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 무엇이 우리의 눈을 가리는가?
“나는 그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도 나도 아름다움이나 선을 사실상 모르고 있지만 나는 그보다는 현명하다고.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고의 현자라 불리는 소크라테스의 말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보다는 신에게 복종할 것이며, 나에게 생명과 힘이 있는 동안에는 지혜를 애구(愛求)하고 지혜를 가르치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고 평소의 태도대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위대하고 강력하며 현명한 아테네 시민인 그대, 나의 벗이여, 그대는 최대한의 돈과 명예와 명성을 쌓아올리면서 지혜와 진리와 영혼의 최대의 향상은 거의 돌보지 않고 이러한 일은 전혀 고려하지도 주의하지도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그가 인류의 지혜자이자 스승인 이유는 자신의 무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게 하고, 마음을 다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명예와 명성을 쌓는 일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감격과 신비와 놀라움을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것 역시 우리의 관심이 온통 다른 것에 쏠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이지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 번이라도 그 세계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면, 죽어도 좋을 것을…
- 맹인을 고치시다.
우리의 눈을 열어 온전한 진리를 보게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오, 아테네인 여러분, 사실은 오직 신만이 현명합니다.” 진리는 신의 영역인 것 같습니다. 그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겠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부활을 부족한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겠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넘어서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겐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두어야 할 영역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과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한 우러름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진리를 향한 우러름을 계속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진리를 열어 보이실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주님께서 맹인의 눈을 열어주시듯 말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본문 이전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십니다.(8:15) 표현이 굉장히 강력합니다. ‘경고’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 바리새인의 누룩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일까요? 아시다시피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치열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과 분투는 분명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들의 기준에 따라 타인과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옳고 그름만을 따지며 그 기준에 미달된 것은 가차 없이 정죄합니다. 자신의 의(올바름)에 붙박여 있는 자의 시선은 세상을 정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사랑이 없습니다. 따뜻한 가슴이 없습니다. 타인과 약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을 연민할 줄 모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판단과 정죄가 아니라 사랑과 연민입니다. 사람들은 판단이 아니라 이해받고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율법)로 대체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일까요? 정말 그들이 원하는 것이 정의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일까요? 그들의 깊은 내면에는 오직 자신의 자존감, 의로움, 상대적인 우월감이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의 길을 따른다면, 무엇보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사랑을 좇아야 합니다. 타인과 세상을 향한 이해와 연민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경을 도구로 동성애자, 장애인, 여성, 사회적 약자 등을 차별하는 모습을 봅니다. 비인간, 비신앙이 되고 있습니다.
- 헤롯의 누룩
일반적으로 ‘헤롯’이라하면, 대 헤롯이라 불리던 헤롯왕과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 헤롯 왕가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때에 예수께서 ‘헤롯’이라 부르던 인물은 주로 헤롯왕의 세 아들(아켈라오, 헤롯 안디바, 빌립) 중 헤롯 안디바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배다른 형제인 빌립의 아내이자 자신의 조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판한 세례 요한을 죽였던 인물이고, 예수를 심문했던 인물입니다. 갈릴리 해안에 ‘디베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 바다’로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지요. 탐욕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입니다. 자신의 권력과 부와 명예를 누리고 유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지요. 그래서 예수는 그를 ‘여우’(눅13:32)라고 불렀지요.
헤롯의 누룩은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욕심과 탐욕에 사로잡힌 자가 가난한 이, 연약한 이의 고통과 눈물을 알 수 없지요. 그들에게 타인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지 여부로 평가됩니다. 자기의 이익에 유리하다면 상대가 악하든 선하든 어떤 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반대로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그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저 자신의 권력 추구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의 기준이 있을 뿐이지요. 지금 한국교회는 신앙이 자신의 욕심을 이룰 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입니다. 세상을 섬기고 약자를 돌보기보다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지요.
- 눈과 귀가 있어도
그러니 주님께서 이러한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실 수밖에요. 신앙인으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이로서 우리 역시 이 누룩을 무엇보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누룩을 조심하라 이르셨으나, 떡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만을 걱정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께서 매섭게 야단을 치십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곰곰이 생각해 보면 비판의 강도가 굉장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스러운 말들로 바꾸어 보면, “귓구멍이 막혔냐?” “눈깔은 어디다 두고 다니냐?” “왜 이렇게 멍청하냐?” 등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를 향한 주님의 질타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로지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이웃과 세상을 보지 못하는 저희의 가련한 모습이 초라해 보입니다. 오로지 힘과 권력에 빌붙어 신앙을 이용하는 교회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추해 보입니다.
