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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양면성을 지니며 살고 있는 우리( 갈 5:19-24, 마 16:24-25, 왕하 5:1-8)

9월 8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mHsN6vQaDi0?si=whCyREa0hj5H97wq

우리 인간은 두가지의 모습 곧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보는 시각에도 인간을 날 때부터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정반대로 인간은 원래부터 악하다고 하는 성악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도 보면 우리 인간은 사랑, 자비, 평등, 평화, 정의 그리고 자유 등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거룩한 존재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죄성을 지닌 죄인된 존재라고도 말하고 있으니 기독교의 인간 이해도 양면성의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기쁜 일을 당하면 그 기쁨의 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것이 우리 모든 인간들의 상정이요 바램입니다. 이와 같은 반응은 인간의 간사함과 연약함을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러한 모습을 보면 우리 인간은 본래적으로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양면성 속에 있는 긍정적인 부분을 어떻게 활용하고 부정적인 모습을 어떻게 씻어내고 떨쳐내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I

오늘 말씀, 열왕기서는 약 2600여년전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열왕기하서 5장에 나오는 나아만이란 장군을 살펴보면 두가지 다른 모습 곧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임을 우리는 쉽게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나아만은 당시 최대의 강대국 나라인 아람나라 곧 시리아나라의 군대 총사령관으로서 크게 성공하여, 왕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로부터 크고 존귀한 자, 백전백승의 승리를 가져다준, 장군이었기에 당시 시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그 명성을 날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성공 면에서는 나아만이란 장군을 따라갈 만한 사람이 시리아 나라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5장 1절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이러한 나아만 장군을 가리켜서,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 곧 한센씨병 환자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엔 심한 피부병을 앓아 몸이 간지럽거나 진물이 나면 한센씨 병에 들었다고도 보았습니다. 만약 한센씨 병이 확실하면 아무리 그가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그가 속해 있는 가정공동체와 마을 공동체, 그리고 그가 속해 있는 모든 공동체로부터 축출되고 말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아직도 축출되지 않고 계속해서 군을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면 추측컨대 심한 피부병으로 고생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성경은 나아만은 최고 사령관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으나 한센씨병이라고 하는 나병 곧 심한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나아만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삶의 모습 속엔 서로 다른 두가지의 모습이 담겨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나아만 장군은 외모에 있어서나 신장이나 체력에 있어서는 크고 존귀한 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그 모양이 준수하고 용맹과 위엄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서 전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부하들이 겁에 질려 있을 땐 자신이 몸소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 승리를 한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입니다. 실로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설정해 노은 인생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자신의 목표를 이룩한, 성공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같은 성공에 반해서 모든 사람들이 저주받은 병이라 꺼려하며 피하는 몹쓸 피부병 환자였던 것입니다. 시리아의 막강한 군대를 지휘하고 통솔해 나갔던 성공 이면에는 심한 피부병으로 앓고 있어서 모두가 접촉하기를 꺼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성공하여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사람이었으나 자만하였고 교만하기 그지 없었으며 자기밖에 모르는 거만한 사람이었으니 나아만 장군이야말로 두 가지의 모습,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도 나아만 장군의 양면성의 모습처럼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 우리들의 삶 속에 담겨있는 말못할 쓰라림과 눈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분주하게 정신없이 달려온 발걸음과 비오듯 흘려내렸던 땀방울이나 고통의 눈물 속에 담겨있는 크고 작은 기쁨과 감사함과 작은 성공들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의 발자국들을 바라보면서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칭찬하든지 또는 잘 살았다고 우러러보며 박수를 보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겉모습이 남들 보기엔 성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만히 나 자신을 바라다보면 나 자신이 바라며 꿈꾸던 것들이 성취되어 성공적인 삶이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의 삶이 승리로운 삶을 살아갔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성공한 사람이지만 마음이 교만한 사람이라면 실패의 삶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경력이나 이력을 통해서 볼 때, 어느 모로 보더라도 무언가를 이룩한 것이 분명한데, 그의 삶 속에 따뜻한 사랑과 겸손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면 승리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그가 열심히 사업을 하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어려운 이웃과 사회를 향한 나눔과 봉사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삶을 실패한 사람이라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여 외형의 모습은 별 모양이 없어도 신실하고 성실하며 겸손함이 넘친다면 그는 자신의 인생의 장애물경기를 승리한 사람입니다. 비록 배운 것이 적고 아는 것이 적어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신앙에서 오는 지혜와 말없는 나눔과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는 승리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양면성은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나 신앙의 생활을 할 때 이중성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이중성은 신뢰를 무너뜨릴 수도 있으며 사랑의 공동체를 깨뜨릴 수도 있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양면성 가운데 부정적인 부분이 더 나타나면 이중인격 또는 다중인격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양면성 중에 긍정적인 면이 더 많이 작동하면 삶에 있어서나 신앙에 있어서 아름다운 향기를 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수 있으나,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이 작동하면 그가 속한 공동체에 피해를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양면성을 적절하게 잘 종합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하나의 건전한 신앙의 인격으로 형성해 나간다면 양면성은 우리에게 더 나은 신앙생활과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긍정적인 요소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II

