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4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l3lGQitWWm8?si=SiftV_E6FVMNQ9ri
▣ 서론-하이데거의 눈을 빌리다.
- 내던져진 존재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 존재(Dasein)는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거나 의도해서 세상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던져진 채로 세상 속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역사적 조건과 문화 속에서 태어날지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조건들(시대, 몸, 언어, 문화, 죽음을 향한 유한성 등) 속에서 이미 “던져진” 상태로 존재합니다. 이 ‘던져짐’은 수동적이고, 우발적이며, 탈출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즉, 우리는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마치 ‘던져진 것’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인간은 완전한 자유의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가능성을 열어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구조’ 중 하나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던져짐’과 ‘가능성’이라는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내던져진 존재는 필연적으로 “근본적 불안(Angst)”을 동반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지요. 이 불안은 우리를 “세상의 일상성(das Man)”으로 도피하거나,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 쫓겨난 가인
가인(Cain)은 동생 아벨을 죽인 죄 때문에 에덴 동쪽 “놋 땅”으로 쫓겨나게 됩니다(창4:16). 이 쫓겨남은 가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조건입니다. 가인은 살 곳을 스스로 정한 것도 아니고, 유배를 자청한 것도 아니며, 벌로서 쫓겨난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땅, 정처 없는 삶, 죽음의 위협 속으로 던져진 존재가 된 셈입니다. 가인 역시,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내던져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놋 땅(쉼이 없는 땅)으로 쫓겨난 가인의 모습은 한 개인 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이데거식으로 ‘내던져진 인간 존재’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내던져짐은 단순한 수동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던져진 그 자리에서 자기 존재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책임이 함께 발생합니다. 가인도 쫓겨난 이후, 단순히 파멸하거나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는 놋 땅에서 살아가야 하고, 자손을 낳고, 도시(에녹성)를 세우기까지 합니다(창4:17). 비록 심판받았지만, 그는 던져진 그 자리에서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 책임을 지닙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내던져진 자리,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책임을 진 존재이지요. 이 세계의 현실에 내던져진 우리는 “내던져진 존재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인간”입니다.
이렇게 내던져진 인간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자신의 실존 전체가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상태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가인은 쫓겨나면서 두려워합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창 4:14). 가인의 두려움 역시 단순한 공포(fear)가 아니라, 에덴에서 쫓겨난 “존재 자체가 갖는 불안(anxiety)”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근본적 불안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표를 주어 보호해주지만(창4:15), 그는 영원히 ‘이방인’처럼 떠도는 존재로 남게 되지요.
- ‘표’는 무엇인가?
이때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일곱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그를 만나는 누구든지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4:15)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 ‘표’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지만, 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보증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인간을 죽음의 파멸, 존재의 불안에서 보호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미래를 열어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즉, 표는 가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표”는 죄와 파멸만이 인간의 운명이 아님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가장 절망적인 내던져짐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열어갈 가능성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은 비록 내던져진 존재, 에덴에서 쫓겨난 존재지만, 에덴으로, 진정한 본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 것이지요.
서론에서 에덴에서 쫓겨난 가인의 이야기를 하이데거 철학을 빌어 해석해 보았습니다. 가인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하이데거가 성서 해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구성한 것인지, 제가 하이데거 철학을 성서 해석의 도구로 본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하이데거의 철학은 가인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 굉장히 적확한 도구, 관점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논의를 좀 더 확장해보겠습니다.
▣ 가정, 가깝고도 먼
- 익숙하지만 질문해야 할 단어, ‘가정’
‘가정’이라는 말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단어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멀리 있다”라고 말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아닐까요. 가장 친밀하고 익숙하지만, 동시에 깊이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말합니다. “가장 사랑해야 할 존재들을 향해 인간은 때때로 가장 잔인하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의 실존, 내던져진 자로서의 인간의 비극적 실체를 잘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가정이야말로 인간의 사랑과 죄, 헌신과 갈등, 회복과 파괴가 가장 치열하게 교차하는 자리입니다. 그 어느 곳보다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떤 곳보다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만드는 끔찍한 곳이기도 하지요.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도 없고, 가족만큼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존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신앙의 큰 위로입니다.
