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대하는 태도
마태복음 13:24-30, 성령강림절후 5째 주일, 2011년 7월17일
오늘의 제3독서가 포함된 마태복음 13장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몇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씨가 떨어진 네 가지 밭, 겨자씨, 누룩, 가라지, 밭에 감춰진 보화, 좋은 진주, 그물 등입니다. 비유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천국을 세상의 것들에 빗대서 설명한 것입니다. 천국은 절대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천국을 가리켜 좋은 씨를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씨를 뿌리고 모두 잘 때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합니다. 가라지는 일종의 잡초입니다. 그 밭에는 이제 곡식만이 아니라 가라지도 같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종들이 이 상황을 주인에게 보고했습니다. 주인은 원수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즉시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에서 남의 밭에 가라지를 덧뿌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이지는 않았겠지요. 이 이야기는 비유이기 때문에 실제 상황과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종은 가라지를 뽑아내는 게 어떻겠냐고 주인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수 있으니까 가라지를 내버려두라고 대답했습니다. 가라지가 가득한 밭을 상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보면 밭주인은 게으른 농부처럼 보일 겁니다. 실제로 가라지가 많으면 곡식은 건강하게 자라기 힘들고 결실을 맺기도 힘듭니다. 주인은 곡식이 다치는 걸 염려했지만 잘만 하면 가라지만 뽑아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원당 농가에 가서 호미로 잡초를 뽑습니다. 잡초 뽑기에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부분적으로 잔디까지 뽑히거나 다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잘만 하면 괜찮습니다. 잔디가 부분적으로 다쳐도 잡초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이 가라지의 비유는 도대체 무얼 말하려는 것일까요?
우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들 안에 가라지와 같은 이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곡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허물기도 합니다. 신앙의 형태가 다르기도 하고, 교회 공동체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을 교회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들이 많았습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교회가 시끄럽기도 하고 자칫 신앙이 오염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뽑아내듯이 문제가 있는 이들을 퇴출시키는 게 좋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분파주의입니다. 가라지 비유는 바로 이 분파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한국교회의 특징이 바로 분파주의입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150개 이상의 교파로 갈라진 상태입니다. OECD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의 자살율이 가장 높듯이 개신교 교파 숫자도 가장 많습니다. OECD만이 아니라 전(全)세계에서 가장 많습니다. 다른 나라 교회는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는 갈라지는 길만 찾아갑니다. 2013년 부산에서 열릴 WCC 총회를 반대하는 교단들도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WCC가 좌파적이고, 혼합주의적이고, 종교 다원적이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세계교회의 차원에서 보면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들입니다.
분파주의가 잘못이라면 이단들과도 무조건 함께 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신앙은 거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싸워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내용은 모두 이런 싸움의 결과입니다. 이런 싸움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거나 로마 신화의 한 종파로 떨어졌을 겁니다. 복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할 때는 싸우고, 떨어져 나와야 할 때는 떨어져 나오는 것이 진리를 따르는 이들의 바른 태도입니다. 따라서 분파라는 말이나 현상만 놓고 옳다 그르다 하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입장에 있든지 분파적인 태도는 일단 복음의 열정과 순수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가라지와 같은 신앙과는 관계하지 않겠다는 뜻이니까요.
악의 현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를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늘 만납니다. 이 세상에는 가라지가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하고 싶은 악입니다. 폭력이고 교만이고 야만이고 독선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온전히 따르고 싶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을 볼 때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습니다. 유대의 에세네파는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았습니다. 일종의 수도원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낭만을 꿈꾸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가라지와 함께 살고 싶지 않다는 꿈입니다.
