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비유
막 4:26-34, 성령강림후 셋째 주일, 2015년 6월14일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예수님은 어떤 것을 가르치려고 할 때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사실을 깨닫게 하는 교육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다양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농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막 4장에는 씨를 주제로 하는 비유가 세 가지 나옵니다. 하나는 막 4:1-9절로서 씨 뿌리는 사람과 밭에 대한 이야기이고, 둘째는 26-29절로서 저절로 자라는 씨에 대한 이야기이고, 셋째는 30-32절로 겨자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제3 독서는 위 이야기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
막 4:26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이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씨 뿌림은 인간만의 고유한 행위입니다. 고대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의 경쟁에서 앞설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씨를 다룰 줄 안다는 것입니다. 수렵활동으로만 살았다면 인간 문명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저는 금년에 집 마당 한 구석에 대 여섯 평의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거기서 나는 채소를 먹습니다. 가장 일찍 나오는 것은 상추 종류고, 다음으로는 깻잎과 고추와 오이입니다. 앞으로 토마토와 가지와 호박이 나올 겁니다. 텃밭에 그물망으로 펜스를 쳤습니다. 펜스가 없으면 고라니가 다 먹어치웁니다. 동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수렵활동으로만 먹고 삽니다. 그들의 삶은 고단하고, 더 나가서 살벌하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인류 조상들도 그렇게 살다가 언제부터인가 농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삶의 기본은 씨를 뿌리는 겁니다. 지금 본문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이런 전통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씨를 주인공으로 놓고 말씀을 따라가 보십시오. 어느 농부의 손에 의해서 밭에 심겨졌습니다. 그는 어두운 땅 속에 갇혔습니다. 종자 씨 주머니에 담겨있을 때는 친구들이 옆에 있어서 괜찮았지만, 이제 땅속에는 외톨이로 그 상황을 버텨내야만 합니다. 낮에는 따뜻한 온기가 있지만 밤이 되면 춥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 몸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피부가 썩기 시작하다가 몸체도 썩어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몸에서 가녀린 줄기가 삐져나오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자기 몸을 뒤덮고 있던 흙을 걷어내고 세상으로 머리를 내밀게 되었습니다. 땅 밖은 별천지였습니다. 햇빛과 물과 탄소가 자신의 몸 안에서 생리적 작용을 일으키면서 몸이 쑥쑥 자랍니다. 자신의 몸이 언제 그렇게 변했는지를 자신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힘이 자기를 그렇게 밀어 올리는 걸 느낄 뿐입니다.
농부의 시선으로 이 상황을 다시 보실까요? 그는 추수 때가 올 것을 기대하고 씨를 뿌렸습니다. 그가 한 일은 좋은 씨를 가려서 보관하고, 밭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쟁기질을 하고, 적당한 퇴비를 주는 겁니다. 씨를 뿌리고 며칠 뒤에 밭으로 나갔습니다. 아주 작은 떡잎이 보입니다. 얼마 후에는 부쩍 자란 줄기가 보였습니다. 때가 되자 이삭이 패고 열매가 달렸습니다. 그런 과정에 농부가 직접 관여한 일은 없습니다. 그는 자고 씻고 먹고, 다른 일을 하다가, 나중에 씨가 움이 터서 자란 결과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상황을 본문 막 4:28절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여기서 강조점은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당연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이치를 모르는 것처럼, 또는 외면하면서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이 온갖 걱정과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처럼 간단하고 당연한 이치를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잠간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들은 다 저절로 주어집니다. 중요한 것들을 손에 꼽아보십시오. 공기가 없으면 5분 이상 버텨낼 수 없습니다. 공기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지구 생태환경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태양 빛도 살아가는데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물도 필수입니다. 빛과 물은 인간이 공장에서 생산해내는 게 아닙니다. 공기와 태양과 물 때문에 밤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대개의 걱정은 공연한 것들입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것 때문에 밤잠을 못잡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실연당한 것으로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물론 감당하기 힘든 큰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불치병에 걸린다거나 사업이 파산하면 크게 낙담하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견뎌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극단의 경우보다는 사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즉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서 근심 걱정에 휩싸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겁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놓쳐서 벌어지는 비극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막 4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가 다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시 하나님 나라를 자신들이 건설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 종류의 집단이 거기에 속했습니다. 첫째는 사회 혁명가들입니다. 이들은 무력 혁명을 꿈꾸는 이들입니다. 평소에 칼을 품에 숨기고 다니다가 친(親)로마 매국노 등을 처단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이런 계열에 속한 이가 있었다는 게 학자들의 중론입니다. 둘째는 율법학자들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서기관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유대교 신학자들로서 율법을 연구 발전시킴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일궈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실제 삶에서 완벽하게 구현해내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은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쓰는 이들입니다. 나름으로 성과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주장들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폭력을 통해서라도 사회 정의를 세워보려는 사람들이 있고, 학문을 통해서 사람들을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르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휴머니즘에 근거한 도덕과 윤리가 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첩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그런 노력으로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행하고 이루시는 겁니다. 이런 말이 멀리 느껴지시는지요. 오늘 제3 독서의 두 번째 비유를 읽으면 이 사실을 좀더 가깝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겨자씨 비유
막 4:30-32절에는 겨자씨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겨자씨만이 아니라 씨는 다 작습니다. 코스모스와 채송화 씨는 웬만해서 눈에 잘 뜨이지 않습니다. 지난 몸에 저는 집 마당 여러 곳에 해바라기 씨를 심었습니다. 그게 지금 6,70센티미터 크기로 자랐습니다. 앞으로 2-3미터 가까이 자랄 겁니다. 겨자씨는 더 작지만 3-4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본문 32절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겨자씨와 줄기를 각각 따로 본 것으로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아니라 외계인이 본 것으로 합시다. 어떤 느낌이 들까요? 씨는 겨우 눈에 보일 정도로 작습니다. 줄기는 씨에 비해서 수천, 수만, 수십만, 그 이상으로 큽니다. 모양도 완전히 다릅니다. 두 가지를 서로 연결해서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작은 겨자씨가 변해서 거대한 줄기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매일, 매순간 일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기적의 세계, 마술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너무 놀라운 일들이 차고 넘칩니다. 이런 것에 눈을 뜬다면 다른 일로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공연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것은 도사들에게나 어울리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하고 생각하시나요? 지금 당장 돈 벌고 인생 설계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해, 하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 신비와 그 능력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건 곧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삶을 추상적으로만 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상투성이라고 부릅니다. 사물과 세상 이치와 인간관계와 역사를 뻔한 것으로 여기는 삶의 태도가 상투성입니다. 그런 상투성은 영혼을 질식시킵니다. 그런 삶은 실제 숨을 쉬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에 입력된 정보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로봇에게나 어울립니다.
