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으로부터의 해방
눅 8:26-39, 성령강림절후 제5주, 6월23일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여러분은 혹시 귀신들린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엑소시스트>라는 영화가 그것을 주제로 합니다. 성당의 사제가 소녀를 괴롭히고 있는 귀신을 내쫓기 위해서 애를 쓰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소녀에게서 쫓겨난 귀신은 사제에게 들어갔고, 결국 사제가 자살하는 것으로 모든 소동이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교회에서도 이런 축귀 사건이 종종 있었습니다. 특히 기도원 같은 곳에서 열리는 특별 집회 때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집회를 인도하는 분이 귀신 들린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고 크게 외칩니다.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여러분이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귀신 들린다는 게 무엇일까요? 그게 실제로는 보통 우리가 미쳤다고 하는 정신병일까요?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비슷합니다. 이 현상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귀신 들린 사람은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성적인 판단도 안 되고, 판단했다고 해도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둘째, 자해입니다. 혼자 중얼거리거나 헛소리를 지르고, 옷을 벗고, 몸에 상처를 내고, 발작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귀신 들렸다거나 미쳤다고 말합니다.
의학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현상은 분명히 정신병입니다. 관절염에 걸린 사람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듯이 정신병에 걸린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기도나 안수, 또는 안찰로 고친다고 하다가 증상이 더 심해지거나 더 나쁜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귀신 들렸다는 성서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성서는 인간과 세계를 의학보다 더 심층적으로 봅니다. 귀신 들렸다는 말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훨씬 근원적인 힘이 작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제압할 수 없는 존재론적 능력이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근거 있는 이야기입니다. 의학이 정신병 자체를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정신병만이 아니라 질병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는 첨단 의학의 세상에서 삽니다. 그래도 여전히 아픈 사람은 계속됩니다. 내와 외과 할 거 없이 인간은 병에 계속적으로 시달립니다. 의학이 하나의 질병을 극복하면 또 다른 질병이 나옵니다. 그런 능력을 성서는 귀신이나 악령이라고 말합니다.
군대귀신
오늘 설교 본문에 귀신들린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마치 엑소시스트, 즉 퇴마사처럼 활동하십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 거라사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입니다. 그곳에서 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의 행색에 대해서 본문은 27b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9b절에 따르면 사람이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사람을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 두었다고 합니다. 미친 사람은 그럴 때마다 사슬을 끊어내고 광야로 돌아다녔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예수님은 그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군대’라고 대답했습니다. 각주에 보면 군대는 여단 급 규모의 로마 군대를 일컫는 ‘레기온’의 번역입니다. 본문의 대화를 보면 무당들의 신들림 현상과 비슷합니다. 무당들은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내서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하게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지금 우리 눈에 유치하게 보이지만 인간의 영혼이 아주 심층적으로 움직인다는 증거입니다. 현대과학에서도 인간의 심층심리학이나 무의식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범죄 조사에서도 최면 기술을 사용해서 단서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거라사 지역에서 14 사단에 속한 사람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로마 군대가 주둔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미친 사람, 또는 귀신 들린 사람은 어렸을 때 로마 군대가 저지른 악행을 보고 정신이 이상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레기온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이라는 뜻의 질병을 가리킵니다. 어떤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잊히지 않고 그 사람의 무의식에 남아서 생각과 행동을 파괴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월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 참가했던 미군들 중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질병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전쟁터에서는 전우가 옆에서 죽어가는 걸 봐야하고, 자기도 직접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육이오 한국전쟁은 민족적인 차원에서 트라우마입니다. 남북 모두 제정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제압당한 더러운 귀신은 그곳 돼지 농장에 있던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귀신들이 이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몰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은 어린아이들의 생각에 어울리는 만화처럼 보일 겁니다. 귀신이 누구에게서 나와서 다른 누구에게로 들어간다는 식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는 맞지 않습니다. 저도 그걸 사실적인 것으로 믿지 않습니다.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의 행색이 얼마나 거칠었는지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쇠사슬을 끊어낼 정도로 힘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부르짖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시 언덕에서 방목되던 돼지들이 미친 사람의 거친 행동에 놀라서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가다가 낭떠러지에서 호수에 빠진 것인지 모릅니다. 사실 호수에 빠졌다고 해도 돼지는 수영을 잘 하기 때문에 익사하지는 않습니다. 성서기자는 이런 방식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메시지를 전하려고 합니다. 돼지는 이방인들의 먹을거리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습니다. 부정한 가축인 돼지가 몰사했다는 사실에서 유대인들은 어떤 쾌감을 느꼈을 겁니다.
