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위기 앞에서
빌립보서 4:1-9, 창조절 여섯째 주일, 2011년 10월9일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는 원래 두 장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사정인지 따로 보존되지 못하고 하나로 편집되었습니다. 이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받았을 때 그것이 성경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돌려가면서 읽다가 부분적으로 편지가 훼손되었을 겁니다. 당시에는 종이가 없어서 편지를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적었습니다. 양피지는 너무 비싸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용하지 못했고, 대개는 파피루스를 사용했습니다. 바울도 물론 파피루스에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의 편지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빌립보 교회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부분적으로 훼손된 그의 편지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게 오늘 신약성경에 들어온 빌립보서입니다. 두 장의 편지가 하나로 묶이다보니 어느 대목에서는 흐름이 단절되고, 때로는 산만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3:1절은 ‘끝으로’라는 단어로 시작되는데, 4:8절에 다시 ‘끝으로’가 나옵니다. 그리고 3:2절은 평온한 앞 구절과 달리 갑자기 격한 감정으로 치닫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빌립보 교회에 큰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1:13) 바울 개인도 힘든 형편에 처했고, 빌립보 교회도 어려운 형편에 처했습니다. 안팎으로 절박한 처지에 빠진 사람의 편지라는 것을 전제하고 빌립보서를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크게 염려하고 있는 빌립보 교회의 문제는 신앙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서 강한 톤으로 ‘.... 하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1절에서 빌립보 교우들을 향해서 “주 안에 서라.”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빌립보 교회가 흔들린다는 증거입니다. 그 뒤로 바울은 계속 흔들리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2절에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이름이 거명됩니다. 빌립보 교회의 여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다투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3절에서 이 여자들을 도우라고 말합니다. 자기들끼리 화해를 하지 못하니 화해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한 말인지, 아니면 소외된 그들을 살펴주라는 말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여자들이 어려운 처지에 빠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 이외의 여러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권면했습니다. 교회가 흔들리는 상황이니까 구성원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시험에 들었으면 벗어날 수 있게 하라는 권면입니다.
4-7절은 빌립보서의 주제인 ‘기쁨’을 언급합니다. 기뻐하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이것도 빌립보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간접적으로 가리키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절)고 말합니다. 빌립보 교우들의 불안한 마음을 위로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어려운 형편에 빠진 빌립보 교우들의 마음을 신앙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할례파
빌립보 교회의 신자들의 신앙을 흔들고 있는 이들은 할례파입니다. 앞에서 거론한 것처럼 바울을 그들을 가리켜 ‘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할례는 새로 태어난 남자 아이들의 몸에 흔적을 남기는 종교 의식입니다. 일반 의학에서는 포경수술이라고 부릅니다. 그 역사는 아브라함까지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할례를 징표로 삼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0 이하) 이 후로 모든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했습니다. 히틀러 친위대가 유대인 남자를 확인할 때 이것을 증거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할례파 문제가 빌립보 교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불거졌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당시의 관점으로 돌아가서 보아야 합니다. 일반 문명과 풍속도 당시의 눈으로 봐야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컨대 고대 종족들은 일부다처제를 택하기도 하고, 거꾸로 일처다부제를 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개인과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할례파 문제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매우 복잡한 관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문제는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도 거론된 겁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와의 투쟁에서 완전히 패배한 70년 이후로 바리새파 운동을 강화합니다. 그 운동의 핵심은 토라와 할례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향해서도 토라와 할례를 요구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유대교의 요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다른 입장을 취하던 이방 그리스도교에게도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어느 집단이든지 매파가 있고 비둘기파가 있듯이, 입장 차이가 있었습니다. 토라와 할례를 절대화하는 이들을 가리켜 할례파라고 합니다. 이들은 바울이 세운 교회를 순방하면서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이 율법과 할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할례파의 주장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태를 감옥에서 전해들은 겁니다. 할례파를 향해서 ‘개들’이라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갈라디아서에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할례파들은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세운 여러 교회에 와서 바울의 복음과 어긋나는 교리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 이어서 자기가 전한 복음 이외의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하소연을 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할례파들의 주장이 갈라디아 교회와 빌립보 교회의 신앙을 흔들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의 주장은 단순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런 정도라면 바울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을 시작하면서 동행한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행 16:3) 왜냐하면 아버지를 헬라인으로 둔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로 유대인들이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고집불통은 아닙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에서 과격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할례파의 주장을 배격한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복음 공동체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훼손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선 갈라디아 신자들과 빌립보 신자들이 할례파의 주장에 솔깃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할례파가 말도 되지 않는 것을 주장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를 훨씬 더 현실적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세운 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만 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복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실제 교회에서는 인간적인 문제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신자들끼리 서로 다투고, 배신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할례파는 교회의 이런 약점을 파고든 것입니다. 물론 선의에서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실제 삶을 구체적으로 규정해주는 규칙들입니다. 신자들은 그런 규칙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할례파의 주장이 복음 공동체에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복음 혼합주의입니다. 속된 표현으로는‘ 꿩 먹고 알 먹고’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결국 복음이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상대화되고 맙니다. 할례를 지켜도 복음은 놓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궁극적인 차원에서 두 가지를 똑같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돈과 하나님을 병행해서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특별히 할례와 토라는 가시적인 반면에 복음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치우치게 마련입니다.
지금 우리도 당시와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인간 역사는 비슷하게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복음 자체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복음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나라, 부활생명을 구체적인 숫자나 프로그램으로 경험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공허하게 느낍니다. 예를 들어 헌금도 그런 율법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하고,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기 위한 모금이라는 점에서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헌금이 율법의 차원에 떨어지면 복음의 본질을 근본에서 허물어 버립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헌금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십시오. 온갖 이름을 갖다 붙입니다. 심지어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 마련했다는 별미를 인용해서 ‘별미헌금’이라는 항목도 등장했습니다. 이런 행태는 한국판 할례파의 주장입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을 개들이라고, 육체를 자랑하는 이들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배우고 행하라
더 심각한 문제는 무엇이 위기인지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살이 썩으면 바늘로 찔러도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무엇이 할례파의 정체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해서 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자신의 신앙적인 업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이상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집니다. 할례와 토라를 끊임없이 요구받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느끼지 못합니다. 바울 당시에도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할례와 토라를 강조한 것과 비슷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그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할례파의 정체인 혼합주의는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차원에서도 메리트가 많습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복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보석감정사들이 받는 훈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 보석을 계속 경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1절에서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주 안에 선다는 것은 복음의 중심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통치 앞에서 선다면 할례파의 주장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생명의 중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9절에서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앞 문장에 4가지 동사 단어가 나열됩니다. 복음을 배우고 받고 듣고 보았다는 겁니다. 각각의 의미가 따로 있습니다만, 핵심은 배움입니다. 단지 정보로 배우는 게 아니라 큰 깨우침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깨우침의 차원에서 배우는 것이 참된 배움이고, 그런 배움은 당연히 행함까지 이르게 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중심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흔들려도 다시 중심에 서려면 복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건 세례 받을 때 한번 공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울이 9절에서 말하듯이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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