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벧전 2:2-10,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14년 5월18일
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요즘 저희 집 화단에 분홍낮달맞이꽃이 한창입니다.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꽃모양이 둥근달처럼 생겼다 해서 달맞이꽃이라고 하는데, 이 꽃은 낮에 핀다고 해서 낮달맞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분홍색깔을 띄어서 분홍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졌습니다. 이름은 그것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개신교인들의 이름인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체제에 저항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벧전 2:9절에 따르면 기독교인을 부르는 이름이 네 가지나 나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가리킵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그것입니다. 네 가지 칭호는 최상급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구약 개념과 연결됩니다.
1) 택하신 족속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선민사상이라고 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확신으로 그들은 주변의 큰 나라를 부러워하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좌고우면 없이 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런 구약 사상에 근거해서 이제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2)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도 역시 구약 사상에 토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사람들의 중재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이제 기독교인들이 온 인류를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것도 왕과 같은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최고 권위의 역할이라는 뜻입니다.
3) 거룩한 나라는 세상과 구별된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세상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구별했습니다. 근본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존재론적 차별성에 머물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치열하게 노력한다는 의미가 거기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일상의 먹을거리마저 구별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사람은 이제 기독교인이야말로 참된 의미에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들이라고 선포했습니다.
4)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말은 앞에서 거론된 세 가지 칭호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도 물론 구약 사상에 근거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규정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이제 기독교인이야말로 하나님의 소유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10절에서 다시 정리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본문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대한 네 가지 칭호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로 생각이 다르겠지요. 어떤 분들은 본문의 주장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동의할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옳은 말이긴 하나 뭔가 확 와 닿지 않는다고 여길 겁니다. 전자에 속한 분들은 믿음이 깊은 분들이고, 후자에 속한 분들은 믿음이 부족한 분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전자에 속한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네 가지 칭호의 실질적인 의미를 모를 수가 있고, 후자에 속한 분들이 그 실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더 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에 속했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문이 설명한 네 가지 칭호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 신자의 존재론적 특성을 아는 일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게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9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문장에서 핵심은 네 가지 호칭 자체가 아니라 그런 호칭으로 불리는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빛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과 빛이 대비되었습니다. 이런 대비는 신약의 다른 곳에도 자주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입니다. 요 1:5절은 이렇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어둠은 세상을, 빛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런 관점이 신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전통에 서 있습니다.
세상을 왜 어둠이라고 보았을까요? 죄가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할 겁니다. 옳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악합니다. 살인, 강도, 상해, 모함, 각종의 폭력이 매일 일어납니다. 겉으로 나타난 악만이 아니라 안에 숨어 있는 악도 많습니다. 유대계 독일 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악은 유별난 게 아니라 평범합니다. 끔찍한 악을 행한 사람도 알고 보면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런 걸 일일이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세상은 분명히 죄와 악이 가득한 어둠이지만, 성경은 그런 차원만 보는 게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어둠을 말합니다. 죄와 악은 그 근본적인 어둠에서 나온 것뿐입니다. 근본적인 어둠은 뭘까요?
그것은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생명과의 단절은 곧 죽음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어둠은 그런 세상을 가리키는 메타포, 즉 은유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죽습니다. 요즘 5월에 예쁘게 피는 꽃들도 금세 시들어 땅에 떨어집니다. 쥐어짜면 녹즙이 흘러내릴 것 같은 요즘의 나뭇잎들도 가을이 되면 누렇게 변색됩니다. 지금 예배에 참여한 20대, 30대 청년들도 곧 70대, 80대 노인이 될 겁니다. 그리고 죽을 겁니다. 이걸 전제하면 세상이 어둠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둠과 죽음은 극복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은 죽음과 전혀 상관없이 작동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21세의 문화, 사회현상이 그렇습니다.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의 가상공간을 현실로 여기고 삽니다. 그런 가상공간은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무한 발전만 있습니다. 스마트폰 게임만 해도 그렇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무한한 재미를 제공합니다. 이런 기술과 문화에 지배받는 사람들의 의식에는 어둠과 죽음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듣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느낍니다. 세상에서 낙오가 되지만 않는다면 세상은 얼마든지 재미있고 유쾌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이런 현상이 인류에게 행복일까요? 아닙니다. 그건 불행입니다. 이런 생각은 사탄의 유혹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그럴듯하지만 결국 사람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어둠을 외면하면, 즉 어둠을 어둠으로 인식하지 못하면 빛을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만 계속 붙들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모르긴 해도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스마트폰을 하나님으로 믿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큰 착각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의 실존을 어둠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빛을 찾게 됩니다. 중세기 유럽 사람들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죄기도를 드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죄기도는 자신이 죄의 지배에 놓여 있다는 인간 실존에 대한 준엄한 통찰이자 고백입니다. 요즘 크게 사회 문제라 된 구원파 유의 기독교인들은 그걸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사죄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수준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과거의 죄만이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구원을 실증적으로(포지티브) 이해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잘못입니다. 기독교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실존에 놓인 어둠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의 빛에 민감하게 됩니다.
