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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야곱의 하나님 체험




  야곱의 하나님 체험
  창 28:10-22

야곱설화
이스라엘에 여러 족장들 중에서 야곱처럼 극적인 삶을 산 사람도 찾
아보기 힘듭니다. 야곱이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걸 보면 이
스라엘 민족이 이 야곱을 얼마나 중요한 인물로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
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장면은 야곱의 인생을 세 시기로 구분할 때
첫 시기와 둘째 시기의 경계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대충 이렇게 삼등분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집에서 살던 어린 시절, 삼촌 라반과 함께 살던
청년 시절,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자식들을 키우며 살던 아버지 시절. 우
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를 받으면서 형과 아버지로
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하는 짓이 얄미웠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이삭
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권을 가로챔으로써 형 에서의 분노를 산 야곱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납니다.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관계는 많은 작가들이나 예술가, 또는 심리학
자들에게 영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원래 야곱이 태어날 때부터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 뒤로 외향적인 에서와 내향적인
야곱은 끊임없이 경쟁을 벌입니다. 물론 성서에 그러한 이야기가 자세하
게 서술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 유명한 팥죽 사건이나 장자 축복 사
건에서 볼 수 있듯이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해서 에서를 따돌렸다
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에서가 동생을 죽이겠
다고 칼을 들고 나서자 리브가는 야곱을 오빠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피
신을 시키게 됩니다. 만약 야곱이 이렇게 길을 떠나지 않았다면 정말 에
서의 칼에 맞아서 죽었을까요? 그거야 모르죠.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불같은 성격인 에서가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고 근
친살해를 벌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먼 훗날 야곱을 순순히 받아
들이는 걸 보면 에서가 그렇게 난폭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잠시 흥분해서 설치기는 했겠지만 동생을 죽이기까지는 않았을 가능성
이 높습니다. 남을 속이는 사람은 남도 믿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리브
가와 야곱은 에서를 믿지 못하고 결국 야곱이 먼 길을 떠나는 것을 해결
하고자 했습니다.

윤리를 넘어서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성서의
관심은 어떤 사람이 윤리적이고 모범적인가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것
입니다. 어느 누가 창세기를 읽더라도 야곱보다는 에서가 훨씬 인간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방여인과 결혼했다는 실수가 있긴 하지만 야
곱보다 훨씬 순진한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이 야곱을 선
택했다고 증거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선택 기준이 무엇이냐, 하고 묻
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선한 사
람인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어떤 객관적인 기
준을 정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이 만난 사람
들은, 예수님이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은 이런 윤리적 기준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세리나 죄인, 몸파는 여인들에게 접근하셨습니다. 이게 바
래새인들에게는 영 못마땅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인간의 윤리
적 가치를 무시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부도덕
성을 미화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성서는 우리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
라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판
단과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 분석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진지로 믿고 받
아들일 뿐입니다. 흡사 어머니 품안에 있는 아기가 어머니의 모든 판단
을 신뢰하듯이 말입니다.
이런 성서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광신이나 열광주의에 빠져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생각과 판단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입
니다. 우리가 아무리 합리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어느 사이에 그것은 합리
성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볼 때 착하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 그렇지 않
을 때도 많습니다. 또는 우리가 볼 때 비열한 것 같았던 사람이 어느 사
이에 자기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복음
서에 등장하는 상당한 사람들은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학문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별로 인정받을 게 없었지만 어느 계기로 인
해서 그 모든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영적 세계로 들어갔습니
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어떤 사람도 절대화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한 인간의 현재 상태가 아니라 그와 만나는 하나님입니
다. 인간의 불가능성도 하나님의 가능성과 만나게 되는 경우에 질적으로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의 한 경우가 오늘 우
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야곱입니다.

야곱의 꿈
오늘 본문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듯이 고향을 떠나 삼촌 라반이 있
는 하란으로 먼길을 떠나는 야곱이 중간쯤에서 하룻밤을 야영하게 되었
습니다.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던 야곱이 꿈을 꾸었습니다. 땅에서 하늘
까지 닿는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다리에서 오르
락내리락했습니다. 이때 야훼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이렇게 말씀하
셨다고 합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
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게 지금 누워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
손에게 주리라. 네 후손은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서 동서남북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종족이 너와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다가 기어이 이리
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13-15). 이 야훼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야곱에게는
단지 앞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겠다는 내용이 덧붙여졌을
뿐입니다. 꿈의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땅과 후
손이 바로 자신들의 생존 조건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렇게 인
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땅과 후손에 있는 게 아니라 '하
나님 체험'입니다. 야곱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야곱을 찾
아와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또한 꿈이라는 현상에 너무 매달릴 필요
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늘 이런 방식으로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게 아닙
니다. 고대인들이야 그런 꿈을 신적인 매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대인들이야 이미 프로이트 이후로 꿈을 잠재의식의 발현으로 여기기
때문에 꿈을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어떤 방식이냐가
아니라 '하나님 체험'입니다.

