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0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s_lE2z56-FU?si=ZxuD0c4UemlepPGg
▣ 들어가는 말
- 중용의 길
유교문화권에 있는 동양에서 정신적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사서삼경’(논어, 맹자, 중용, 대학, 시경, 서경, 역경) 가운데 공자의 손자, 자사가 쓴 것으로 알려진 『중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은 예측불허의 변화 속에서 ‘치우치지 않는 것’ 즉, 중심 잡기를 의미하고, ‘용’은 ‘본래적이고 변함없는 가치’를 의미합니다. 결국 ‘중용’이란 변함없는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변화무쌍의 감각과 능력을 뜻하는 것이지요. 중용이란 인간이 체득할 수 있는 고도의 민감함이며 조절 능력입니다. 인간이 취해야 할 삶의 태도이지요. 인간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 중용의 한 구절을 소개해드립니다.
“도불원인(道不遠人), 인지위도이원인(人之爲道而遠人), 불가이위도(不可以爲道)”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도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진다면,
진정한 도일 수 없다.
참으로 멋진 통찰이지요. 이것을 우리식으로 표현해 보면, 진리/구원/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죽어서 가는 그런 세상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그 진리/구원/하나님 나라를 추구한다면서 진짜 삶에서, 사람에게서, 세계에서 멀어진다면, 그것이 진리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일 리 없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앙은 책상에 앉아 깊은 사상을 논하거나, 깊은 산 속에서 홀로 도를 깨우치거나, 세상의 잡다한 문제와는 벗어나서 홀로 유유자적하는 것이 아니지요. 복잡하고 불합리한 세계 속에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흔들리며 사람들과 어울려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 속에서 상황과 형편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동시에 변하지 않는 진리를 부여잡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 잔치 비유
오늘 말씀의 본문인 ‘큰 잔치 비유’는 마태복음의 ‘혼인 잔치 비유’와 닮아있습니다. 두 본문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데, 이는 그 메시지를 듣는 청중(유대인을 향한 것이냐 이방인을 포함한 포괄적인 청중, 특히 고통받고 소외된 자들을 향한 것인가), 신학적 의도(구원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열려 있는 것인가, 유대인들의 특권과 이에 따른 심판의 엄중함에 초점을 두는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현재적으로 경험하는가,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하는가) 등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신의 초대와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 그리고 구원의 본질 등을 밝혀준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에 대한 신의 요구, 인간의 삶의 본질(본래성),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실천에 따라 진리, 구원,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다다를 수 있을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맥락적 상황
본문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앞의 문맥을 살펴보면, 14장은 예수가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질문하며 한 병든 사람을 고쳐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청함을 받은 자들이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말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이었으니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초대를 받았을 것이고, 그들의 처신을 보고서 하신 말씀이지요. 그리고는 청한 자, 즉 잔치를 베푼 바리새인 지도자에게 “잔치를 베풀거든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청하라” 합니다. 오늘 본문인 잔치 비유에 앞선 이야기들입니다. 14장의 메시지의 핵심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배치해서 핵심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한 것이지요.
때는 안식일,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지키는 날입니다. 장소는 바리새인의 집, 경건한 자들의 공간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안식일에”(14:1)라는 표현과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14:8)라는 표현은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고 그래서 안식일에는 어떤 노동도, 여행도, 불을 사용하거나,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상황을 보면, 사람들이 많이 초대되었고, 그것이 ‘잔치’의 상황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율법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바리새인이 안식일에 잔치를 열 수는 없지요. 따라서 ‘안식일’이라는 시간의 설정은 의도적으로 넣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실수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아울러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잔치의 장소가 바리새인, 그것도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이라 표현한 것을 보면, 복음서 저자가, 혹은 본문 속에서 예수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지요. 거룩한 시간과 거룩한 장소에 거기에 걸맞은 아름답고 거룩한 일들만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잔치를 비유로 들어 가르침을 전하시기 전에, 실제 일어난 잔치의 장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중심 메시지(잔치 비유)를 전하기에 앞서, 철저하게 계산되고 의도된 장치를 배치한 것이지요. 시간과 장소가 어떠했는지 알리고, 그 잔치를 베푼 사람과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의 풍경을 묘사합니다. 이른바 거룩한 때와 장소에, 거룩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있는 꼴사나운 모습을 고발하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러니 이따위가 무슨 잔치냐? 정말로 잔치를 잔치이게 하는 것은 기쁨과 나눔과 서로에 대한 존중과 참여한 모든 이가 허물없이 하나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잔치 비유의 내용을 보면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 즉 누구보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자부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오히려 초대받지 못한 자들, 자격이 없는 이들이 잔치에 참여하고 그 기쁨을 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이 형식적 종교의 틀에 얽매여 은혜를 놓치고 있는 것을 비판하는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예수의 메시지로 연결됩니다.
▣ 잔치를 베풀다!
- 초대의 경험 : 존재의 부름과 응답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잔치 비유에 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신의 인간을 향한 부름은, 일상적인 의무와 욕망에 몰두해 비본래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향해 본래성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밭을 샀으매…” “나는 소를 샀으매…” “나는 장가 들었으니…”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 빠져있어서 일상의 세계를 넘어선 그 무엇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 삶의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합니다. 그러니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한가롭게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그들의 대답은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당면한 바쁜 일이 있는데, 그 일을 내버려 두고 잔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오히려 너무 한가롭게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의 명령과 부름이 어떤 굉장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나 엄청나고 굉장한 것이어서, 일상의 삶을 버리고 그 부름에 응해야 하는 것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목숨 바쳐서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잔치’로 부르고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비유입니다. 한편으론 맥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냥 먹고 마시고 노는 그런 거 말고요, 뭔가 대단한 것, 불굴의 의지가 필요한 것’ 그런 것으로 부르셔야 근사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인간을 향한 신의 명령, 요구, 부름은 어떤 특별한 성취나, 굉장한 업적이나, 일상을 버리고 신비한 체험이나, 지독스러운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일상에서, 본래성에 대한 요구입니다. 이 본래성을 따르는 것은 신의 부름에 대한 응답과 순종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본래성을 벗어나 본래적 존재를 회복할 때, 인간은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잔치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는 단순한 선택을 넘어, 존재의 새로운 차원에 응답할지 결정하는 실존적 결단을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가볍고 쉬운 일이 아니지요.