한바탕 돼지 소동이 일어난 후에 이제 귀신 들렸던 이 사람은 옷을 단정히 입고 정신이 온전해 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모든 복잡한 일들이 해결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악령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귀신은 부정한 가축인 돼지와 함께 몰사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악령을 굴복시키는 승리자라는 사실에 감격했을 겁니다. 이제 이 이야기는 일단락된 것으로 봐도 됩니다.
동네 사람들
그러나 예상외로 이야기가 더 계속됩니다.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해야했습니다. 그 동네의 골칫거리를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었으니까요. 미쳤던 사람의 가족들이 빨리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해하고, 식사라도 대접해야만 했습니다. 이야기의 진행이 독자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갑니다. 가족들은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동네사람들은 기뻐하거나 감사하는 게 아니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35절과 37절에서 그 말이 반복됩니다. 그들은 왜 두려워했을까요? 하나님의 존엄을 경험했기 때문일까요? 그랬다면 오죽이나 좋았겠습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는 구절에서(37b)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빠서 그만 가보아야겠다고 해도 사람들이 말려야 합니다. 제발 우리 동네에 들어와서 좀 쉬시고, 좋은 말씀도 전해달라고 했어야만 합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말한 것일까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불편한 존재였다는 게 대답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것입니다. 그들에게 미친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머물러 있는 게 좋습니다. 그들이 가끔 불쌍하게 여기고, 때로는 쇠사슬로 묶어 놓고, 자신들의 동정심을 만끽할 수 있는 대상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 미친 사람이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자신들이 미친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어지는 건 바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기존 질서가 허물어지는 걸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유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다 상식적이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경우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거부된 경우는 대개 이와 비슷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보십시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율법에 살고 율법에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율법을 상대화했습니다.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근거가 예수님에 의해서 허물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옹호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수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요즘에도 일상으로 일어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더 근본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만이 아니라 나름으로 정신 말짱하게 산다고 생각했던 그 거라사 주민들도 역시 귀신 들린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스스로 귀신 들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 사람보다 자신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그 주민들의 상황이 더 심각한 것은 아닐까요? 귀신 들렸던 사람은 정신을 차린 뒤에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지만 거라사 주민들은 정색하고 예수님에게 자기들 동네를 떠나라고 요구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쪽인가요? 실제로 미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겉으로는 건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미친 사람보다 더 미친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광기는 단순히 그 시대와 반목하는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대단히 잘 어울리는 방식으로도 나타납니다. 미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서로 겹쳐 있습니다. 저는 설교 앞부분에서 미친 현상을 두 가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자기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생명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이성적으로 반듯하게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십시오. 몇 주 전 수요 공부시간에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식에게 두 가지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자식으로 인해서 기쁘기도 하지만, 자식들이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미쳤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여러 차원에서 폭력적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는 생명 파괴의 폭력들이 곳곳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무식한 방식으로, 다른 한편으로 세련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폭력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연민과 조롱의 대상에 불과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바른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라사 주민 중에서 이 한 사람만이 바른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한 사람일까요?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는 개인과 사회를 파괴하는 악령에 더 이상 굴복당하지 않습니다. 비록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제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미쳤다가 다시 정신 차린 이 사람은 자기 고향인 거라사 동네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나서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39a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온갖 종류의 귀신이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생명을 파괴하는 악령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사실을 주변에 전해야 합니다. 이 말은 직접 노방전도에 나서라거나 선교사가 되라거나 여기저기 간증하러 다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도 부분적으로 필요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개인과 사회의 생명을 파괴하는 악령과 싸우라는 뜻입니다. 그럴만한 지혜와 용기가 없다고요? 팍팍한 현실에 주눅 들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까요? 그런 태도가 악령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악령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사회적 신분과 상관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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