▣ 벳새다 맹인
- 단계적 치료
오늘 본문은 굉장히 특이합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마가복음은 최초의 복음서입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신중하고 조심스럽고 치밀하게 기록하려고 했을지 짐작이 가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벳새다 맹인을 치유하는 과정에는 정말 특이한 점이 등장합니다. 예수의 기적 이야기 중 두 번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치료한 경우는 이 이야기가 유일합니다.
예수를 위대한 영웅으로, 헬라의 수많은 영웅보다 더 위대한 이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 분명한데, 치료를 두 번에 걸쳐서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한 번에 ‘짠’~하고 고치는 것이 훨씬 더 근사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한 번 했다가 안 되니 다시 한 번 더 시도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치료자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지 의심을 할 수도 있고, 뭔가 부족하다고 여기게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인지 마가복음을 참고해서 쓴 마태와 누가는 이 이야기를 삭제했습니다.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마가가 두 번에 걸친 치료 장면을 넣었다면, 분명 의도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지요.
- 성숙의 단계
이런 숨겨진 의도를 파악해 보기 위해, 저 역시 의도적으로 이 본문에 앞선 본문(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먼저 소개를 한 것입니다. 앞선 본문에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앞에 배치하고 바로 이어서 맹인이 눈을 뜨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감이 잡히시나요? 맹인이 눈을 뜨는 이야기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이 깨닫게 되는,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요? 맹인은 육체적 불구자가 아니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상징하고 있음을 추측하게 됩니다.
참고로 마가는 왜 이렇게 기적, 그 중에서도 맹인과 못 듣는 사람이 치유되는 사건을 많이 배치하고 있느냐하면, 구약성경 이사야의 말씀(예언)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사35:5~6)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한, 메시아의 날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가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사야가 예언한 구원의 표징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두 번의 치료
무엇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는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의 길이 어떤 길인지, 예수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나같이 스승이 진짜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한탄하실 수밖에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질책하신 것이지요. 눈을 뜨라고, 귀를 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뜨는 치유의 과정이 두 번으로 그려낸 것은 예수에 대한 온전한 인식에 다다르는데 있어서 단계,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어떤 것이든 상당한 수준의 앎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과정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 본문 이후의 본문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는 제자들에게 대중의 평판, 세계는 예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묻고 이어서 제자들의 생각을 묻습니다. 이에 대해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십니다”라고 답하지요. 너무나 멋진 답변이지만, 곧 이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며 엄하게 꾸짖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베드로의 고백은 무엇인가 부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입으로 고백하고 있지만, 그 고백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지요. “무엇이 보이느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라고 대답한 벳새다 맹인의 대답과 유사합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의 고백,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등 성경과 사도들의 고백을 예배 시간마다 반복한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를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9:1)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9:3) 9장에 이르러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결국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의 참된 모습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맹인이 두 번에 걸친 치료에 완전히 시력을 되찾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진정한 성숙, 진정한 앎은 치러야할 모든 것을 치루고, 거쳐야할 과정을 모두 거쳐야 다다를 수 있습니다. 누구도 그 과정을 생략하고 공짜로, 대가없이, 지름길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인간의 성숙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럴 테지요. 하물며 그것이 온전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래야하지 않을까요.
▣ 성숙의 과정
- 마을 밖으로
이러한 과정을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성숙해 가는 과정, 눈을 뜨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는 먼저 맹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비슷한 모습이 7장 33절에도 나타나는데,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시는 장면에서 먼저 그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7:33) 데리고 무리를 벗어납니다. 왜 예수는 그들을 마을과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을까요?
여기서 “마을”이나 “무리”는 사회적인 통념, 세계의 가치관, 시대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의 진정한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것은 그 사회의 가치체계, 통념, 시대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맹인으로 살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무엇보다 먼저 그러한 통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로지 1등만이 살아남는 세계, 온통 타인을 밟고 높은 곳을 향하는 타는 것 같은 욕망의 구조, 체계를 벗어나지 않으면 영원히 그 세계 속에서 고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히 우리의 눈은 떠지지 않을 것입니다. 눈먼 자들의 세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치료가 끝난 후에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7:36)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8:26) 말씀에 비쳐보면 그들이 또다시 세계의 통념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경계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에게 던진 주님의 질문은 바로 세상의 통념이 무엇이냐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계의 통념, 가치관은 무엇이냐 물은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체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눈을 뜰 수 없는 것입니다.