시설에서 아이들을 경험하며 여러 가지 양가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어떨 때는 아이들의 상처받은 영혼이 너무 마음이 아프고 한없는 동정을 느끼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배배 꼬인 녀석들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가정에서의 분리’ ‘공동체에서 쫓겨남’인 것 같습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분리된, 쫓겨난 아이들의 상처 입고 뒤틀린 파괴된 영혼을 봅니다. ‘공동체’ ‘함께’라는 것에서 분리된 인간이 얼마나 끔찍하게 왜곡될 수 있는지 절감하게 됩니다.
- 관계적 존재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2:18) 창세기 2장에서 아담(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다” 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단지 살아있는 존재를 넘어서, 서로를 향해 있는 ‘관계적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성서의 인간관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근원적으로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응답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 존재의 필수적인 요소는 관계입니다. 인간의 존재, 삶은 ‘홀로서기’가 아니라, 관계성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지요. 가정은 그런 존재적 응답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공간입니다. 존재와 사랑은 어떤 개념이 아니라, 매일의 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실천입니다. 자녀를 향한 끊임없는 수고와 헌신, 배우자와의 진정한 대화와 타협, 부모를 향한 이해와 받아들임… 이 모든 것이 “이마고 데이”(헬라어-‘하나님의 형상’)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가고 그 형상을 사는 과정입니다.
- 누가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애써 찾아온 가족들을 향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마12:48)라는 말은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가족’이라는 개념을 전복시키는 듯 보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마12:50) 이 말씀은 혈연이 아닌, 뜻을 따르는 자로 맺어지는 영적 가족의 가능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를 가정으로 보고, 가정을 교회로 살아가야 한다는 복음적 요청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자 마태가 속한 마태 공동체는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였습니다. 마태 공동체는 유대교 내부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유대 전통과 거리를 두고 예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야 했지요. 다시 말해, 혈연적 가족이나 유대인이라는 혈통적 민족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적 연합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마태 공동체의 정체성 선언이자 결속의 메시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한 교훈을 넘어서, 마태 공동체의 자기 이해,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예수는 가정을 ‘닫힌 울타리’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모이는 열린 공동체로 새롭게 확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 깨어진 가정,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가정의 이야기를 읽을 때, 단순한 혈연적 가족이 아닌, 신앙의 공동체, 내던져진 존재의 회복 등의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상적인 가정보다 오히려 ‘상처 입은 가정’들을 더 많이 다룹니다. 형제를 죽인 가인, 형제에게 팔려간 요셉, 아버지를 속인 야곱… 그러나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들을 이어갑니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부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 부서진 틈으로 빛을 받아들인다.” 가정(공동체)의 갈등과 아픔은 우리에게 자기 존재의 실체를 보게 합니다. 절망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절박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진정한 공동체를 희망하게 됩니다. 회복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표를 우리에게 줍니다. 상처 입은 가정과 공동체, 깨어진 영혼과 관계에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그 가능성이 바로 ‘은혜’입니다.
▣ 에덴의 동쪽
- 『에덴의 동쪽』
노벨 문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작가 존 스타인벡 (John Steinbeck)의 대표작으로 1952년 작품입니다. 작가에 따르면, 이 작품은 그의 “모든 작품 중 가장 중요하고 개인적인 것”이고 아들에게 바치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실제 자기의 삶을 반영한 작품이지요.
제목을 통해 우리는 이것이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 가인, 내던져진 인간 실존에 관련된 이야기임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에덴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던 완전한 공간이지요. 하지만 인간의 죄성은 그 완전함을 깨뜨렸고, 결국 인간은 에덴 밖에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에덴의 동쪽』은 바로 그 “에덴 밖”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인간은 상실을 안고, 상처를 짊어지고, 사랑을 얻고자 투쟁하며 가족이라는 복잡한 연극을 살아가야 하지요.