그런데 나아만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당대에 최고로 성공한 사람같았지만 그러나 몹쓸 피부병으로 혹은 나병으로 철저하게 실패한 두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던 나아만 장군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굳게 의지한 새사람으로 돌아왔는지를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아만 장군의 집에 노예로 끌려와 살아가는 히브리 노예 소녀가 있었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 장군의 부인의 노예로서 시중들며 근근이 살아가던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는 주인인 나아만 장군이 몹쓸 피부병 환자란 말을 듣고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장군의 부인에게 이스라엘나라에 엘리사라는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장군의 몹쓸 병을 낫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부인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던 나아만 장군은 시리아 왕을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한 후, 왕의 친서를 받아 약 320km떨어진 작디작은 북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 사마리아로 향했습니다. 그가 탄 마차에 “은 10 달란트 금 600개 예복 10벌”을 싣고서 이스라엘의 왕이 있는 사마리아로 출발하여 2-3일 걸려 겨우 도착하여 시리아 왕의 친서를 내어놓았습니다. 추측컨대 친서의 내용은 “나아만 장군의 심한 피부병이 나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이스라엘 나라의 왕중에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 왕의 아들인데 시리아 왕이 불가능한 것을 부탁한 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칠 빌미를 만들기 위함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왕은 슬픈 마음으로 왕의 옷을 찢으면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예언자 엘리사는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연락을 취합니다. 이렇게 해서 엘리사에게 간, 천하 제일의 장군 나아만은 예언자 엘리사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통해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이나 씻으라고 일러 줍니다. 당시의 세계에서 제일의 장군이었던 나아만은 자신이 예언자 엘리사의 집에 도착할 때쯤 되면 엘리사가 맨발로 나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대대적인 환영을 할 줄로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심부름꾼을 통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라고 말을 전달해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사의 모습이 천하제일의 자신을 무시한 행동으로 간주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나아만은 성난 얼굴로“우리 시리아 나라에 있는 다메섹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은 그 크기와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 요단강의 수백배나 더 큰 강인데 이러한 초라한 강에서 몸을 씻으라고 한다고 고함을 질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을 무시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기에 괘심한 마음이 생겨 시리아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함께간 무명의 종 한사람이 “병을 낫게 하는 일이라면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라는 “충고”를 듣고서 나아만은 밎져봐야 본전이다는 생각으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씩이나 씻었습니다.

