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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mms://wm-001.cafe24.com/dbia/080106.mp3야훼의 영광과 빛
2008.1.6. 이사야 60:1-7

바벨론 해방 이후
지난 대림절 이후로 우리는 이사야서를 몇 번에 걸쳐서 설교의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앞으로도 몇 번 더 준비되어 있는데, 이건 교회력에 따른 선택입니다. 대림절부터 이사야서가 자주 설교의 본문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대림절과 성탄절, 그리고 오늘 주현절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바로 이사야 시대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 계시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사야 시대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무엇일까요? 이를 알려면 우선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텍스트는 역사적 배경이 있듯이 성경 텍스트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패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성전에서 사용되던 집기는 모두 강탈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었습니다. 대략 50년 후에(539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정복당한 뒤에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몇 번에 걸쳐서 포로들이 귀환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해서 봉헌하고(515년) 나라의 제도를 새로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복원하는 등, 지난날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나라 일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은 바벨론 식민지 시대보다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같은 예언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만 하면 이스라엘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크게 낙심했을는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들은 아마 세상에서 자신들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나님이 이제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이 누굽니까? 그는 만국의 아버지이며, 복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역사에는 수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민족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민족입니다. 예언자들도 그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실제의 역사는 어떻습니까? 고난의 행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하던 그 시대, 지금부터 2천5백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이사야는 오늘 본문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야훼의 영광
이사야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사 60:1a) 그 당시에 이사야의 이런 말씀은 농담으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릅니다. 지금 모두가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빛을 비추라니, 정신이 약간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흡사 매일 폐지를 주워 팔거나 노숙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빛을 비추어라!” 하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빛을 비출 힘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자신들의 꼬락서니에 좌절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볼까 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빛을 비추라니, 이사야는 지금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요?
이사야는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입니다. 아니 그 당시에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은 이사야뿐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현실의 상황에 매몰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사람만을 본다면 빛을 말할 수 없습니다. 좌절하고 낙심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서는 아무런 빛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전혀 다른 현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야훼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비춘다는 현실이(사 60:1) 바로 그것입니다. 일어나 빛을 비추라는 이사야의 선포는 야훼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야훼의 영광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야훼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세요. 영광, 빛, 반사, 이런 성서의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야훼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광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일컫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면 그분의 영광도 역시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단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때도 있긴 합니다. 제 가족이 살고 있는 하양의 청구아파트에는 가끔 현수막이 걸립니다. 몇 동 몇 호에 사는 아무개의 아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거나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는 내용이 적힌 현수막이 그것입니다. 그런 걸 우리는 가문의 영광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강사로 초청을 받은 자리에서 “이 자리에 선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럴 때의 영광은 성서가 말하는 영광은 아닙니다. 우리의 자랑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히 참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생명의 능력이신 하나님에게만 영광이라는 단어가 해당됩니다. 이사야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민중들을 향해서 빛을 발하라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위의 설명으로 야훼의 영광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따라잡기는 힘들 겁니다. 이럴 때는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서 주로 풍경을 그린 영국의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입니다. 그의 그림에는 빛이 살아있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은 온통 빛으로 채워집니다. 그래서 빛의 연금술사라는 이름까지 얻었습니다. 윌리엄 터너의 눈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빛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빛이 터너에게만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일은 다른 데서도 일어납니다. 개들은 우리가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까지 들을 수 있고, 박쥐는 우리가 전혀 감지 못하는 전파를 감지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야훼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야훼의 빛을 그림처럼 묘사합니다. 2절 말씀은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네 위에서만은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 이런 그림 같은 묘사도 이사야의 영적인 깊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거짓말처럼 들릴 겁니다. 윌리엄 터너의 작품 중에 <Snowstorm>(1842,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 London)이 있습니다. 폭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다에 홀로 떠있는 배를 그린 그림인데, 그냥 보면 유치원생이 장난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의 눈에는 삶의 진실과 심연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사야의 눈에는 지금 온 세상이 흑암 중에 이스라엘만 빛을 받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야훼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영광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광은 모세가 호렙 산에서 경험한 바로 그 하나님의 임재이며, 홍해를 가르신 바로 그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비록 현재 이스라엘이 초라한 모습이지만 바로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비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광으로부터 나오는 빛이야말로 참된 빛입니다. 그 빛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아침 이슬처럼 곧 사라지지만 야훼의 영광만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반사의 책임
