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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엘리야의 하나님 (왕상 19 : 9 ~ 18)

2024년 9월  15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joGTfjImeYE?si=leupEjZL23SlRNPj

▣ 들어가는 말

- 신은 어떤 의미인가?

신은 어떤 의미일까요? 누군가에겐 생의 의미일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겐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는 허상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있고, 또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은 인류가 존재해온 이후로 인간의 삶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은 틀림없습니다. 아울러 신에 대한 인식도 발전? 변화해 왔지요.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십자가에 못이 박힌 남자는 하얀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심장에 일곱 개의 칼이 꽂혀 있었고, 눈에는 역시 하얀 붕대가 덮여 있었다. 그런 식으로 눈을 가린 것은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성당에 있는 모든 성상들이 다 눈을 가리고 있었다.”… “눈먼 사람들이 성상들을 볼 수 없다면, 성상들도 눈먼 사람들을 볼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죠. 원래 성상들은 못 보잖아. 그렇지 않아요. 성상들은 그들을 보는 사람들의 눈을 통해 봐요. 다만 이제 실명이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되는 바람에 성상들도 못 보게 된 거죠.”

온 세상 모든 사람이 눈이 멀어버린 세계에서 주인공 일행이 우연히 들어가게 된 성당에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지요. 예수와 마리아뿐 아니라 모든 성인의 조각상들의 눈을 붕대로 가려놓은 것입니다. 어차피 보지 못하는 조각상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니, 마땅히 조각상조차도 볼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성상들은 그들을 보는 사람들의 눈을 통해 봐요.” 이것은 결국, 인간의 신인식은 인간 인식의 한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 같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아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우리의 앎만큼 신을 인식할 수 있고, 신에 대한 인식만큼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닫혀 있다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신 역시 보지 못하는 신에 불과하겠지요. 우리의 신인식이 눈먼 신이라면, 우리의 수준 역시 눈먼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겠고요.

 

“눈먼 사람에게 말하라, 너는 자유다.

그와 세계를 갈라놓던 문을 열어주고, 우리는 그에게 다시 한번 말한다.

가라, 너는 자유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는다.

그는 길 한가운데서 꼼짝도 않고 그대로 있다.

그와 다른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우리의 눈이 멀어 있다면,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진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어떤 자유도 누리지 못하는 눈먼 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에 대한 온전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믿음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눈먼 신앙인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삶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자유로운 신을 인식하지 못한 것 아닐까요. 우리의 가슴이 여전히 차갑고 냉랭하다면, 사랑의 신을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 아닐까요.

▣ 그리스 세계의 신들

- 축의 시대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라고 부른 시기가 있습니다.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의 시기인데, 이 시기 동안 세계의 네 지역에서 인류의 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전통이 탄생했지요.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이 그것입니다. 축의 시대는 역사 가운데 지적, 심리적, 철학적, 종교적 변화가 가장 생산적으로 이루어졌던 때로 꼽힙니다. 아직 인류는 이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지 못했다고 하지요. 이 시대에 발전한 전통들은 모두 인간 의식의 한계를 밀고 나아갔으며, 인간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초월적 차원을 발견했습니다.

 

- 신들의 어머니 가이아

네 지역 가운데 그리스 지역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두 힘이 있었다고 합니다. ‘카오스’(혼돈)와 ‘가이아’(땅)입니다. 이들은 너무 적대적이라 함께 자식을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각자 후손을 생산합니다. 가이아는 천신 ‘우라노스(하늘)’를 생산하고 바다, 강, 언덕, 산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어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동침해 가이아는 아들 여섯과 딸 여섯을 낳았는데, 이들이 신들의 첫 종족인 타이탄들입니다.

우라노스는 자식을 싫어해 태어난 열둘 모두 가이아의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게 하지요. 이에 가이아는 괴로워하여 자식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막내아들 ‘크로노스’가 용기를 냅니다. 크로노스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웅크린 채 낫을 들고 우라노스가 가이아와 동침할 때,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잘라 땅에 던져버리고 자신이 신들의 주인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 형제와 자매를 땅 깊은 곳에 풀어주어, 그들은 서로 짝을 지어 타이탄 2세대를 생산합니다. 이들 중 하늘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아틀라스,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프로메테우스 등이 속하지요.

크로노스는 아버지와 똑같이 압제자가 됩니다. 누이 레아와 결혼하여 자식을 다섯 낳았는데, 이들이 신들의 제2 종족을 이룹니다. 헤스티아(성스러운 화로의 수호자), 데메테르(곡식의 여신), 헤라(결혼의 수호자), 하데스(지하 세계의 주인), 포세이돈(바다의 신)이 바로 그들입니다. 크로노스는 자식 중 하나가 자기를 밀어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아기들이 태어나자마자 삼켜버립니다. 이에 레아는 여섯 번째 자식을 임신하자 어머니 가이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가이아는 제우스가 태어나자 크레타섬에 감추어줍니다. 제우스는 성장하여 아버지에게 형제와 누이들을 토해내게 하고 왕이 됩니다. 크로노스는 자기 자리를 되찾기 위해 다른 타이탄들과 함께 10년 동안 올림포스의 신들과 전쟁을 벌이지요. 마침내 제우스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아버지와 그를 도운 타이탄들을 땅 깊은 곳에 있는 어둡고 무시무시한 곳 타르타로스에 가두지요. 이로써 신들의 세계는 평화를 찾게 됩니다.

