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8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4mIQl5ixbXY?si=3o-OtvrUe3cOJJeC
▣ 들어가는 말
- 싸움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다
사람은 극적인 순간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여행을 함께 가보라’는 말이 있지요. 이러 저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평소에 존경스럽던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혹은 이권이 걸린 일 앞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에서도 의도적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갈등상황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지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싸움은 그가 진짜 누구인지 가장 잘 드러내는 도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싸움을 통해서 상대도, 심지어 자신도 정체를 드러내게 되지요.
『장자』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나라 선왕은 투계를 좋아했는데, 좋은 싸움닭을 구해 투계 사육사에게 최고의 투계로 만들라 명합니다. 열흘이 지나, “싸우기 충분한가?” “아직 멀었습니다. 강해지긴 했지만 교만합니다. 교만을 떨치지 않으면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열흘 후, “아직 멀었습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의 소리와 그림자에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 또 열흘이 흐릅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조급함은 버렸으나 상대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그리고 또 열흘 후에, “이제 되었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나무와 같은 목계가 됐습니다. 이제 다른 닭들은 모습만 보아도 도망갈 것입니다.” 목계는 상대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읽히지 않는 존재입니다. 상대를 얕보는 교만한 마음도, 공격적인 마음도 없고 상대의 움직임과 도발에 쉽게 움직이거나 반응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생각과 의도, 감정을 가졌는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계지덕”의 유래입니다.
이런 경지가 바로 『손자병법』에서 강조하는 ‘무’의 경지입니다. 무형(無形)하고 무성(無聲)하면, 형태가 없고 소리가 없으면, “능위적지사명(能爲敵之司命)”이라. 적의 사명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명이란 탄생과 죽음을 관장하는 천상의 관리입니다. 그러니 적의 사명이 된다는 것은 적군의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손자(손무)가 말하는 최고의 싸움 기술은 적은 드러내고 자신은 숨기는 것입니다.
현대의 수많은 CEO가 이와 같은 병법서를 통해 자신들의 경영철학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싸움의 기술은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기술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근원적으로 싸움꾼입니다. 우리 안에는 수천, 수만 년을 이어온 전사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혹독한 자연과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의 힘. 온갖 고통스러운 환경과 조건, 수많은 적과 타인과 싸움을 통해 지금까지 인류는 생존해 왔습니다. 바로 그 거룩고도 숭고한 힘. 싸움꾼으로서의, 전사로서의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성향, 싸움꾼의 기질, 싸움을 통해서 인간의 역사가 진행되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싸움꾼으로서의 인간이 없었다면, 인간은 지구상에서 발전하고 번영하고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거룩한 싸움꾼
- 너는 누구냐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위대한 지도자들, 어쩌면 진정한 전사들, 싸움꾼들인 사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바로 직전의 이야기입니다. 전체 사사기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발견됩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신다는 표현은 그들의 본질을 드러내려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감춰진 것은 드러나야 하지요. 문제는 적군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드러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신은 전지하시니 백성들의 속내를 모를 리 없지요. 그러니 여기서 이스라엘을 시험한다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일깨우겠다는 뜻이 됩니다. 놀라운 통찰입니다. 훌륭한 싸움꾼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출발점이겠지요. 손자병법의 구절입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불지피이 지기 일승일패, 불지피 불지기 매전필패”
자신과 적을 모두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상대를 알지 못하고 자신만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질 것이다.
자신도 모르고 상대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를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전쟁이라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전투라면, 자기 인생이 걸린 문제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싸우려는 자는 반드시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전사라면, 진정한 삶의 싸움꾼이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참된 자유라면, 무엇보다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먼저 자신의 정체부터 밝혀야 합니다. 진짜 자기 모습을 보려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비록 고통스러운 진실일지라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 진실은 싸움, 전쟁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 싸움을 배우라
이어서,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이 구절이 굉장히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이 구절에 따르면, 다음에 이어질 사사기는 다양한 전투와 전쟁을 통해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아끼는 백성들, 자녀들을 위해 험한 길을 바르게 하고, 어려움은 피하게 하고, 힘겹고 무거운 짐은 대신 져주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전쟁을 모르는 이들이 있으니 이들에게 전쟁을 가르쳐야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조폭이나 깡패도 아니고, 정의와 사랑의 신이 ‘사랑의 기술’ ‘평화의 기술’이 아니라 싸움의 기술을 가르친다니요. 맙소사!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분이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전쟁이라니요. 전쟁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 전쟁을 가르치신다니요.
