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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 22:1-14)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22:1-14, 성령강림후 넷째 주일, 201772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22:1절 이하에는 오늘의 시각으로 동의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려고 시도했다가 천사의 만류로 포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믿음의 정수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상식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광신자의 일탈로 읽힙니다. 보통의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시도 사건에 뭔가 귀한 가르침이 있기는 한 거 같지만 꺼림칙해서 진지하게 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일단 살펴보겠습니다.

 

어린이 번제 의식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고대인들은 신이 인간을 시험한다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욥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시험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초입에서 마귀로부터 세 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문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가 세 가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삭은 그의 아들입니다. 이삭은 그의 사랑하는아들이며, ‘독자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은 언어도단입니다. 이삭을 얻게 되는 과정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자신들의 아들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젊었을 때는 원했지만 이미 사라의 가임기가 지났고,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아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90살이고, 아브라함이 100세 때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삭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얼마나 행복해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자신들의 미래가 바로 이삭에게 달려 있는 겁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서 3대 독자를 키우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 아들을 다시 번제로 바치라는 말을 아브라함이 들었다는 겁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대개는 못들은 척했을 겁니다. ‘내가 환청을 들은 거야.’ 하고 부정했을 겁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명령은 비상식적이고 잔인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속도가 빠릅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집안 형편도 살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 결단할 수 있도록 말미를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명령을 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 번제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서 길을 떠났습니다. 삼일 만에 모리아 산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동행했던 종들을 거기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이삭의 등에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어서 장작을 짊어지기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만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 대목에서의 묘사는 지나칠 정도로 감정이 절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 현장과 비슷한 분위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불과 칼만 손에 들었다는 사실도 인상적입니다. 불과 칼은 고대인들에게 생존의 필수 조건입니다. 불과 칼만 있으면 야생에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에 들린 불과 칼은 성찬 때의 빵과 포도주처럼 생명의 가장 시원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여행하는 삼일 동안 뭔가 대화를 나누었겠지만 성경 기자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다 축소되어 있어서 역설적으로 이야기의 긴장감이 오히려 고조됩니다. 이제 번제가 집행될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두 사람의 대화가 한번 나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일단 부른 다음에 이렇게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7). 이삭이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등에 질 정도의 체격이라면 10대 중반의 나이는 되었을 겁니다.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번제를 드리러 모리아 산으로 가자는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 이삭은 즐거워했을 겁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아버지와 함께 유럽 여행 겸 성지 순례를 가는 겁니다. 번제를 드릴 순간이 되었는데 양이 없습니다. 이삭이 가나안에서 행해지던 어린이 번제 의식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뭔가 이상한 걸 느낀 건 분명해보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은?’ 하고 물었을 겁니다. 이런 문제는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겨놓고 창세기 기자는 아브라함의 대답을 아주 건조하게 이렇게 전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 아브라함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솔직하게 말하려면 네가 번제물이다.’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세계에서 진정한 영웅일까요, 아니면 광신자일까요?

 

절대순종-여호와 이레

이 순간에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 결심을 하고 이삭을 데리고 왔습니다. 삼일 동안 여정에서 수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었을 겁니다. 이제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옳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수없이 반복되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사람도 아닙니다. 90살에 아들을 낳고 기뻐한 아내 사라가 눈에 밟혔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겠다고 사라에게 정직하게 말했는지 아니면 거짓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의 한 전승에 의하면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사라가 여섯 차례나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죽었다고 합니다. 사라의 입장에서는 그럴만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아무런 감정 표현 없이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대답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뒤에 이삭을 양처럼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천사가 나타나서 상황을 해결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나오라.

