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엘리야와 엘리사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름이 가장 크게 알려진 예언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주로 말씀을 선포했다면 엘리야는 기적적인 사건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유별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갈멜 산에서 있었던 바알 예언자들과의 싸움입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아합이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통치하던 때입니다. 아합은 바알을 섬기는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은 뒤로 아주 열심히 바알을 섬겼습니다. 이세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던 아합은 엘리야와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세벨은 바알 숭배를 비판하는 엘리야를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갈멜 산에서 여호와의 예언자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 450명이 일전을 벌였습니다. 장작더미 위에 송아지의 각을 떠서 올려놓은 후 각자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불러 그 번제물을 태우게 하는 싸움이었습니다.(왕상 18장)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신을 불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모든 걸 태웠다고 합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엘리야에게는 많이 일어났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그런 일들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묘사로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왕하 2:1) 여기에 등장하는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입니다. 엘리사도 엘리야 못지않을 정도로 영적 카리스마가 넘친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이제 죽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 벧엘 성지로 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제자인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여기에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왕하 2:2a) 사람은 죽을 때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이들을 불러 모읍니다. 유언도 하고, 마지막 정도 나누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제자마저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좀 다릅니다. 죽음 앞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엘리사는 스승의 말과는 반대로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왕하 2:2b) 이런 스승과 제자의 대화가 6절에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엘리야는 어쩔 수 없이 엘리사를 데리고 죽을 장소로 갔습니다. 마침 요단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엘리야는 겉옷을 벗어 말아서 물을 쳤습니다. 그러자 물이 갈라지고 마른 땅처럼 되었습니다.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약성경의 역사를 어느 정도 공부한 분이라면 이와 비슷한 사건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출애굽 당시에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홍해 위로 내밀자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처럼 되었고, 가나안 입성 당시에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서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요단 물을 발로 밟자 요단강이 갈라졌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는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고대인들에게는 자연스러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꽃과 나비가, 그리고 토끼와 새들이 서로 대화하는 동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대인들은 이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어떤 능력을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겠지요. 어느 쪽이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요단강을 마른땅처럼 지나갔습니다. 그 순간에 이 두 사람의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엘리야는 바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마치 코끼리가 죽을 때 자리를 찾아간다는 말처럼 그는 그곳을 향해서 가는 중입니다. 엘리사는 이제 곧 하늘처럼 따르던 스승을 잃어야할 절박한 순간입니다. 앞으로 스승이 없는 현실을 자신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분단된 조국 이스라엘의 상황은 여전히 암담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이런 상황을 뚫어보고 있었을 겁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유언을 하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자신이 죽기 전에 무엇을 도와주랴, 하는 말입니다.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왕하 2:9) 당시 예언자 전통은 성령의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 영은 엘리야의 평생을 관통하면서 놀라운 일을 많이 행하게 했습니다. 제자가 이런 성령의 능력을 스승에게서 이어받겠다는 말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능력을 이어받으면 그때서야 제자의 권위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능력을 이어받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고 대답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할지 아닐지 엘리야조차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약속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대로 전수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한 가지 단서를 엘리사에게 일러줍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왕하 2:10) 스승의 죽는 순간을 보는 제자에게 성령의 능력이 전수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엘리야가 혼자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했지만 엘리사가 굳이 함께 따라가겠다고 한 걸 보면 어쩌면 엘리사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임했던 성령의 능력을 얻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들고 돌아오는 길에 요단 물을 내리치자 물이 갈라졌다고 합니다.(왕하 2:14)
불과 바람
엘리야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본문 11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속 길을 가는 중에 갑자기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나서 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습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 장면은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아마 이 장면을 주제로 하는 성화도 많을 겁니다. 엘리야는 보통 사람들처럼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을까요? 구약인물 중에서 두 사람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엘리야고, 다른 한 사람은 에녹입니다. 히 11:5절은 에녹이 죽지 않고 옮겨졌다고 말합니다. 실제 에녹에 대한 이야기인 창 5:24절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다고만 말하지 죽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갔다는 말은 곧 죽었다는 말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에녹에 대한 창세기의 설명을 오해했거나 아니면 히브리서의 진술이 다른 뜻이었을지 모릅니다. 엘리야 이야기도 그와 같습니다. 그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을 무조건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다고 보는 건 정확한 해석이 아닙니다. 성서기자는 엘리야가 죽었다는 사실을 당시의 문학적 방식으로 묘사한 것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입니다. 죽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성서기자는 엘리야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것처럼 착각할 수 있도록 이 장면을 묘사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서기자가 독자들을 일부러 착각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당시의 이야기 방식으로 그 사실을 전한 것뿐입니다. 착각은 독자들의 잘못입니다. 성서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의 특별한 능력에 대한 강조입니다. 엘리야에게는 죽는 순간까지 이런 능력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불수레와 불말과 회오리바람으로 문학적인 옷을 입었습니다.