그러나 가라지가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범죄가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악은 마치 식욕과 성욕처럼 보편적인 힘입니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폭력성이 빈부의 차이나, 남녀의 차이나, 지식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파괴하고,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적당하게 핑계를 대고 삽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가인을 보십시오. 아담은 왜 선악과를 먹었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이브에게 책임을 미룹니다. 그의 말은 결국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브는 뱀에게 책임을 미룹니다. 가인은 시기심으로 동생을 죽인 뒤에 동생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자기는 동생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똑같은 일들이 역사에서 반복됩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쟁을 하듯이 사회의 악을 제거하겠다는 의지의 결단이겠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일시적인 효과로 끝납니다. 역설적으로 범죄와 전쟁을 벌이는 국가가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흔합니다. 1980년대 초에 전두환 정권이 행한 삼청교육대나, 2003년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공격한 전쟁 같은 것들입니다. 악이 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가라지가 곡식과 자라는 밭과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사회나 국가의 차원만이 아니라 인간 개인의 차원에서도 가라지는 없앨 수가 없습니다.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늘 곡식만 맺으시는지, 가라지도 맺는지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만이 아니라 악령의 열매도 맺을 겁니다. 그런 것 때문에 불안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그런 경향의 신앙을 가리켜 청교도주의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에만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요즘처럼 뻔뻔한 시절에 자기의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생각하는 삶은 귀중합니다. 문제는 자책에 시달리느라 성령의 열매까지 훼손된다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곡식까지 뽑는 것과 비슷합니다.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 목사는 설교할 때마다 우는 소리를 냅니다. 죄를 회개하라고 청중들을 닦달합니다. 그런 설교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일종의 자기를 학대하는 매조키즘 상태에 빠집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을 학대함으로 만족하는 새디즘에 빠지기도 합니다. 성 소수자나 양심적 군 거부자와 좌파 향한 한국교회의 공격은 새디즘에 가깝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두 가지 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사도매토키즘’ 현상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저는 악을 사회나 국가, 그리고 개인에게서 없앨 수 없으니 악과 타협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오늘 비유에서 가라지를 가만 두라고 한 주인의 말처럼 악과 더불어서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일단 중요합니다. 악과 타협하는 것과 직시하는 것은 악에 대한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타협은 악에게 굴복하는 것이라면 직시는 악의 준동을 예의 주시하면서 나가서 끊임없이 대항하는 것입니다. 후자의 태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이 복음화가 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얼마나 나이브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도 여전히 파렴치한 일들이 그치지 않을 겁니다. 악의 준동을 예의 주시한다는 말은 종교의 껍질을 쓰고 있는, 국가의 껍질을 쓰고 있는, 지성의 껍질을 쓰고 있는 폭력과 거짓을 뚫어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폭력과 거짓이 교묘하게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여기 최첨단 시설을 갖춘 병원이 있다고 합시다. 병원을 운영하는 분은 투자한 경비를 빼야 합니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과잉 진료를 합니다. 조금 경과를 두고 봐야 하는 경우에도 비싼 검사를 받게 합니다. 가난한 환자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병원을 운영하는 이 사람은 교회에 잘 다니고,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추수 때
이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자라는 밭과 같습니다. 밭의 주인은 가라지를 제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악을 제거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 하나님께는 그럴 능력이 없는 건 아닐까요? 오늘 이 세상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창조의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이 세상을 말끔하게 정리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산업재해를 당해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 장애인들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외국인 노동자들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 학력의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왜 이 세상을 이렇게 내버려두시는 걸까요? 왜 가라지를 뽑아내지 않으시는 걸까요?
오늘 말씀에 따르면 그럴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추수 때입니다. 30절 말씀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추수 때는 곧 예수님이 심판주로 오시는 종말입니다. 종말에는 생명이 지금처럼 숨어 있는 게 아니라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은 가라지와 곡식을 구분하기 힘들지만 그때가 되면 확연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가라지는 불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단으로 묶이게 되고, 곡식은 곳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여러분 개인에게 남아 있는 가라지와 같은 성품들도 제거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곧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그런 기다림과 희망이 있기에 가라지가 극성을 부리는 이 현실을 버텨낼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 기다림과 희망은 단순히 먼 미래에 하나님이 알아서 해결해주시겠지 하고 생각하는 미래주의가 아닙니다. 종말에 이루실 그 나라가 이미 여기에 온 것처럼 살겠다는 신앙고백이고 결단입니다. 이런 기다림과 희망만이 그리스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웬만해서는 가라지를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라지를 아무리 제거해도 여전히 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영적 실존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념하고 삽니다. 그런 체념이 반복되면서 성서의 가르침보다는 세상의 가르침을 훨씬 실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가라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허상입니다. 종말에 완전히 굴복당할 패잔병들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가라지를 방관하지도 마십시오. 그것들은 그럴수록 더 기세 등등합니다. 하나님의 승리에 기대서 힘닿는 데까지 가라지와 싸우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싸움입니다. 선한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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