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2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DNGmyMwDrSU?si=zXfSxkWuybah8rnI
I
오늘 창세기 말씀에 나타나는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소유로써 이집트 출신의 여종입니다. 사라가 나이가 많아 아기를 가지지 못하자,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통해 집안의 대를 이어가자고 설득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얼마 후에 몸종 하갈이 몸 속에 아기를 가지게 되자 사라의 마음에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몸종인 하갈의 행동이 임신을 뽐내며 주인인 자신의 말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남편 아브라함에게 따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6장 5절을 보면, ‘종 하갈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라고 강하게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말하기를 ‘하갈은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말해 줍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라는 하갈에게 궂은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마음대로 부리며 학대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를 알고서도 어찌할 수가 없어 못본척 한 것 같습니다. 하갈은 사라의 학대를 견딜 수가 없었으며 못본척 하는 아브라함도 미웠기에 임신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가출하여 자신의 고향 이집트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갈은 이집트로 도망가는 길목, 사막 우물가에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간신히 목숨을 버티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절규하고 있는데, 바로 그 순간 하갈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말합니다. 여주인 사라에게 돌아가서, 그와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라고 말해주면서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이스마엘’이란 뜻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고통을) 들으심’이라는 뜻이니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첫 봉독한 창세기 16장 13절 말씀을 보면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야훼 하나님을 향하여 “엘로이”라고 이름을 만들어 불렀는데 그것은 보살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은 아브라함보다 앞의 앞을 먼저 가셔서 보살피시는 하나님이라면 여기에 반해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자신의 뒤에서 자신을 보살펴주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내가 여기서 뒤에서 나를 보시는 분을 보았다‘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Gewiss habe ich hier gesehen den, der mich hernach angesehen hat.) 나를 뒤에서 보살피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나를 뒤에서 보시는 하나님’ 또는 ‘나의 뒤의 뒤에서 나를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갈은 비록 비천한 종의 신분이었지만 여성신학자적인 성찰과 안목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갈은 뜨거운 사막에서 제대로 서있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만난 엘로이 하나님은 자신의 삶에 일어났던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마음의 풍랑을 보시고 보살펴주신 분이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사라의 학대에 못이겨 가출하여 도망가는 바로 그곳에서 만난 엘로이 하나님이야말로, 자신의 뒤에서, 자신의 뒤의 뒤에서 자신을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에 큰 힘과 용기를 얻고 다시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뉴스를 보기 싫을 정도로 우왕자왕하는 우리 정치현실과 극과 극을 달리는 양극화된 사회여서 어떻게 우리 사회가 제자리를 잡을 것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하기도 어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갈이 만난 하나님, 엘로이 하나님은, 나의 뒤에서 우리사회의 뒤의 뒤에서 모진 일제 치하 속에서 그리고 극심한 가난과 남북전쟁과 군부독제의 역사 가운데서도 돌봐주셨고 보살펴주셨던 그 하나님을 우리도 믿고 의지하며 신앙하고 있기에 새롭게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마치 하박국 예언자가 당시 전쟁과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라고 하나님을 향해 항의하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리라“는 말씀을 들은 것처럼 우리도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생명정의평화의 나라를 믿음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뒤에서, 우리의 뒤의 뒤에서 우리들을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말입니다.
II
바울은 1차, 2차 3차 선교활동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개종보고와 함께 선교보고를 한 후 이곳저곳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던 유대인들이 분노하여 옷을 찢고 고함을 지르며 바울같은 사람은 죽여야 한다고 소동을 벌였습니다. 그 장면을 목도한 로마의 연대장급 군인, 천부장 루시아는 바울이란 사람이 그들에게 돌에 맞아죽을까 걱정이 되어 일단 군대 영내로 데리고 들어가 부하들에게 심문하기 위하여 채찍질하라고 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당신들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나에게 채찍질하여 심문할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바울은 로마로 호송되어 로마의 왕앞에서 심문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율리오라고 하는 로마의 군인 백부장, 중대장급 장교의 감독 아래 죄인 아닌 죄인의 몸으로 다른 일행과 함께 “아드리뭇데노”란 배에 오릅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일단 소아시아 해안 지역 곳곳을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로마로 가는 배가 있으면 그 배를 타려고 계획을 했습니다.