예수 사건은 일종의 겨자씨와 같습니다. 그는 평범한 유대인 한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형제들도 여럿이었습니다. 아무도 그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혹은 메시아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대교 최고위층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양측 사이에 충돌이 심해지면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당합니다. 이를 주도한 집단은 유대교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입니다. 오늘날 우리로 말하면 대법원입니다. 이들의 눈에 예수님은 결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볼품없는 겨자씨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생전에 이루신 일도 사실 별 볼일이 없습니다. 그는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생애라고 해봐야 3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불교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80세를 살았고,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63세를 살았습니다. 이들은 이미 생존 시에 큰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물적, 인적 토대를 탄탄하게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은 실패였습니다. 마치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썩는 것과 같습니다. 이 순간에 하나님이 예수님의 운명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셨다는 것이 사도신경이 전하는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류로 하여금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한 알의 겨자씨가 자라 새들이 깃들일 정도가 되었다는 본문에 딱 어울리는 일이 예수님의 운명에서 벌어진 겁니다. 마가복음 독자들은 일련의 씨 비유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운명이 하나님 나라와 일치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을 겁니다. 오늘 우리도 마가복음 독자들과 똑같은 심정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설명에 실감이 덜 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몰이해나 오해, 또는 무관심이 그 대답입니다. 너무 현란하여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이 세상의 삶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 말씀을 들어도 ‘그게 뭔데!’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죽어서 가게 될 천당인가, 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에도 바쁜데 무슨 죽어 천당이야, 하고 냉소적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느낌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신앙언어와 세상언어 사이의 간격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다른 게 아니라 생명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은 곧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는 걸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걸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숨 쉬고,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행위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완성하려는 노력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표면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완성된다고, 즉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인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를 성취함으로써 생명이 완성된다고, 즉 구원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쪽이 진리일까요?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옳다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이 그걸 그대로 인정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세상과의 진리 논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옳은지를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삶의 능력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염려에 빠지지 않고, 기쁨과 평화가 삶의 능력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곧 영혼의 풍요로움입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을까요?
저는 오늘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씨 비유’ 두 가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씨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비슷하다는 비유였습니다. 두 비유 모두 씨와 열매, 또는 씨와 줄기의 관계를 밑그림으로 합니다. 씨는 작고 초라합니다. 그러나 줄기와 꽃과 열매는 화려합니다. 지금 우리를 포함한 세상은 씨와 같습니다. 아직 생명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생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 생명의 완성이 곧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를 믿는 우리는 생명의 완성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아직은 씨처럼 볼품이 없지만 우리의 미래는 풍성한 꽃이나 열매입니다. 그게 우리의 미래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기쁨과 평화의 능력이 그의 삶에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연한 것으로 인해서 좌고우면, 일희일비, 좌불안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저력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제대로 살고 있을까요?
이런 삶의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지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이 씨에만 머물러 있어서 그렇습니다. 씨만 보면 꽃과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꽃과 열매는 씨에 은폐되어 있어서 신앙의 눈이 아니면 보이지 않습니다. 이걸 극복하려면 일단 씨를 보지 말고 씨의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지금 여러분이 처한 삶의 조건을 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약속된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그 약속된 미래에 비하면 지금 살아가는 조건의 차이는 미미합니다.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나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나 부활의 빛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친구나 가족이 많아서 늘 자랑스럽고 유쾌하게 사는 사람이나 혼자 평생 외롭게 산 사람이나 생명이 완성될 부활의 차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씨에는 약간의 상처가 있어도 생명만 남아 있으면 아무 상처가 없는 씨와 마찬가지로 결국 똑같은 꽃과 열매를 맺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상상할 수 없이 풍요로운 생명의 열매를 맺을 미래가 바로 저곳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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