다. 안식일에 대한 사람들의 왜곡된 생각을 해체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충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안식일 다음날 이 여자를 고칠 수도 있었지만 시빗거리가 되는 걸 감수하고 안식일에 당장 여자를 고쳤습니다.
여기서 안식일의 본질은 종교의 본질, 즉 신앙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언가요? 그것은 해방입니다. 18년 동안 사탄에 묶였던 여자의 해방입니다. 그런 일은 창조와 출애굽을 뿌리로 하는 안식일에 합당합니다. 자신을 얽어맸던 모든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여기서 모든 사회적 조건에는 단지 우리가 피하고 싶은 조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조건들도 포함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조건들로부터도 해방되는 것이 안식일의 본질, 즉 종교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 천착하고 있는지요? 18년 동안 척추염을 앓은 여자처럼 어딘가에 매여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여러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신앙을 통해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영혼의 병이 점점 더 심해지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안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저는 간혹 메일이나 전화로 상담을 받습니다. 자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예상 외로 많습니다. 죄책감에 빠지기도 하고, 일정한 대상을 향한 적대감에 빠지게도 합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모두 해방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저는 남북분단을 생각할 때마다 18년 된 장애인 여자가 떠오릅니다. 처절합니다. 이 문제를 놓고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싸웁니다. 북한과는 아예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구요. 그래도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소위 종북 좌파에 속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있겠지요. 남북관계에 관한 한 지금은 안식일이니까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60년 이상 분단된 한민족의 현대사에서 기독교는 푸는 역할보다 안식일에는 좀 참으라고 말하는 회당장처럼 결과적으로 남북관계를 묶어버리는 역할을 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저는 이 시대 앞에서 기독교 목사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신앙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바르게 이해하고 따라가면 풍요로운 생명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해방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라는 말씀으로 반론을 시작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위선자라는 뜻입니다. 신앙이 깊은 체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신앙의 형식에 안주할 뿐입니다. 본인은 그것이 위선인지도 잘 모릅니다. 나름으로 진정성도 있습니다. 본문의 회당장에게서 보았듯이 나름으로 합리적일 수도 있습니다. 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아주 위험합니다. 신앙이 없는 게 오히려 나을 때가 있을 정도로 위험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설교를 듣고 마음이 답답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금 신앙의 본질에 바로 서 있는지 위선에 떨어져버린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런 상태에서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제가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만이 여러분에게 대답을 줄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조언을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일단 그것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낀다면 성령이 고유한 방식으로 대답을 주실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지금 진정성을 갖고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실제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신앙이 있는 척 하고 행세만 하는 사람인가?’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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