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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창 43 : 1 - 10)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8r1oeajuwPY?si=R0BlekU5paAUYF6-

▣ 들어가는 말

- 태양이 침묵하는 곳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고 있었다.”(단테, 『신곡』) “나는 위를 바라보았고, 사람들을 각자의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행성의 빛살에 둘러싸인 언덕의 등성이가 보였다.” “엄청난 탐욕으로 비쩍 마른 몰골로, 내 앞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얼마나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 언덕 꼭대기를 향한 희망을 잃었다. 마치 탐욕스럽게 재물을 모으던 자들이, 그것을 잃어버릴 때가 다가오자, 온통 그 생각에 울고 슬퍼하듯이, 그 짐승도 안절부절 나에게 그러하였다. 나를 향해 마주 오면서 조금씩 나를, 태양이 침묵하는 곳으로 밀어냈다.” “이 어두운 곳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너는 다른 길로 가야 할 것이다.” “나를 따르도록 하라. 내가 안내자가 되어, 너를 이곳에서 영원한 곳으로 안내하겠다.”

단테 『신곡』의 제1곡에 나오는 몇몇 구절입니다. 『신곡』은 전체 100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옥, 연옥, 천국 편이 각각 33곡입니다. 여기에 전체의 서곡에 해당하는 한 곡이 지옥 편에 추가되어 34곡이 됩니다. 그래서 모두 100곡이 됩니다. ‘중세의 문을 닫고 근세의 문을 연 사람’이라 극찬을 받는 단테는 이 『신곡』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되지요. (4대 시성-호메로스,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

첫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우리는 종종 인생길에서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념 체계가 무너지고 삶에 대한 희망도 사라지고 태양이 침묵하는 곳으로 밀려가는 때가 있지요. 아무리 빠져나오려고 허우적대보아도 오히려 점점 깊은 곳으로 빠져들고 말지요. 우리는 왜 이렇게 길을 잃을까요. 왜 수렁에 빠지게 될까요. 어떻게 해야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 사건의 이야기

믿음의 조상 가운데 하나인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소위 큰 복을 받았습니다. 많은 자식과 가축들, 거느리는 사람들과 땅, 언뜻 매우 성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겐 해결되지 않은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그리도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은 것이지요.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이 남긴 아이라서 그리도 애틋했던 걸까요. 양 떼를 치고 있는 형들을 살펴보고 오라고 보냈던 심부름이 그가 본 요셉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불행히도 요셉은 산속에서 들짐승의 밥이 되고 말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야곱은 요셉의 동생이자 막내인 베냐민을 더욱 애지중지하게 됩니다. 베냐민을 보면 자꾸 요셉이 생각났지요.

아픔이 있었지만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삽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힘겨운 시기가 닥칩니다. 온 땅에 기근이 닥친 것이지요. 양식을 구하기 위해 하는 수없이 이집트로 아들들을 보냅니다. 그러한 과정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요.

이집트의 막강한 권력자가 된 요셉은 20년 만에 자신의 형들을 만납니다. 곡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보며 아마도 만감이 교차했겠지요. 20년 전, 형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자기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제는 거꾸로 형들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양식을 구걸하고 있는 모습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제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형들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애꿎은 누명을 씌웁니다. 이집트 땅을 염탐하러 온 정탐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양식을 구하려거든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엄히 명령하지요. 그러면서 시므온을 잡아 옥에 가두어버립니다. 그리고 가지고 왔던 돈도 다 돌려보내지요. 형들은 얼마나 당황스럽고 또 억울했을까요?

어쨌든 집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아비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다시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생트집을 잡아 시므온마저 옥에 쳐넣어 버린 사악한 이집트의 총리 놈이 베냐민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아들은 절대로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창42:38)

 

▣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 난관 앞에서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아픈 상처가 되살아납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라헬’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 요셉도 허망하게 짐승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요셉에게 심부름을 보내지만 않았어도… 뼈아픈 후회와 고통이 밀려옵니다. 도중에 길가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버린 라헬. 그 기억 때문에 베냐민을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라헬도, 요셉도 모두 떠난 후 야곱에게 남은 라헬의 혈육은 베냐민뿐입니다. 이 아이만큼은 꼭 지키고 보호해야지 다짐하며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베냐민마저 내놓으라니요.

야곱에게 있어 생애 최대의 시험, 시련이 닥친 것입니다. 왜 이런 상황이 그에게 닥친 것일까요. 평생을 그리도 치열하게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왔던 야곱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의 과정을 거치며 많이 성숙하고 자유롭고 편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성숙해지기 위해서 온전해지기 위해서 그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늘 가슴 한구석에서 자신을 괴롭혀왔던,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어둠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 어둠의 정체

야곱이 마주한 상황은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외부에서 주어지는 환경과 상황에 대해 무기력합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요. 환경과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속에서 대응하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지요.