 

이 대목에 이르면 독자들에게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마음이 교차됩니다. 하나는 안도의 한숨입니다. 이삭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천사가 나타나서 존속살해범으로 오해받을만한 아브라함의 행동을 제어했으니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그런데 그 다음 대목이 목의 가시처럼 걸립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려한 행위가 믿음의 기준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신자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보통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런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 하고 교회에 나오기를 꺼려할 겁니다. 이미 기독교인이 된 우리는 이 이야기가 믿음을 강조하는 은유니까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또는 하나님께서 숫양을 준비시켜주셨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는 식으로 대충 받아들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해피 앤딩으로 끝납니다. 천사에 의해서 칼을 거둬들인 아브라함의 눈에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그 숫양을 잡아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께서 준비시키셨다는 뜻의 여호와 이레로 붙였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의 믿음은 혈통적으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와 혈통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는 우리 기독교인들까지 가장 모범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을 통한 의로움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의로움을 강조하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됩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믿음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절대적인 순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신구약성경은 곳곳에서 화려한 종교행위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이런 설명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걸 인식해야만 순종도 할 거 아닙니까? 오늘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아!’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소리를 들으면 그걸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정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경험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서 독자들이 오해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장 그럴듯한 오해는 기도 응답입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기도해주고 응답도 대신 받아주기도 합니다. 목회적인 차원에서 덕담이나 상담을 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뜻을 전해줄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들을 수 없고, 말씀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걸 믿고 싶은 분들은 믿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도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알아두십시오. 26:36절 이하에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아버지인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가 복음서에 나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알아들으면 광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아브라함 이야기의 핵심은 실제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느냐 아니냐에 있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고대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오직 절대적인 순종만 필요할 뿐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경험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소리를 들은 사람이 그 소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숲을 지나는 사람이 오솔길을 경험한 거와 같고, 큰 공장에 불이 나서 연기가 자욱한 상태에서 비상구의 불빛을 본 거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이삭을 번제로 바칠 생각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이런 절대 순종이라는 경험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대대로 전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그 손자가 다음 세대 손자에게 전했습니다.

 

오늘의 하나님 경험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경험하셨습니까? 그래서 절대 순종의 깊이를 경험하셨습니까? 쉽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은 손에 잡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손에 잡히는 방식으로 확인하려는 사람들은 결국 함정에 빠집니다. 여기에 하나님 경험의 딜레마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손에 잡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과학철학을 가르치는 장하석 교수는 자연과학이 자연을 다 해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속의 물고기가 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도 자연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자연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마어마한 자연을 창조한 분으로서 자연을 초월해서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그를 분석해서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만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최선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전하는 세계를 간접적으로라도 학습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음악을 경험하려면 좋은 음악을 집중해서 들어야 하고, 시를 경험하려면 좋은 시를 자주 접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준이 떨어지는 음악에 휩싸이면 그런 정도의 음악 경험을 하고, 수준이 떨어지는 시만 읽으면 그런 정도의 시 경험에 머물고 맙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밤새워 읽는 사람과 티브이 통속 드라마에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이 각각 어떤 세계를 경험할지 상상해보십시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귀신론에 떨어진 목사의 설교, 철저하게 기복주의에 떨어진 목사의 설교,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설파하는 목사의 설교를 평생 들은 사람들의 하나님 경험이 어떨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와 달리 복음에 투철한 영성가들과 설교자들의 설교를 반복해서 듣는 사람의 하나님 경험은 어떨까요?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완성되어갑니다. 그가 먹은 음식이 그를 결정하고,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그를 결정하고, 그가 접하는 문화가 그를 결정하고, 그가 몸담고 있는 교회와 그 예배와 설교가 그를 결정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 경험의 진수는 예수 그리스도 경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험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성서 기자들의 증언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의 제 2독서인 롬 6:12-23절에서 바울은 그것을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죄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실현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서 우리는 그런 죄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6:2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경험의 핵심은 영생 경험입니다. 시간이 무한 확장된다는 의미(endless)가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eternal)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그걸 지금 여기서 콘서트 입장권을 소유하듯이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것만큼 그것이 확실해집니다. 이런 설명이 여전히 모호하다고 느끼는 분들을 위해서 한 가지 사실만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죽는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더 참혹하고 고독하고 허무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아주 실질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런 준비가 된 사람은 이미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 모든 억압적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창세기 22:1-14
https://youtu.be/Ltz4x6Co_9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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