불과 바람은 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임재를 경험하는 특별한 통로였습니다. 행 2:1-4절에 나오는 초기 기독교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도 불과 바람이 매개로 작용했습니다. 불과 바람이 그들에게 이렇게 특별한 현상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고대인들의 눈으로 불을 보십시오. 불은 모든 물질을 근원적으로 변형시키는 능력입니다. 숲도 불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금광석에서 금을 제련해낼 수 있는 힘도 불에서 나옵니다. 불은 열과 빛을 냅니다. 불은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불이라는 현상에서 고대인들이 신적 능력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람도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생명을 가능하게 하도, 거둬들이기도 하는 능력이 바람에게 있습니다. 바람은 곧 호흡이기도 합니다. 숨을 못 되면 죽고 숨을 쉬면 삽니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바람, 숨, 공기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현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람을 영이라는 뜻의 ‘루아흐’라고 불렀습니다.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열왕기하 기자는 엘리야라는 특출한 예언자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성령의 능력이, 즉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다는 사실을 불과 바람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묘사했습니다.
성서기자가 단순히 엘리야에게 임한 놀라운 능력만을 전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엘리야의 운명에서 이미 이런 사건들은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굳이 죽음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모세 같은 사람은 엘리야와는 정반대입니다. 홍해를 가를 정도로 영적인 카리스마가 뛰어났던 모세는 죽을 때 평범했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신 34:5) 그를 무덤에 장사지냈지만 아무도 그 무덤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이 모세의 죽음을 크게 기념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마지막이 평범했다고 해서 그가 엘리야보다 더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엄격하게 따지면 이렇게 죽거나 저렇게 죽거나 그것 자체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번듯한 후손이 많아서 그럴듯하게 장례를 치르고 호화판 무덤에 묻히거나, 아니면 혼자 초라하게 죽어서 수목장으로 처리되거나 어떤 쪽이든지 죽음 앞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이 드라마틱하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에 호기심을 두지 마십시오.
그 장면을 더 세심하게 보십시오. 불수레와 불말들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불과 바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이제 불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불이 되었고, 바람이 되었습니다. 저도 살만큼 살다가 불이 되고 바람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불과 바람이 된다고 해도 억울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큰 상급을 받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불과 바람이 된다는 사실이 몹시 불편하게 들릴 겁니다. 그런 불편한 생각은 모두 인간 중심에서 나온 겁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에게 철저하게 길들여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낯설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우리가 직접적으로 불과 바람이 된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불과 바람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은유적 표현입니다. 불과 바람이 된다는 말은 곧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생명의 근원을 실증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서 무엇으로 변하든지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불과 바람으로 변형되는 것이 하나님과의 일치라고 한다면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멀게 느껴지나요? 우리가 부활하여 다시 만나 즐겁게 살아갈 것을 달콤하게 꿈꾸고 있는 여러분에게 찬물을 끼얹는 설명처럼 들리시나요?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여러분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이 허무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행복한 조건들을 머리에서 지워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참된 영적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처럼 우리의 마지막 순간도 불과 바람이 사로잡을 겁입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하늘로 올라갈 겁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죽는 순간만 기다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엘리야는 세상을 떠났지만 엘리사는 세상에 남아야 합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 방식으로 역사는 종말까지 진행됩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은 이제 세상에서의 책임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사람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역사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떠나면 그의 제자가 그 사명을 이어받아야겠지요. 기독교 역사도 이런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의 뒤를 이어서 속사도들이, 그리고 교부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뒤로 수천 년 동안 기독교 역사를 이끌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역할에 따라서 역사는 달라집니다.
엘리야의 뒤를 이어 세상에 살아남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할 엘리사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근거도 성령강림 체험이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일어났던 기적적인 사건과만 연결시키지 마십시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삶 전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영적 촉수에 분명하게 들어올 것입니다. 우리의 과도한 물질적인 욕망이 줄어들고 영적인 갈망이 강렬해집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능력에 눈이 뜨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그의 통치가 분명해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염려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바로 예수님의 영이, 그 부활의 영이, 창조와 종말의 영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6월27일)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