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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2004.11.21.                          
앎의 영적인 차원
요 6:41-51

유대인들의 앎
요한복음의 특징은 하나의 주제를 매우 길 변증의 방식으로 해명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생명의 빵’이라는 주제를 상당히 길게 다루고 있는 6:22-59의 한 부분입니다. 좀더 확장해서 본다면 6장 1절 이하의 ‘오병이어’ 사건도 역시 이 주제에 해당합니다. 만약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처음 이 본문을 읽는다면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라든지 성전을 청결하게 한 사건 같은 것들은 그들에게도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거나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거나 이 빵은 곧 예수님의 살이라는 표현은 좀 황당하게 들릴 게 분명합니다.
요즘 사람들만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42절). 이들의 마음 상태를 찬찬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공연히 트집을 잡는 게 결코 아닙니다. 자기들의 동네에서 평범하게 살던 한 청년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나를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라고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으니 그들이 그 말을 진지하게 생각할 까닭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잣대로 그들을 형편없는 사람들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표현되어 있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용어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것은 접어놓는다고 하더라도 요셉은 자기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목수였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제사장의 아들도 아니고 양반 가문도 아닌 일개 노동자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조금 더 발휘한다면, 그들은 예수의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을 보면 소년 예수는 이스라엘의 축제에 참석해서 그 당시 풍습대로 처녀들과 어울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성혼의 나이가 된 예수에게 여기저기에 중매도 들어오고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이 예수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발언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이상한 현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 세상의 이치에 따라서 판단한 것뿐입니다.
이에 대한 또 하나의 근거는 예수의 발언이 갖고 있는 낯설음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는 발언은 아마 유대인들에게 광야 시절의 만나를 회상시켰을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목숨을 지탱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그 만나가 곧 예수 자신이라는 이 발언은 좀 해괴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빵이 될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에게 빵은 빵이고 사람은 사람일 뿐이지 이 사물이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앎의 이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가 나름의 근거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런 근거는 일종의 상식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이기는 하지만 이런 태도가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앎은 늘 표면적인 것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규정한 것은 예수에 대한 표면적인 정보에 묶여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의 내면이 보였겠습니까? 예수님의 영성이 느껴졌겠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과 영적인 친교를 나누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예수를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표면적인 앎에 근거해서 예수의 발언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역시 전적으로 이런 표면적인 앎에 따라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정보사회라는 단어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소유한 정보가 많을수록 그는 유능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지식은 힘이다’라고 말한 베이컨의 경구가 이에 해당됩니다. 아마 그는 인간이 계몽됨으로써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지식을 통해서 자기를 확대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힘으로 사용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상식적이고 교양이 풍부합니다. 이 세상을 그럴듯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치를 많이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정작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세계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런 표면적인 앎 자체의 한계에 있기도 하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본질에 있기도 합니다. 우선 표면적인 앎의 한계가 어떻게 생명의 본질에 대한 앎을 방해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알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마당에 무얼 더 노력한다는 말입니까? 이게 선입관인지, 자기 주관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앎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그 지식을 소유하고 강화하고 상품화할 생각만 하지 그 내면으로 들어갈 생각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우리에게 만연해 있습니다. 기성세대에 속한 어른들은 자기의 경험과 지식이 너무 확실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이외의 생각을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세대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자신들의 고명딸이 직업도 변변치 않은 가난한 시인과 결혼하려고 할 때 대개의 부모들은 뜯어말립니다. 그런 남자와 결혼하면 고생바가지라는 게 그들의 경험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제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사립학교법 개정이라든지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가 우리 사회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개정을 극구 반대하는 분들의 심리상태를 제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립학교 이사회의 3분의 1을 ‘학운위’에서 추천하게 되면 학교가 망하게 된다는, 더 정확하게는 설립자가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은 대화가 아니라 힘으로 응징해야만 한다는 경험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들은 국가보안법을 철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표면적인 지식, 그런 정보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진리에 도달하기 힘든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그 진리 자체가 우리의 상식과 정보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은 그들의 상식과 정보에 묶여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발생한 그런 영적인 세계는 인간의 역사적 경험으로 재단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중심부가 아닌 나사렛 출신이라는 기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성육신을 통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심판한 메시아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본질을 뚫어볼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이런 부분은 종교적이니까 무조건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돌리면 이 세상의 본질도 역시 우리의 표면적인 지식이 포착할 수 없는 비밀과 신비의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우연이라고 부르지만 단지 우리가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연일 뿐이지 그런 신비한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훨씬 근원적인 힘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기 책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겉모양과 쓰임새를 보고 이것이 책상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으로 이 책상을 모두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이 책상의 소재가 되는 나무는 어쩌면 말레시아의 어떤 숲에서 자란 것일지 모릅니다. 그 숲에서 자라는 나무는 태양의 에너지를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이 책상을 만든 목수는 무슨 이유로 이것을 만들었을까요? 제 말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사물과 사건은 우리가 도저히 포착하기 힘든 어떤 근원적인 힘과 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안다고 자랑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안다는 것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의 한정된 앎만을 기준으로 이 세계를 규정하고 재단하고, 더 나아가서 단죄합니다. 예수님을 표면적으로만 알면서 그의 말씀을 못마땅해 한 유대인들의 일은 우리에게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
예수님은 불평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내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릴 것이다. 예언서에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43-45).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자기의 발언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셨을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참된 앎의 문제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십니다. ‘아버지의 가르침’만이 우리를 참된 앎으로 끌어간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려면 우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말들은 하늘의 차원에서 풀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아주 쉽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면 기도를 많이 하고 영성이 깊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 앞에서 평신도들은 일단 기가 죽습니다. 자신들은 목사들처럼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하고 영적인 감수성도 별로 예민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만약 그것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신비화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이라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요? 어떻게 우리가 궁극적인 앎으로 들어가는 길일까요?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선승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유명한 선승이 한분 계셨는데, 그분이 대표적으로 하는 말은 “차나 한 잔 드시게나.”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고승에게 한 수 배우기 위해서 며칠의 여행 끝에 이 고승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스승님, 인생의 비밀에 대해서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 이 간절한 청을 들은 이 고승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이 순례객은 여러 번에 걸쳐 한 말씀 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입을 연 고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차나 한잔 들고 가시오.” 선문답은 그 선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에게서 가능한 대화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재즈 연주자들의 즉흥연주가 그런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선, 음악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 사이에만 소통되는 대화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가르침으로만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선은 선로만, 재즈는 재즈로만 이해가 가능하듯이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구체적으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기독교는 사이비 소종파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은밀한 방식으로 이런 가르침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전체를 영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자세를 갖고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이 수시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흡사 시인들에게 영감이 갑자기 떠오르듯이 하나님의 세계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우리에게 그런 영적인 깊이에서 성령이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늘 깨어있으라고 가르쳤으며, 기도를 쉬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피상적인 앎에 머무르지 않고 궁극적인 앎이라 할 영적인 세계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그런 가르침으로 이 세상을 해석하며, 더 나아가 그런 방식으로 결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6: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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