마침 “루기아”란 곳의 “무라”라고 하는 항구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란 배를 갈아타고 가다가 잠시 미항이란 곳에 머물렀습니다. 이때가 9월 중순쯤 되었는데 이전까지는 진잔한 남동풍의 순풍이 불지만 9월 중순부터 다음해 3월 중순까지는 폭풍이 불어올 확률이 많았고 이때 항해하는 배는 위험에 처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10절엔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칠 것”이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그런데 인솔자 백부장을 비롯한 그 누구도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듣고서 로마로 항해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선주는 가능한 한, 빨리 로마에 도착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수십배 혹은 수백배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선장은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이 다치지 않도록 무사히 로마로 인도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지만 선주가 시키는대로 로마에 빨리 도착하면 도착할수록 자신에게도 엄청난 이익이 돌아갈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군 백부장 율리오는 자신이 호송해가는 일행들을 안전하게 로마로 호송해가면 자신의 훌륭한 지도력이 인정되어 승진도 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듣고 항해를 명령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임으로 모두의 생명, 모두의 안전과 모두의 건강 그리고 모두의 구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들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지중해 바다의 일시적인 고요함과 일시적인 잔잔함을 보고서 로마로 향한 바닷길에 행운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얼마 후에 그들에게 닥쳐온 것은 상상도 못할 미친바람 곧 폭풍이 불어와 산더미처럼 크고 높은 파도가 배를 덮쳤고 배안에 사람들은 죽음직전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폭풍이 2주일 동안 계속되어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위기 앞에서 선주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던 배안의 모든 짐들과 고가의 값진 교역품들이 아깝고 아까왔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선 바다에 던질 수밖에 없었고 선장 역시 배에 필요한 몇가지만 빼놓고는 배안에 있는 모든 무거운 장비들을 바다로 던지고 말았습니다. 말이 그렇지 하루도 아니고 2주일동안 폭풍과 풍랑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이제 그들은 이제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바울은 27장 22-23절에서 “바로 어젯밤에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내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셔서 내게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나와 동행하는 여러분들의 생명을 구해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다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앞을 가셔서 우리 앞의 앞에서 우리들을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임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말이 그렇지 2주일 동안 폭풍과 풍랑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음식을 먹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보단 폭풍과 풍랑의 거센 기운에 눌려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그들을 향해 바울은 한번 더 앞의 앞에서 우리들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기에 용기와 희망을 선포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그 누구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용기와 힘을 북돋우어주고 있습니다. 결국 배안에 있던 276명 전원 거센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 한 사람의 생명이 모두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고 한 사람의 운명이 모두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생명의 공동체-운명의 공동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계엄령이라고 하는 엄청난 폭풍우와 거센 풍랑 속에서 흔들거리고 있는 한국호라는 배를 발견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과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의 모든 생명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든 비신앙인이 그들의 신분이나 인종을 따지지 않고 그들 모두를 잘 지켜내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비추어진 그리스도교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살림의 종교요 생명을 부여해 주는 종교요 좌절과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비추어진 그리스도교는 죽음 다음에 오는 영원한 생명은 물론이지만 지금 여기서 누리는 풍성한 생명, 온전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섬기고 봉사하는 종교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불의와 거짓에 맞서 정의와 생명과 평화의 물결이 뒤어 생명을 온전하게 생명을 안전하게 생명의 풍성함을 느끼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평화의 세상이 되게 하는 일이 우리의 사명임을 믿고서 공동의 유익을 위한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 믿습니다.
III
이제 저는 오늘 봉독한 본문 마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신 후 네가지 땅 곧 길가, 흙이 얕은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 이야기를 합니다. 특히 옥토에 떨어진 작은 씨앗처럼 30배 60배 100배 이상의 열매를 맺듯 하나님의 나라도 이렇게 확장되어 나가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 후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자 하였습니다. 배를 타시자마자 예수님은 피곤하여 배 안에서 잠을 주무시고 계셨고 얼마 후 갑작스러운 바람이 휘몰아쳐와서 배가 뒤집힐 정도로 엄청난 풍랑이 들이닥쳤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무섭고 두려워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된 것을 어찌 돌보지 아니 하십니까?”라고 흔들어 깨우고 있었습니다.
이때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우리는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몰고온 바람을 향해 꾸짖으시면서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외치시니 그 순간 바람이 그치고 풍랑이 멎어 바다같은 거대한 호수가 잠을 자듯 잔잔해지고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그런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그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제자들에게 질문하였는데 당시의 제자들과 이 소문을 들은 군중들은 “이분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같은 호수까지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가?”라고 의아해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본문의 내용은 첫째,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이분은 과연 누구인가?“하는 것이요 둘째,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미친 바람과 풍랑과 같은 죽음의 세력 앞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생명을 뒤의 뒤에서 그리고 앞의 앞에서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마가복음은 2000여년전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던 유대나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이요 오늘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딱딱한 껍질뿐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반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성으로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억압을 하였던 미친 바람이요 풍랑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사회는 5%의 예루살렘의 제사장, 바리새파, 율법학자등의 엘리트그룹들이 당시 토지와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시의 사회와 경제는 부익부빈익빈으로 양극화의 사회였는데 경제적으로 휘몰아쳐온 바람과 풍랑으로 당시의 민중들은 동물처럼 살아왔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힘을 길러 전쟁을 통해서라도 세계를 재패하고자 하였고 전쟁을 통해서라도 평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을 통해 체포한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와 노예로 사고 파는 일도 함은 물론 모든 음식의 주인은 로마의 왕 시저로부터 온 음식이기에 시저에게 감사하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불러온 미친 바람으로 호수전체가 거대한 풍랑으로 소용돌이 칠 때, 예수님의 한눈은 풍랑 그 자체를 보았지만 다른 한눈은 로마로부터 불어오는 거대한 반신앙적인 세속적인 바람이었고 그 바람으로 인한 풍랑은 온 유대를 삼키고 있는 풍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앞의 앞에서 거센 풍랑을 몰고온 바람을 향해 꾸짖으시면서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책망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한국사회 앞에 불어온 거대한 바람과 풍랑으로 온 사회가 분열되어 있고 온 사회가 불신과 미움으로 등을 돌리고 있는 한국사회를 향하여 바람과 풍랑을 몰로온 장본인은 물론 미음과 증오심으로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한국사회를 향해 꾸짖으시면서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책망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파도에 둘러싸인 배”는 복음서에서는 “교회공동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과 사회와 민족 온 세상에 전쟁과 기근과 극빈과 난민 자연재앙 등으로 불어오고 있는 미친 바람 풍랑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거슬러 올라가면서 바람과 풍랑을 잠잠하고 고요하게 해봅시다. 그리하여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이웃의 이웃이 되어주는 일, 크리스쳔의 신앙삶이 넘치게 해 봅시다. 우리의 뒤의 뒤에서 그리고 우리의 앞의 앞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무한히 기뻐하시라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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