고독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저는 지금 종교심
리학을 강의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관점에서
하나님 체험의 인간학적 전제와 그 체험이 드러내는 현상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우선 야곱이 이렇게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 하나의 상황을 살펴볼 필
요가 있습니다. 지금 야곱의 상황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떠남'입니다.
모든 익숙했던 자리로부터 전혀 다른 자리로 떠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주던 어머니의 품으로부터 떠났습니다. 이때 야곱의 나이
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쌍둥이 형 에서가 사냥꾼으
로 활동했다는 것을 보면, 그리고 장가들었다는 사실을 보면 어린 나이
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워낙 집안에서 어머니 치마폭
에 싸여 지내던 인물이니까 어머니 품을 떠난다는 것은 충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란을 향해 길을 가고 있는 이 지점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중간 지역입니다. 아예 하란에 도착해 있는 상태라면 어느 정도 안
정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 야곱은 아주 낯선 중간 지역에 와 있습니
다. 더구나 지금 그는 노숙을 해야만 했습니다. 따뜻한 잠자리로부터 떠
나서 돌을 베개삼아 누웠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별을 보았겠지요. 고향
집의 소리와 냄새는 없고 아주 낯선 광야의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들었겠
지요. 야곱이 생전 처음 경험하는 '고독'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체험의 시작은 고독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골이 말하는 대로 이 세상에서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어떤
절대적인 세계와 직면하려면 이런 절대 고독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
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거의 이런 고독 속에 있었습니다. 바흐가 그랬고
베토벤이 그랬습니다. 단테가 그렇고 세르반테스가 그랬습니다. 작년인
가 돌아가신 우당 선생에게 그런 절대 고독이 없었다면 그의 그림을 가
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책을 쓰는 사람도 역시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만화책을 읽는 어린이도 절대고독 속에 있어야만 그 만화의 세계 속으로
완전하게 들어갑니다. 도를 닦으려는 사람들이 암자에 틀어박히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이런 우리의 일상적 삶도 그럴진대 하물며 하나님 체험
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떠나야 할 대상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이런 고
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당장 산속으로,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하나요? 때에 따라서는 그런 일도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그리고 본질적
으로는 자기가 의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절
대고독이란 다른 말로 절대자유라 할 수 있듯이 모든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게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막강한 힘으로 작용하는 돈의
힘으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에서는 부모로부터 빨리 떠나는 게 필요합니다.
보모와 자식의 사랑이 상대방을 훨씬 성숙하고 자유로운 세계로 만들어
주기보다는 서로에게 부담을 주고 의존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나가면 우
리는 고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딸들이 가능하면 빨리 나로
부터 자유로워졌으면 합니다.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빨
리 독립하는 게 좋습니다. 아무도 자기의 영혼을 완전하게 채워줄 사람
이 없다는 경험이, 그래서 철저하게 외롭다는 경험이 없으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적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아내와 남편으로부터, 친구로부터도 역시 떠나야 할 것
입니다. 스승으로부터도 역시 그렇습니다. 동양에서는 제자들이 어느 정
도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서면 떠나보냈다고 합니다. 끝끝내 잡아두고 투
자한 것만큼 뜯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스승들은 이미 어떤 절대의 세
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
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점점 더 고독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서
로 어울려 다니는 것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에 잠시도 혼자 있지를 못합
니다. 요즘의 문화이기가 이런 현상을 부채질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
과 핸드폰에 젖어있는 젊은이들은 버스 안이나 지하철 안에서 혼자 있게
되는 경우에 문자를 교화하느라고 핸드폰만 바라봅니다. 이런 방식으로
주변 사람들과 늘 연결되어 있어야만 마음이 외롭지 않고 편안하다고 느
끼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조건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위기입니다.

