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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막 8 : 1 - 9, 14 - 21)

2024년 11월 10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B5n8PKJP9bU?si=3uboCMIxuoIT5pmg

▣ 들어가는 말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무슨 일이죠? 길을 잃었나요?”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낙원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여기가 거기예요.”

“낙원이라고요?”

“여기가 바로 낙원이에요.”

현대 미국의 가장 위대한 비극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희곡의 첫 장면입니다. 굴곡진 삶을 겪으며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어쩌면 마지막 삶의 희망을 찾아, 여동생 스텔라를 찾아오지요. 그런데 그곳은 낙원이 아니라, 가혹한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세계, 욕망으로 가득한 생의 밑바닥, 지옥일지도 모르는 곳이지요.

“내 말은 당신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뜻이요. 블랑시. 여기 불 좀 켭시다.”

“불이요? 무슨 불이요? 뭣 때문에요?”

“당신 얼굴을 확실하고 똑똑히 보려는 거요!”

“물론 나를 모욕하려는 뜻은 아니겠죠!”

“아니요, 그냥 사실 그대로를 보자는 거요.”

“사실주의는 싫어요. 나는 마법을 원해요. 그래요. 그래, 마법이요!

난 사람들에게 그걸 전해주려고 했어요. 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아요.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그게 죄라면 달게 벌을 받겠어요! 불 켜지 말아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느끼는 순간, 미치와 블랑시는 결국 파국을 맡게 됩니다. 미치가 블랑시에게 원했던 것은 정말 진실일까요? 사랑을 얻기 위해 의심한 걸까요. 두려움을 확인하기 위한 의심이었을까요. 블랑시 역시 진실에 바탕하지 않은 마법은 허물어지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낙원이 될 수 있었지만, 끝내 서로에게 지옥이 되고 말지요.

우리의 찬란한 삶을 망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 본문의 배경/장치

- 그 무렵에

“그 무렵에”(8:1)라는 표현은 마가복음에 드문 표현입니다. 같은 표현이 1:9과 13:24에도 나타나는데, 1:9의 표현은 예수님의 출현 시기가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맞물려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그 무렵’도 앞에 나오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친 이야기와 연속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7:31에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라는 표현을 보면, 이 병자를 고치는 사건이 이방의 땅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가가 말한 ‘그 무렵’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친 그 무렵이라는 말이고, 그곳이 이방 지역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치유 사건의 결과 그 이방 지역에서도 “큰 무리”가 형성된 것이지요. 결국, 마가는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이방 지역에서 일어난 일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또 / 다시

본문에 “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다시”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 말로 마가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비슷한 상황이 앞에서도 있었다는 것인데, 6장의 오병이어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천 명을 먹인 비유를 해석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과 부담은 바로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이미 같은 사건이 앞서 나왔는데, 굳이 다시 반복하는 것은 왜일까요. ‘또’라는 표현을 보면, 마가 본인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렇게 반복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는 말이겠지요.

- 눈먼 사람들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 바로 이후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힐난하여’ 즉, 트집을 잡고 지나치게 많이 따지고 듭니다. 그러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하지요. 떡 일곱으로 사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표적을 내놓으라니요. 막무가내, 눈뜬 소경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불행히도 예수의 제자들마저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바다를 건너는 배 안에서 “떡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 제자들을 향해 “왜 너희가 떡을 갖고 있지 않은 것 때문에 논의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아직도 둔한(완고한) 마음을 갖고 있느냐? 눈을 갖고도 보지 못하고, 귀를 갖고도 듣지 못하느냐?” 책망합니다.

그리고 두 번의 떡 먹이는 이야기를 회상시키면서,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열둘입니다.”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를 거두었더냐?”

“일곱입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결국, 이 물음 속에 해석의 핵심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마가는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반복해야 하는지 말이지요.

 

▣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 배고픔 / 삶의 허기

앞서 언급했듯이 마가는 “그 무렵에”라는 말로 이 이야기의 배경이 이방 지역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울러 “또 큰 무리가 있어”라는 표현으로, 오병이어 사건 때에도 큰 무리가 있었듯이 이 이방 지역에도 큰 무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유대 민중이나 이곳 이방 민중이나 먹을 것이 없음은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가가 본 이방 지역의 현실인 것이지요.

여기서 “먹을 것”은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로고스(가르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없이 살 때는 먹는 문제가 우선이라 그것에 목을 매지만, 그 단계를 벗어나면 시쳇말로 밥만 먹고 살 수 없는 거지요. 밥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 영의 양식도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마가는 영적 양식을 이곳 이방 민중이 갖지 못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이 사건을 통해 그 문제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 제자들을 불러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8:1) 먹을 것을 갖고 있지 않은 이방 민중들에게 어떻게 대처하고 접근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지요.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8:2)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에서도 그랬듯이, 사건의 동기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연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에 따른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아닐까요. 율법, 행위의 방식을 가르치기 이전에 마음을 가르치는 것이 복음 아닐까요. 그러니 말씀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가슴으로 읽어야 하겠지요.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오병이어 사건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표현입니다. 이방의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먹을 것이 없었다는 표현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 사후 마가가 본 초대교회의 상황, 특히 이방 교회의 모습이요, 이방 기독교인들의 현실이라는 말이지요.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지금의 상황,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은 이방 기독교인들을 지치게 만들고 이방 땅에 세워진 교회는 더 이상 존속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마가의 애타는 위기감이 느껴집니다. 초대교회에서 먹을 것이 없는 이방 지역의 사람들에게 전혀 손쓰지 못하는, 교회 지도층의 무지와 무능과 무책임성에 대한 마가의 비판인 것이지요.