본문에서 야곱이 마주해야 했던 어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베냐민을 지켜야 할지, 가족 전체의 생존을 지켜야 할지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겉보기에는 베냐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볼 수 있지만, 베냐민에 대한 사랑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야곱이 가진 진짜 어둠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떠나보낸 상실감 아니었을까요. 그의 삶은 악착같이 움켜잡는, 가지고 싶은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어내고야 마는 지독스러운 집착이었지요. 그렇게 얻어낸 라헬은 허망하게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고 맙니다. 그가 그리도 원했던 ‘영원한 사랑’은 끝내 얻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녀를 대신했던,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쏟았던 요셉도 곁에 붙잡아 둘 수 없었지요. 라헬을 떠나보낸 상실감은 패배감으로, 죄책감으로, 결국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어둠으로 자리 잡게 된 것 아닐까요. 그리고 이제는 그 불안과 어둠이 베냐민에 대한 고집스러운 집착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그러나 이젠 미뤄왔던, 숨겨왔던 자신의 어둠을 마주할 시간입니다. 가족 전체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두려움과 고통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을 구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구원하는 길입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불안과 신뢰’의 개념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불안은 특히 인간이 자신이 가진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을 직면할 때 발생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선택과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 완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느끼는 불안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본연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불안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고 불안 속에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신에게 자신을 맡기는 신뢰, 즉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지요. 신앙의 도약은 이성적 사고나 명확한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신을 믿고 자신을 맡기는 결단입니다. 이 신뢰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불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초월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유한한 한계를 인정하고, 신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에 다가가며 참된 실존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깊은 심연의 불안 속에서 야곱은 신뢰를 선택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처했을 때, 그 한계를 인정하고 결국 그 운명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보내는 결단을 하게 되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창43:14)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야곱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비로소 믿음을 갖게 되는 순간입니다. 베냐민을 떠나보내면서, 움켜잡고 있던 집착을 포기함으로, 자신의 깊은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면서, 자유와 해방 구원을 얻습니다. 결국, 인간의 도약, 해방은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울러 모든 가족을 하나로 재결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 하나님의 섭리

-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요셉은 이집트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고통과 한계를 넘어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과거에 자신에게 행했던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형들의 얼굴을 보자 과거의 고통이 되살아납니다.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정의와 사랑 사이의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 일일까요. 무조건적 용서로 죄를 덮어주는 것? 잘못에 걸맞은 처벌을 받게 하는 것?

판결을 내리기에 앞서 그는 형제들에게 변화의 기회를 줍니다. 그 과정을 통해 그가 내린 결론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은 생명을 구걸하는 형제들의 얼굴(타인의 얼굴-레비나스)에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복수와 원한의 대상의 얼굴이 아니라, 배신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음하던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지요.

그것을 통해 그는 복수와 용서 사이의 갈등을 넘어, 그 너머에 있는 신의 섭리를 깨닫습니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깨닫습니다.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현상을 넘어선 초월적 의미부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생명 살림에 대한 거룩한 신의 뜻에 다다릅니다.

- 그 아이를 대신하여

형제들은 무자비한 애굽의 권력자 앞에서 비로소 자신들의 과거의 죄와 직면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 헛된 오만과 질투, 치기 어린 행동으로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아비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았습니다. 어린 동생을 추악한 돈을 받고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죄책감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제 유다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아비의 고통을 덜어주려 합니다. 베냐민을 대신해 종으로 살며 조금이라도 죄를 씻으려 합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보내소서.”(창44:30, 33)

그는 자신을 희생하여 어린 동생 베냐민을 살립니다. 베냐민의 얼굴에서 살려달라 절규하던 요셉의 얼굴을 떠올렸을까요. 늙은 아비 야곱을 살립니다. 자신이 자식을 잃는 슬픔을 겪고서(창38장) 아비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일까요. 타인을 향한 자기희생적 사랑과 결단을 통해 그는 가족 모두의 생명을 지켜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믿음의 뿌리가 됩니다. 다윗 왕가가 그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지요. 그의 이러한 모습은 유다가 가족을 위한 지도자로서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그는 가족 모두뿐 아니라, 자신마저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결단을 한 것이지요. 혼자 살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방식이 아닌, 자신을 희생하여 모두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 나가는 말

-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를 진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외부적 환경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도, 우리의 성숙을 가로막는 것도 결국은 내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야곱의 생은 지독스러운 물질과 복에 대한 집착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가 바라던 것들을 이루었으나, 그는 내면의 평안과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아직 그를 묶고 있는 것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성취에 대한 집착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리도 원하던 여인 ‘라헬’에 대한 그의 사랑도 사랑이라기보다는 집착, 자기 자신이 이루어내야만 하는 과업, 결국은 왜곡된 자아상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요.

온갖 고생 끝에 이집트의 권력자가 된 요셉 역시 대부분 사람이 바라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깊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가족에게, 형제에게 배신당한 상처는 정말이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일까요. 죽어가는 자신을 버려두고 떠나는 형제들의 얼굴 하나하나, 웃음소리 하나하나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생존하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오면서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잊어버렸다고 애써 외면해왔지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유다는 어떤가요. 어린 동생을 팔아넘겨 버린 그 추악함을 가슴속에 간직하며 사는 생은 또 어떨까요.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야곱)를 볼 때마다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을까요. 생때같은 아들을 둘이나 먼저 보내며 얼마나 비통하고, 자신의 영혼을 파고드는 죄책감을 어찌 감당하며 살아왔을까요.

결국, 우리는 고통을 지으며 사는 것은 아닐까요. 그 무거운 짐을 마음속에 지고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애처로운가요.

-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뿐인 것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 은혜를 베푸사 …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43:14)라는 고백을 통해 야곱은 평생 집착해왔던 것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 자유로워진 것 아닐까요.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라는 깨달음과 인정을 통해 요셉도 자신의 상처에서 치유됩니다.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창44:33) 스스로 종이 되겠다는 고백을 통해 유다는 자신의 고통에서 놓임을 받게 됩니다.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치유하게 하는 것,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삶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할 수 있기를, 자식도, 재산도, 건강도,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는 믿음의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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