- 편애와 상처: 반복되는 고통의 족보
이 작품은 2~3대에 걸친 가족의 이야기인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와 그로 인한 깊은 갈등과 상처가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자기 아버지에게 편애를 받았던 애덤은 자신의 쌍둥이 아들 중 아론을 더 사랑하고 갈렙은 외면합니다. 성경 속 가인 역시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자 동생 아벨을 시기해 살해하고 말지요. 사랑은 특히, 그것이 편애일 때, 죄의 뿌리가 되기도 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감정은 자신을 무너뜨리거나 반대로 악으로 이끄는 유혹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고통의 이야기는 반드시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닙니다.
사랑받았지만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건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과 사랑받지 못한 고통에 시기와 증오와 미움으로 스스로 파멸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굉장히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 작품의 맨 마지막에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평생을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자 했으나 그것을 얻지 못해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아들, 그 상처로 온갖 나쁜 짓을 하지만 내면에 깊은 죄책감을 안고 사는 못난 아들 칼(갈렙), 자기의 의에 빠져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한 아버지 애덤, 이 두 사람을 죽기 전에 화해시키려 합니다. “애덤, 그에게 당신의 축복을 내려 주세요. 죄의식에 사로잡혀 혼자 괴로워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세요. 애덤, 제 말이 들리세요? 칼에게 당신의 축복을 내려 주세요!” “칼을 도와주세요, 애덤. 그를 도와주세요. 다시 기회를 주세요. 자유롭게 해 주세요. 인간이 짐승보다 나은 이유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를 해방시켜 주세요. 당신의 축복을 내려 주세요.” 아버지 애덤은 마지막 힘을 내 손을 조금 올렸다 내립니다. 그리고 “팀셸…” 한마디 말을 남기고 영원히 잠이 듭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창세기 4:7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에서 온 말입니다. “다스릴 수 있다”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가인을 향해 한 말입니다. 인간은 한계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선택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상처받은 아버지로 살아갈 수도 있고, 상처를 극복하고 사랑을 주는 아버지로 살수도 있습니다. 에덴의 동쪽의 삶에, 내던져진 자의 삶에 빠져있을 수도 있으나, 다시 에덴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을 향한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품을 통해, 삶을 통해 스타인벡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 결론 – 에덴의 밖에서, 다시 쓰다.
- 팀셸 : 너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에덴 밖에서 시작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에덴의 동쪽에서 내던져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하지 않은 시간과 가정 속에 태어나며, 그 안에서 사랑받거나 거절당하고, 미움을 배우거나 용서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그 ‘던져짐’이 곧 ‘결정됨’은 아닙니다. 사랑받지 못한 상처가 아무리 커도 우리는 그 상처를 극복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에덴의 동쪽』은 상처받은 인간의 서사이며, 가족의 단절 속에서도 회복 가능성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가정은 상처의 장소이지만, 그 상처를 꿰매고 회복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가정은 인간이 신을 처음 만나는 장소”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너를 자녀 삼으셨다.”(요1:12) 새로운 가족 이야기를 써가자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32에서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철학자 폴 리꾀르는 “용서는 시간을 역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의 행위”라고 했습니다. 용서는 과거의 결박을 끊고, 미래의 관계를 새롭게 여는 열쇠입니다. 부모의 실수, 자녀의 오해, 배우자 간의 갈등… 성경은 말합니다. “너도 용서받은 자다. 그러니 용서하라.”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팀셸…” 너는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뜻’ 안에서,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전에 주지 못한 사랑을 줄 수 있고, 받지 못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고,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거절할 것인가.” 우리는 감정의 희생자가 아니라, 사랑의 창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너는 그 죄를 다스릴 수 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용서와 용납을 통해 무엇보다 우리의 가정 공동체가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회복의 장, 가정을 넘어 믿음의 공동체, 신앙의 공동체, 교회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계의 단절과 분리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이 땅의 교회가 새로운 가족, 진정한 공동체, 연합과 조화, 상생의 길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말합니다. “현대인은 너무 효율적이라, 관계를 맺기보다 연결만 하려 한다.” 우리 삶에서, 가정에서, 연결이 아닌 관계를 맺기를, 효율이 아니라 헌신과 사랑으로 에덴을 향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고단하고 일그러진 삶 속에 고통받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당신께서 주신 표를 기억하게 하소서.
에덴을 향한 선택과 삶을 살게 하소서.
가정과 공동체를 회복시키시고
그 안에서 은혜를 경험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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