그 전쟁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방의 족속들을 남겨두었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 시돈 족속, 히위 족속… 어떻습니까? 마치 경기 시작 전에 링 위에서 사회자가 관중들에게 상대해야 할 선수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홍코너~ 체중, 키, 상대전적, 경력…”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전투를 모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능숙하게 수행하는 노련한 전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결국, 사사기는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싸움의 기술”을 가르쳐 주시려는 ‘병법서’ 같은 성격의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단 사사기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저 아무런 노력도 필요 없는, 어떤 고난도 피하게 하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는, 편안하기만 한 쉼, 평화를 주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시련의 장으로, 전쟁터로 몰아넣으시고 치열한 전쟁을 통해서 승리의 기쁨을 알게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성서는 그저 착하고, 온유하고,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고… 이런 나약하기만 한 그런 삶을 강요하는 책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분명 성서는 오히려 굉장히 투쟁적이고, 진취적이고, 혁명적인 책입니다. 그 어떤 선동보다 더 위험하고 근본적인 저항의 책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 그리스도인은 싸움꾼이다.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백성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셨던가요? 그런데 그런 분이 왜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싸움을, 전쟁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일까요?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이 본문(사사기의 서론) 이후의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투를 배워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손자병법같이 다양한 상황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를 소개하면서, 어떻게 전쟁이 일어났는지(원인), 어떻게 전쟁을 준비해야 하고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하고, 실제 전쟁에서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어떨 때 나아가고 어떨 때 물러나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전쟁에 승리할 수 있고, 또 어떻게 할 때 패배하게 되는지 등… 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기를 얼핏 보면 똑같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듯 보이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뛰어난 병법서들이 그렇듯,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한 다양한 전투를 보여주어야 하고 각각의 전쟁과 전투를 상세하고 꼼꼼하게 분석해야만, 제대로 된 전투의 기술과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이렇게 상세하게 수많은 전쟁을 다루면서,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람은 노예가 아니고 독립적인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시키는 대로 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오롯이 자신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싸움의 기술은 필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종하는 자가 아니라 저항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떠밀려 가는 삶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삶이라고 하는 전장에서 끝없는 전투를 치르는 전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하지만, 동시에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전쟁은 필수과목인 셈입니다. 싸움을 알지 못하면, 능숙한 전사가 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남는 일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고, 또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엇보다 자신의 백성들이 뛰어난 용사가 되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집안에서 곱게만 길러지는 화초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사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제대로 싸움을 하는, 능숙하고 노련한, 용감한 용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싸움을 통해 자신이 가진 능력과 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전사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좋은 전사일까요? 어떤 이가 훌륭한 싸움꾼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472년에 살라미스 해전을 기린 《페르시아인들》이라는 작품을 썼는데, 여기에 그리스를 침공하던 크세르크세스의 전령이 궁전의 태후와 문답을 주고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누가 그들을 지휘하나요?” “그들은 누구의 노예도 신하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런 자들이 어떻게 대항하죠?”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통치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기꺼이 지는 자유인입니다. 그들은 노예와 다릅니다. 그러니 엄청난 페르시아 군대에 대한 아테네군의 승리는, 어쩔 수 없이 끌려 나온 노예들에 맞서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자유인들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감히 진정한 자유자 만이 진정한 전사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유자 만이 진정한 신앙인일 수 있습니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주주의로 인해 아테네의 힘은 커졌다. 평등은 좋은 것임이 입증되었다. 아테네인들이 억압적인 통치자들 밑에 있었을 때는 이웃 나라 사람들보다 전투에서 나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갖게 되자 그들은 누구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자유의 힘은 이렇게 굉장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삶에서 더 큰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행복을 넘어 환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삶은 자유자 일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전사는 자유자 입니다. 복종, 굴종이 아니라 저항하는 자, 스스로 존재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전사가 됩니다.
▣ 나가는 말
- 전사가 되라!
“만일 내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난 더 이상 남자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내게 주어진 혁명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난 더 이상 혁명가가 아닐 것이다.” 체 게바라의 말처럼,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가 존재할 수 없고, 혁명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혁명가가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룩한 전쟁에 나선 하나님의 전사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여전히 신앙인인가? 여전히 사람인가? 여전히 희망하며,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에서, 사람에서, 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세상에서 불의가 저질러질 때마다 분노에 떨 수 있다면, 우리는 동지다.”체는 혁명가는 모든 불의에 저항하는 자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무엇이라 여기고 있을까요? 어떤 정의를 내리고 있을까요? 그래서 그 기준에 따라 삶을 보고, 자신을 보고 있는지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의 불의에 대해, 교회의 잘못에 대해, 우리 자신의 게으름과 나약함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면,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체 누구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전사의 심장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 자유다!
자유로운 자만이 진정한 전사가 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자유로워지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터무니없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혁명가를 이끄는 것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이다. 이런 감정이 없는 위대한 혁명가란 생각할 수 없다.”(체) 그가 진정한 혁명가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저 영웅심에 불타는 객기를 부리는 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영웅이고 진정한 자유자며, 혁명가였습니다. 진실로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진실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저항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삶을 사랑하고, 세상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의 불의에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와 저항만이 진정한 혁명,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분노와 저항, 싸움을 일으키는 근원적 뿌리에 이러한 깊은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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