그랬더니 5장 14절 말씀처럼, “나아만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대어 성경 번역에 의하면, “그래서 돈 많고 권세 높은 나아만은 마음을 바꾸어 겸손히 요단강으로 내려가 엘리사가 명령한 대로 그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었다. 그러자 그가 완전히 치료되어 그의 피부가 어린이의 살결처럼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예언자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지극히 작디작은 요단강으로 들어가서 강물에 몸을 일곱 번 담그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삶 속에 담겨 있는 양면성 중에 부정적인 모습들, 첫째로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된 것을 스스로 우쭐거리며 뽐내는 자만의 모습을 씻어내라고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타인보다 더 낫다고 늘 생각하고 자랑하며 거드름 피우던 교만의 모습도 씼어내라는 것이요 셋째, 제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며 살았던 거만한 모든 모습을 철저하게 토해내고 떨쳐내라고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지극히 작고 평범한 일들 속에서 만나는 타자에 대해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따뜻한 환대의 마음으로 섬기고 봉사하며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던 나아만 장군이 이렇게 몸이 깨끗하도록 치유받게 된 중요한 첫 번째 요인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삶에 그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던 있으나 마나 한, 하찮은 두 사람의 종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은 데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자기 아내가 거느리고 있던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리고 이곳까지 함께 동행하여 자신의 수발을 돕고 있던 종으로부터 예언자의 말을 부디 들어 순종하라는 말을 들었기에 자신 속에 깊이 박혀있던 자만의 마음, 교만의 마음, 거만한 마음을 비우고 물속으로 들어갔기에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만이 병고침을 받게된 두번째 요인은 그동안 나아만은 “나만이 제일이며 나만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자만하고 교만하고 거만하기 그지없던 자신의 마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바꾼데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나아만은 인간 이하의 사람으로 무시하며 하찮게 생각해 왔던 그 종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이 병고침을 받았던 가장 중요한 셋째 요인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물속으로 들어가 자신 속에 담겨 있는 부정적인 죄성의 모습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러한 부정적인 모습들을 씻고 또 씻고 또 씻어내는 노력, 그리하여 일곱번씩이나 철저하게 자신의 옛모습을 씻어내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말한 대로 작고 보잘것없는 요단강 물에 일곱번씩 몸을 담구어 씻어내면서 지금까지 씻기지 않았던 “교만”; 지금까지 벗겨지지 않는 “자만”; 지금까지 토해내지 못했던 “거만함”과 “자기기만”의 옛모습을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되풀이하면서 철저하게 하나씩 둘씩 찾아가며 씻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으로 거듭난 나아만 장군에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종국에는 그 지긋지긋하던 몹쓸 피부병마저도 사라지고 만 기적을 맛보게 됩니다.

이러한 기적을 맛본 나아만은 감격하며 기뻐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선물로 가져온 금 6000개(50억), 은 10달란트와 의복 10벌의 어마어마한 선물로 보답하고자 하지만 예언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일을 대행한 것이기에 받을 수 없다고 극구 사양하여 절대로 받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급진 신앙, 다른 어느 종교와 비교할 수도 없는 값진 신앙의 모습에 나아만은 숨도 제대로 쉴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감동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은 간절한 마음으로 한가지 부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조국, 시리아로 돌아갈 때 이스라엘 땅의 흙을 가지고 가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왜 그 많은 것 중에 병이 나았다는 기념으로 흙을 가지고 돌아가려고 했겠습니까?

그것은 나아만 장군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흙으로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나아만 장군이 자신의 고국 시리아에서 이스라엘 요단강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의 손길에 감사하면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 다할 때까지 끝까지 의지하는 신앙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아만은 이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180도로 달라진 것입니다. 나아만은 자신 속에 담겨 있던 온갖 이중성의 오물들, 모든 옛 모습들을 철저하게 떨쳐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겠다고 하는 신앙고백과 함께 자신의 삶을 새롭게 출발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말씀에 담겨 있는 복음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III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5장 19-24절에서 우리 인간의 양면성, 이중성, 이중성의 모습과 성령의 감동 감화로 양면성, 이중성, 다중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양면성, 이중성, 다중성을 지닌 옛 모습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인 성령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성령에 따라 산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과 정신을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오늘이야말로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겠다는 믿음의 때요 결단의 때라고 강조합니다.

오늘 봉독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제일 먼저 예고하시면서 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이중성, 양면성과 이를 넘어 다중성을 지닌 냄새나는 옛사람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떨쳐버리고 변화된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이 되어 우리 속에 있는 양면성, 이중성, 다중성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옛모습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씻고 씻어내고 철저하게 씻어낸 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작고 미미한 우리를 통해서도 사랑과 평화와 정의와 생명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여기에서도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이요 신앙으로 살아가는 멋있는 삶이요 복된 삶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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