두려움
잠을 깬 야곱은 이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외쳤습니다. "참말
야훼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
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문이로구나."(16,17).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야곱이 어제까지 살았던 어머니와 아
버지가 계신 곳은 자신에게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기 때문에 편안했지만
이제 전혀 다른 곳으로 떨어져 나온 야곱에게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기쁜 마음이 들어야 했을 텐데 오
늘 야곱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 체험이 두
려움의 현상으로 나타날까요?
하나님 체험은 우리에게 낯선 힘에 대한 체험입니다. 우리가 생각하
던 모든 기존의 범주들을 완전히 뛰어넘는 힘을 만난다는 것은 두려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흡사 우물 안에 살던 개구리가 우물 밖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플라톤의 우화를 빌려서 말한다면 동굴 종족
이 동굴밖으로 나왔을 때의 경험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즐겁다고 생각하
던 것들이 전혀 즐겁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면 누가 충격을 받지 않겠습
니까?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던 것이 옳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간에
하나님을 체험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은 그가 갖고 있던 기존의 사유체계
가 허물러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야곱의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우리가 잘 알 수 없고, 그 꿈 자체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
다. 그가  꿈을 통해서 자기가 예상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힘을 경험했으
며, 그 경험이 곧 두려움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려면, 또는 그런 경험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일상에서 이런 두려운 경험을 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우리의 삶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의 반복에만 머
물러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이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그 무엇
으로 생각될 뿐입니다. 철학자들은 무엇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충격
을 받고, 더 나아가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은 존재하고,
그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동양에서는 "이게 뭐꼬?"라는 화두를
붙들곤 했습니다. 그들에게 이 세계는 당연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
기 자신이 이 시간에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이렇게 존재한다는 게 이상
하지 않습니까? 태풍도 신기하고 장마도 신기합니다. 비슷한 현상으로
우리에게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뿐이지 우
주론적 차원에서 이런 지구의 자연현상과 생명현상은 너무나 낯선 사건
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삶에 대해서 낯설어할 줄 모르고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듯이, 기독교인들의 신앙에도 역시 이런 경험들이 부족합니다.
예컨대 자기가 다니던 교회를 늘 자기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기독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
는 이런 가시적 교회를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사실 앞에서
도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노력해서 만들어놓은 조직과 재산과
건물에만 익숙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이
해하지 못한 바리새인들의 신앙적인 자세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죄인
들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으
며, 그래서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
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설정
해놓은 율법 안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많
은 기독교인들은 종말이나 부활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
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기의 현실적 삶과는 별로 긴밀히 연결되지 않
는 일종의 종교적 수사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
서 누가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미래와 궁극적인 생명 문제를 안고 밤
새워 고민하고 생각하고 기도하겠습니까?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 입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신학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은 일단 신학에서 손을 떼
고 편견 없이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 숙고해야한다. 그래
서 가능한 한 놀라움의 경험이 솟아올라서 더 이상 상실된 상태에 있지
않고 계속 강건해져야 한다. 얼마동안 놀라움을 경험했고 지금은 아무
놀라움도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 놀라움의 경험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욱 곤란하다. 이러한 놀라움의 경험이 신학자에게 전적으로 낯
선 것으로 남아 있으면 그는 신학 이외의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75,76). 바르트는 정확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학문인 신학은 전혀 새로운 것, 전적인 타자 앞에 설 때마다 두려움을 갖
게 됩니다. 굳이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생쥐가 코끼리를 처음 보았을 때
갖게 되는 생각보다 훨씬 심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생쥐는 아무리 코끼
리를 모두 보고 싶어도 그 앞에서는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또는 괴테 문학을 논하는 심포지엄에 괴테 자신이 나타났을
때 그곳에 모인 학자들이 갖게 되는 심정도 그와 같습니다. 말문을 닫아
야 하겠지요.

고독과 두려움의 변증법
지금까지 저는 하나님 체험을 고독과 두려움이라는 두 관점에서 말
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체험은 사람이 절대 고독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하나이며, 거기서 발생하는 하나님 체험은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온
다는 것이 다른 하나였습니다. 이 두 관점은 역으로도 진행될 수 있습니
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고독하게 살아간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구원을 맛보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런 하나님 체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고독
안에 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자꾸만 이렇게 저렇게 사람끼리
몰려다니기만 하는 것은 결국 절대적인 자기의 정신적 세계가 빈곤하다
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현대인의 정신적 악순환입니다. 하나님
체험이 미미하다는 사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
는 고독의 세계를 거부한다는 사실, 또 다시 이런 사실이 하나님 체험을
가로막는 사태로 발전합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는 구원이 없는 시대라
고, 또는 그런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파심으로 한 마디 보충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해서 세상과 상관없이 자기 혼자 고고하게 유유자적하게 살아간다는 말
씀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도 광야의 고독 속에서 영적인 체험을
한 다음에 다시 저자거리로 돌아오신 것처럼, 그리고 이 저자거리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홀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지
속했던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 체험은 세상을 떠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는 세상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것입니다. 다만 세상에 들어와서 세상을
위해서 살되 세상에 의존하지 않는 영적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야곱도 오늘 사건 이후에 여전히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
다. 다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을, 그 두려움을 간직하고 말입
니다.
<9월21일>



창세기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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