마태복음 22장에서는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초대를 단지 거절하는 것을 넘어, 초대하는 자들을 모욕하고 죽인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본래성에 대한 비본래성의 저항은 엄청나게 격렬합니다. 사람들은 존재하기보다는 소유하는 삶에 집착합니다. 마치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들의 저항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내려놓는다’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지만 실제로 삶에서 우리가 매달려 있는 뭔가를 내려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잔치로의 초대는 틸리히 용어로 “궁극적 관심”으로의 부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궁극적 관심”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서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는 것, 표면적인 삶이 아니라 자기 삶의 궁극으로 나아가는 것, 이는 삶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초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왕의 초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궁극적인 존재의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진정한 자신이 되라’는 외침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순간이지요. 이 초대는 그저 잔치라는 행사에 형식적인 초청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론적 불안 속에서 궁극적 존재와의 관계를 추구하라는 부름인 것입니다. “청하였더니” 그러니 부름, 왕의 초청은 대단히 무거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오소서” 그 부름에 응답할 준비가 되셨나요?
- 잔치의 본질적 의미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앞서 언급했듯이 잔치 참여를 거절한 사람들의 대답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뭐 그리 잘못한 것 같지 않습니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결혼하는 일은 분명 중요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유가 있어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문제는 이에 대해 “주인이 노하여”로 반응합니다. “임금이 노하여” 이것은 ‘잔치가 중요하냐, 일상의 중요한 일들이 중요하냐’의 문제로 접근하면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잔치로 초대는 그만큼 절대적이고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왕이 분노할 만큼 본질적이라는 것이지요. 무조건적이라는 것입니다. 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잔치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리도 중요한 절대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는 참여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참여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본래성으로 회복하고 본래적 삶을 산다는 것이요,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본래적인 것들에 눈이 멀어 비본래적 삶을 산다는 뜻이지요.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 특히 소외된 자들은 잔치를 통해 비로소 본래적인 만남과 교감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잔치는 단순한 식사가 아닌, 존재가 본래적인 의미와의 관계를 맺으며, 더불어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경험입니다. 잔치는 나와 타자가 서로 만나는 본질적 상호작용의 장입니다. 현상학에서는 이러한 만남이 개인의 본질을 새롭게 형성하고, 나아가 존재의 새로운 차원에 접근하는 계기를 마련한다고 봅니다. 잔치에 참여하는 소외된 사람들은 기존의 자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환대받는 관계 속에서 존재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한 존재의 확장’으로, 잔치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면서 더 넓은 차원에서의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되고, 타인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게 되며, 결국은 신의 얼굴, 신의 뜻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지요.
주인이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여는 장면은,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경험되고 체험되는지 보여줍니다. 잔치의 주인은 인간에게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잔치에 초대하고 관계를 맺으려 합니다. 잔치는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신이, 자신이 진정한 자아와 만나 교감하는 장입니다. 궁극적 실재(신)와 교감하는 자리가 됩니다. 신의 초대를 받은 자들은, 이를 통해 신적 실재와의 본질적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히 지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체험되고 직관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잔치, 이 만남은 인간이 궁극적 실재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존재를 넘어서 신과의 일치를 경험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잔치이며, 바로 삶의 본질입니다. 본래적인 인간의 삶인 것이지요.
▣ 나가는 말
- 삶은 신이 베푼 잔치다
고해(苦海), 삶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위대한 현인들이 바라본 삶은 고통으로 가득한 부조리한 세계였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생의 질고(疾苦)를 경험해 왔지요.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보다는 힘겹고 고단하고 고통스러웠던 일이 훨씬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놀라운 역설, 통찰은 삶이 잔치라는 것입니다. 신은 우리를 잔치 자리에 초대한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이 수 억만년 우주 역사에서 인간이라는 생명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존재, 사랑하고 창조할 수 있는 존재로 우리가 있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하기까지 한 존재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신이 우리에게 주신 삶은 잔치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잔치의 삶을 회복하라는, 그 세계에 참여하라는 요청 아닐까요.
- 잔치를 망치는 것들
‘안식일’이라고 하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바리새인’이라는 경건주의/엄숙주의에 매몰된 이들, ‘높은 자리’라는 허영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 ‘밭과 소’라고 하는 물질에 빠진 사람들, ‘장가’라는 관계에 집착하는 이들… 많은 이들이 잔치의 삶, 본래적인 삶으로 초대받았지만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진정한 삶을 잊고 삽니다.
반면, 실존적 결단을 통해 비본래적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존재로서 삶을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잔치를 수락한 소외된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 오히려 이 세계의 가치에서 소외되어 있기에, 상대적으로 실존적 결단이 쉽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예수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하지 않았을까요. 가진 자들은 비본래적인 요소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에겐 자신의 전 존재를 부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 매달리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실존적 결단을 통해 궁극적 관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신앙은 단순히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 속에서 결단을 내리는 도약을 통해 성취됩니다. 신앙은 불안과 도약을 통해 도달하는 절대자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잔치 비유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절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실존적 결단을 통해 진정한 신앙으로 도약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그 놀라운 신의 잔치 초대에 우리 함께 손잡고 응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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