- 눈에 침을 뱉으시며
참 난감한 구절입니다. 왜 하필 더럽게 침을 뱉으셨을까요. 저는 이것이 꾸짖음을 나타내는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주님의 꾸짖음은 엄중합니다. 통렬하고 아픕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 같습니다. 꾸짖음이 치료의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선의 황금시대)
꾸짖음 없이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요?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꾸짖음은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오만과 자만, 가려진 눈을 인식하지 못하면,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면 치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상담에서도 자기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치유의 첫걸음입니다. 자신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을 통해서 치료가 시작됩니다. 진정한 성숙은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한 법이지요. 예수의 이 꾸짖음은 바로 ‘자기부정’에 대한 요구입니다. 무지한 자신을 인식하라는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유사합니다.
- 물음
“무엇이 보이느냐?” 맹인에게 던진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에게 던진 물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라는 맹인의 대답과 “주는 그리스도십니다.”라는 제자 베드로의 대답은 같은 것입니다. 맹인이 눈을 떠서 보기는 보지만 온전히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베드로의 대답도 얼핏 완전해 보이지만 입술의 고백일 뿐, 아직 주님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눈을 떴는지, 진짜 진리를 보고 있는지가 가늠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이야말로 결정적 질문이 아닐까요? “무엇을 보고 계시는지요?” “무엇이 보이는지요?” 다른 말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네가 어디 있느냐?” 묻던 하나님의 질문과 같은 것이지요. 그 질문에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 두 번째 치유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비로소 맹인은 온전한 시선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눈을 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진실로 사랑하는 이의 모습, 숭고하리만큼 아름다운 자연,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보고 싶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 자녀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때문 아닐까요.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참 소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제자들의 감동과 감격, 경외감은 어떠했을까요?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얼마나 황홀하고 감격했을까요. 그저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바랐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무엇으로 형언할 수 없는 고귀함과 아름다움, 숭고함을 가진 모습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요, 메시아로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그런 모습을 본다는 뜻입니다. 부활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신,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인지를 인식한다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그 놀랍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지닌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하고 고귀한 존재를 추한 것으로 채우지 마십시오. 마을의 논리, 무리의 생각, 이 일그러진 세계의 추한 것들로 그 숭고함을 훼손하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십시오.
▣ 나가는 말
- 온전함을 향한 격렬한 저항이여
마가는 예수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소로 “높은 산”을 설정합니다. 마가복음의 정점입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변형된 예수의 참된 모습을 “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듣습니다.” 마을에서 벗어나, 무리에서 떠나 산 위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에서 진정한 예수를 보고 듣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그들은 완전한 예수에 대한 인식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온전함에 다다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경고하시고”(8:30) “항변하매”(8:32) “꾸짖어”(8:33)의 원문은 다 같은 ‘꾸짖다’라는 의미입니다. 30절에서 먼저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그러자 32절에서 베드로가 오히려 예수를 꾸짖지요. 그러자 다시 33절에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또 꾸짖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며 따르던 제자들조차 얼마나 예수를 오해하고 있는지, 자기 입맛에 맞는 메시아로 만들려 했는지, 온전한 예수를 이해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쳤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내용은 바로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와 “영광스러운 왕 중 왕”으로서의 메시아 사이의 충돌입니다. 주님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성공의 길, 높아짐의 길이라 우깁니다. 그리로 인도하라 강요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그러나 주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며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남기지 않습니다. 성공을 약속하는, 부와 명예를 약속하는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를 지는 길임을 분명히 합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감히 입 밖으로 내기 주저되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낮아지는 길을 가야 합니다. 섬김의 길을 가야 합니다. 나를 태워 세상을 밝히는 길을 가야합니다. 어찌 가시렵니까.… 감히 함께 가자고 말씀을 드립니다.
비틀거리고 갈지자 길을 걷지만, 비록 넘어지고 쓰러지겠지만 그렇게 조금씩 성숙해 가는 길을 함께 가시길 소원합니다. 그것이 오늘 진정으로 부활절을 맞는 우리의 태도요, 기도이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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