야훼의 영광으로부터 비치는 빛을 받은 이스라엘은 더 이상 절망과 낙심 가운데 머물지 말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중을 향해서 빛을 비추라고 독려합니다. 이사야는 3절부터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 중에 우뚝 서고, 빛나게 되리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빛을 보고 모여들며, 제왕들이 솟아오르는 이스라엘의 광채에 끌려옵니다.(3절) “너의 아들들이 먼 데서 오고, 너의 딸들도 품에 안겨 온다.”(4절) 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을 보는 네 얼굴에 웃음의 꽃이 피리라. 너의 가슴은 벅차올라 부풀리라. 바다의 보물이 너에게로 흘러오고 뭇 민족의 재물이 너에게로 밀려오리라.” 이런 이사야의 예언은 그야말로 몽상과 같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설교 앞부분에서 이미 이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언자들은 분명히 이스라엘이 전 세계의 중심이 된다고 선포했지만 실제 역사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2천5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요원합니다. 여기서 뭐가 문제일까요? 예언이 역사에서 성취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첫째,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선포했다. 둘째,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이런 일이 성취된다. 저는 둘 다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틀린 게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지나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로 인류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전체 민족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이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주장은 잘못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스라엘이라는 역사에 한정해서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세계의 주인 되는 때를 내다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를 비롯한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한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선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경험했으며, 그의 뜻을 정확하게 선포했습니다. 다만 그것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한정해서 적용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예언자들의 선포를 읽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경험을 다시 들으려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역사에 적용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을까요? 그것을 어떻게 선포했을까요?
이사야가 선포한 이 신탁의 핵심은 야훼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비춘다는 것과 이스라엘이 그 빛을 반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세계의 주인공이 된다는 결과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 주변에 모여드는 이유는 그들이 야훼의 빛을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빛이 아니라 야훼의 빛입니다. 그 빛은 이미 비추고 있습니다. 깜깜한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의 빛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 빛을 반사해야합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여기서 우선 중요한 것은 빛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야훼가 빛의 주체입니다. 아니 야훼는 빛 자체입니다. 그는 영광의 빛입니다. 그는 생명의 빛이며 진리의 빛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야훼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훼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야훼의 구원 행위와 통치에 집중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야훼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들에게 비추는 빛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걸 지금 놓친 채 낙심하고 있습니다. 그 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만 하면 확 잘살게 될 거라고 기대했다가 그게 안 되니 그들은 야훼의 영광이 자신들을 여전히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잘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야훼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훼의 영광은 부자 나라가 되는가, 아닌가와 상관없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고 풍요롭게 하는 무한한 생명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복음서 마태복은 2:1-12절에는 별빛을 따라 아기 예수를 찾아온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이 빛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은 세상 사람들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 사건입니다. 그것은 태양빛과 같아서 촛불이 필요 없는 구원 사건입니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 빛에 집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삶에서는 영광의 빛이, 그리스도의 빛이 반사됩니다.
오늘 우리는 경제만능주의라는 빛에, 기껏해야 촛불에 불과한 사이비 불빛에 빠져 있습니다. 대통령 인수위는 모든 정책을 경제로 몰아갈 것 같은 태세입니다. 백년지대계인 교육도 몽땅 바꾸겠다고 합니다. 경쟁력 없는 대학은 도태시키겠답니다. 고등학교도 모두 모의고시를 통해서 등수를 매기겠다고 합니다. 전체 국민과 제도를 오로지 돈 잘 버는 쪽으로 끌어가겠다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다면 좋겠지요. 그러나 지금도 이미 충분히 잘 사는 건 아닌가요? 개인소득 2만 달러에다가 경제력이 세계에서 12,13위입니다. 4만 달러로 오르고 세계 5위 안에 들어가는 게 바로 영광의 빛을 반사하는 걸까요?
저는 지금 정치인들을 종교적으로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야훼의 영광이 무엇인지, 그 빛을 반사한다는 게 무엇인지 최소한 기독교인들만이라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수는 야훼의 빛입니다. 참된 영광의 빛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어떤 구원의 빛이 발생했는지 보십시오. 그의 가르침과 그의 십자가와 부활, 그의 운명을 보십시오. 그에게 집중하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을 통해서 야훼가 비추시는 영광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로 여러분의 삶에 이런 빛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사야 6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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