- 이 광야에서

마가복음에서 ‘광야’는 ‘지리적 장소’라기 보다, ‘신학적 메타포(암시)’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1:3)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12)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광야에 대한 마가의 신학적 이해가 남달랐지요. 따지고 보면, 구약의 출애굽 전통의 신앙도 광야의 신앙이고 이것이 바로 구약의 예언자 전통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마가는 바로 이런 예언자적인 정신, 광야의 신앙, 야성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마가는 열두 제자를 주축으로 형성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광야의 신앙, 야성을 버리는 교회의 모습에 저항한 것이지요.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8:4) 이 광야에 먹을 것이 없는 수많은 무리가 있다고 마가는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는 것이지요.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그 이방인들을 먹이지 않고 방치하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덜떨어진 선민의식으로 이방인들,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향해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그곳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고 변명하는 제자들입니다. 너무나 뼈아픈 비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절규 같습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8:5) “일곱입니다.” 먹을 것을 갖고 있지 않은 큰 무리와 일곱 개의 떡을 가진 제자들의 모습이 의도적으로 대비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의 대답이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 드러냅니다. 떡을 가진 자가 아무것도 갖지 못해 굶주리고 있는 이들을 향해 할 말이 아니지요. 결국, 광야의 떡 문제는 떡이 없어서가 아니라, 떡을 가진 자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떡을 가진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떡이 없는 게 아니라 먹일 마음이 없고, 그 마음이 예수의 마음이 아니지요. 이웃과 세상을 향한 완고함. 이것이 마가가 비판하는 유대인들의 성정이고, 제자들의 마음입니다.

 

▣ 나가는 말

- 누가 먹일 수 있는가?

대답은 자명합니다. 일곱 개의 떡을 가진 제자들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의 문제가 남습니다. 예수가 보여주는 모습이 이에 대한 답이 되겠지요.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여기서 ‘가지사’라는 표현은 ‘받았다’라를 뜻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제자들이 가진 일곱 개의 떡은 단순히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인 줄 알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받은 것인 줄 아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청지기 정신입니다. 소유한 것이 깨닫고 보니 내 것이 아니더라는 말이지요. 살아 보니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말이지요. 어느 것 하나 온전히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있던가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일 뿐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광대한 우주의 시간에 찰나 동안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지요. 소유뿐 아니라, 심지어 내 생명조차도. 대체 그 무엇을 내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청지기 정신이야말로 자본주의에 찌든 교회와 우리 신앙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닐까요.

그 어디보다 교회가 앞장서서 ‘물질의 축복’이니 ‘교회성장’이니 하는 거짓된 논리로 성서의 정신, 예수의 뜻을 무너뜨린 것 아닐까요. 물질과 경제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분명,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그분의 말씀과는 정반대입니다. 떡보다 소중한 떡, 말씀을 나누는 것이, 먹이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주제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제가 ‘가진 것’이 ‘제 소유’가 아니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받았다는 ‘천부의식’이야말로, 우리로 소유에 소유 당하지 않고 죄에 종노릇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 주님의 뜻

가진 것이 받은 것인 줄 알고 주신 분에게 감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다음입니다. 그 감사가 어떤 행위로 나타나고 어떤 삶으로 이어지느냐 하는 것이지요. “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나누어 주더라” 주님의 마음은 연민입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 세계에 대한 안타까움, 자신과 삶을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떡 일곱 개를 ‘받아서’ ‘감사하고’ ‘쪼개는’ 예수의 마음이 아닐까요. 주고자 하는 마음(사랑)이 받고자 하는 마음(욕심)보다 크기에 그 마음을 거룩하다 하고, 그 마음이 거룩하기에 ‘거룩한 영’(성령)이라 하는 게 아닐까요.

그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고”(마7:21) 어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마음 없이 어찌 삶을 누리고 산다할 수 있을까요. 삶이 은혜임을 깨닫고 보면, 헤아려지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성령일터인데, “영을 따라 살지 않고 육을 따라 살면서”(롬8:5) 어찌 구원의 확신이라는 최면이나 주문같은 자기 암시로 스스로 속일 수 있을까요. 받아서 좋던 마음이 주어서 좋다면 그만큼 그 마음도 거룩해진 것이요, 그런 면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그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였습니다. 떡 일곱과 물고기 두어 마리로 남은 것이 일곱 광주리였습니다. 이 두 번의 사람들을 먹이는 사건을 반복한 것은 떡 없음을 논쟁만하는 제자들을 향한 통렬한 가르침입니다. 떡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논쟁하는 것 자체가 두 번의 경험에서 마땅히 깨달았어야 할 것을 제자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떡이 아니라 연민이 없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가진 떡을 보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입니다.

떡을 먹이기 위해 맞은편으로, 광야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을 통해 우리도 구원의 피안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어찌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묻지말고 남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마음 속에 구원의 길이 있음을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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