일전에 대구샘터교회 아무개 집사님이 경험한 일화를 들었습니다. 그분이 포항 어느 깊은 숲에 있는 작은 집에서 혼자 며칠을 지냈습니다. 밤에 자리에 눕자 세상과의 단절,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사실 앞에서 공포가 밀려왔다고 합니다. 식은땀까지 흘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둠이 걷히기도 전인 새벽, 그러니까 아주 희미한 정도의 빛이 나타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에 공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둠을 경험했기에 빛에 민감했던 게 아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기자는 단순히 빛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기이한’ 빛이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은 개역개정의 기이한이라는 형용사를 ‘놀라운’이라고 번역했는데, 좀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번역입니다. 마틴 루터는 그 단어를 ‘wunderbar’라고 번역했습니다. 독일어 분더바는 놀랍다는 뜻입니다. 그 단어의 어근은 기적이라는 뜻으로도 번역이 되는 Wunder입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그 빛은 기이하고, 놀랍고, 기적과 같은 경이로운 빛입니다. 이런 빛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바로 기독교인입니다. 도대체 놀라운 빛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것을 아는 게 기독교 영성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자신들은 왜 그런 경험이 없는지 혼란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호렙 산에서 불이 붙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 현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사야는 성전 안에서 스랍(천사)들의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하는 합창소리를 들었습니다. 신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각각 천사의 방문을 받고, 동거하기 전이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던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걸 보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빛으로, 또는 소리로 경험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듣고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은 이런 경험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뭔가를 직접 보거나 들었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귀신을 본 것처럼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로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성모 마리아 현현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이런 사건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지금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특수한 경험을 제가 다 아는 게 아니기도 하고, 그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가 아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런 여러 이야기들을 나열한 이유는 이런 현상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서 결국 오늘 본문과 성서가 말하는 놀라운 빛이라는 표현을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빛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생명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은 빛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옛날부터 생명의 근원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고대인들은 빛의 근원인 태양을 신처럼 섬겼습니다. 모든 종교는 빛을 구원의 능력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빛과 그 빛의 근원인 태양 자체를 믿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생명은 태양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빛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는 구약성서를 우리에게 전해준 유대인들과 우리의 생각이 같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빛이 바로 하나님의 성육신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점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인들과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요한복음도 분명하게 말했듯이 초기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빛이, 하나님의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놀라운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들이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놀라운 빛인지를, 즉 생명의 근원인지를 더 알고 싶은 분이 계신가요? 제 설교의 모든 것은 이 질문에 대한 해명입니다. 이것 외에는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 말고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은 없습니다. 저는 이미 이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씀드렸고, 앞으로도 반복해서 말씀드릴 겁니다. 이건 몇 번 들어서 아는 게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도 들어도 부족할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알아도 그 세계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못할 겁니다. 수행하듯이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놀라운 빛이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놀라운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어서 유일하게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니, 그리고 말씀(로고스)이 육신을 입은 사건이니 어찌 새롭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종말에 완성될, 또는 종말에 시작될 부활생명이 그에게서 선취되었으니 어찌 천지개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 구원생명은 당시의 시대정신인 로마 황제가 줄 수 있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이 제공하는 것과도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의 완성은 우리가 여전히 기다려야 할 그런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참된 생명의 놀라운 빛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베드로전서의 가르침을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놀라운 빛 안으로 끌어들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또 믿으시지요? 이제 우리는 세상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 본문이 말하듯이 하나님이 행하신 그 귀하신 일을 선포해야 합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선포는 어둠에서 빛 안으로 들어온 사람으로, 그리고 그런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여러분의 영적 분량에 따라서 성령께서 알려주실 테니, 마음을 열고 기다려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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