 

- 혼돈의 힘 카오스

한편 태초에 존재했던 또 하나의 힘 카오스는 그 나름으로 무시무시한 자식을 낳는데, ‘에레보스’(땅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어두운 장소)와 ‘밤’입니다. 밤은 딸들을 한 무리 낳는데, 여기에는 운명들(모이라이), 죽음의 영혼들(케레스), 세 명의 복수의 신(에리니에스) 등이 포함됩니다.

땅 깊은 곳에 사는 이 지하의 신들이 암흑시대 동안 그리스 종교를 지배합니다. 기원전 9세기에 사람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올림포스의 신들이 아니라 이 지하의 신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라노스, 크로노스, 제우스가 모두 끔찍한 가족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지하의 신들은 말하자면 올림포스 신들의 그림자를 표현한 것이지요. 피해자가 자신을 공격한 자를 저주하고 큰소리로 복수를 외치자마자 복수의 신 에리니에스가 풀려나와 들개 떼처럼 범법자를 사냥하고, 결국 범법자는 폭력적이고 끔찍한 죽음으로 자신의 죄를 씻게 됩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희생으로 죽어 그 행위를 정화하기 전에는 독기(미아스마)가 공동체에 전염병과 재앙에 시달리게 만듭니다. 방출된 미아스마가 제거될 때까지 에리니에스는 세상 끝까지 추격합니다.

 

- 헤라 축제

결혼의 여신 헤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살의에 찬 잔혹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헤라 신앙에는 죄책감, 공포, 깊은 불안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매년 헤라 축제 전날 밤이면 헤라의 상(형체 없는 판자)이 신전에서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헤라를 찾아 나서지요. 사람들은 헤라의 상을 찾아 정화한 다음 다시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버드나무 가지로 묶습니다. 헤라는 생명의 어머니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입니다. 따라서 헤라가 사라진다는 것은 자연 질서 전체에 대한 위협입니다. 이런 제의들은 깊은 상실감을 경험하지 않고는 생명과 환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계절의 변화

데메테르는 제우스에게 페르세포네라는 아름다운 딸을 낳았는데, 제우스는 딸을 지하 세계의 주인인 하데스가 납치하도록 도와줍니다. 분노와 슬픔에 제정신이 아닌 데메테르는 올림포스를 떠나, 노파로 변장하고 지상에서 살면서 딸을 찾아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지요. 곡식과 다산의 신인 그녀가 사라지자, 세상은 황폐한 사막이 됩니다. 곡식은 자라지 않고, 사람들은 굶어 죽게 되지요. 결국, 제우스의 중재로 페르세포네가 지하에서 돌아오게 되지만, 지하의 석류 씨앗을 먹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지하 세계에 머물러야 했지요. 페르세포네가 데메테르와 다시 만나면 세상은 꽃을 피우지만, 겨울에 지하에 있는 동안에는 땅은 죽은 것처럼 되지요.

이렇게 계절의 변화를 신화를 통해 해석하는 고대인들의 통찰이 놀랍습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유치하고 우습게 보일 수 있지만, 세상의 변화에 대해 너무나 근사하고 멋진 신화의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는 탁월하고 낭만적인 해석이 너무 훌륭하지 않은가요. 아울러 삶과 죽음이 분리할 수 없이 밀접하게 얽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이룬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으며, 죽음, 해체, 적대가 언제나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삶 속에서 공포와 직면할 것을 강조했고 그런 뒤에야 비로소 안전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믿었습니다. 고난을 부정하지 않고 고난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라 생각한 것이지요.

 

▣ 엘리야! 유일신을 선언하다!

- 다신의 세계

기원전 9세기 말 북부 왕국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서 강국이 됩니다. 오므리 왕은 사마리아에 멋진 새 수도를 건설하고 커다란 왕실 성채도 덧붙입니다. 그의 아들 아합은 웅장한 상아 궁을 짓고, 페니키아, 키프로스, 그리스와 교역로를 확립하지요.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도 합니다. 기원전 9세기에, 아합의 결혼은 정치적 대성공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이 지역과 통합을 이룩하고 다마스쿠스, 페니키아, 모아브(모압) 등과 대립하면서 버티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기에, 아합이 이방의 공주와 결혼한 일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 또한, 외국의 공주들과 외교적 결혼을 하고 왕실 신앙에 그들의 신들을 포함하였고 예루살렘 바깥 언덕에 그 신들을 위한 신전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아합은 배교자가 아니지요. 그는 정기적으로 여호와의 예언자들에게 자문을 얻으면서도 동시에 아내의 바알 숭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민 대다수는 여호와 외에도 다른 현지 신들을 섬겼으며, 바알 숭배는 기원전 6세기까지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전쟁의 신이었습니다. 그는 농업이나 다산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따라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풍년을 보장받으려고 당연히 바알의 제의를 거행합니다. 바알은 땅을 비옥하게 하는 신이었기 때문이지요.

 

- 엘리야의 등장

엘리야의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배타적인 여호와 숭배를 고집한 첫 예언자로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고대 중동 신학에서 각 민족은 하나의 신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신성한 자였지요. 케모시(그모스)는 모아브의 신성한 자였고, 밀콤(밀곰)은 암몬의 신성한 자였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스라엘의 신이 아니기에 페니키아에 머물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바알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심한 가뭄에 시달리자 엘리야는 기회가 왔다고 보고, 이세벨의 사제 450명에게 카르멜(갈멜) 산에서 시합을 하자고 도전합니다. 마침내 엘리야가 올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황소와 제단을 다 삼켜버립니다.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땅에 엎드렸지요. 이로써 여호와가 그들의 신임을 증명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근처 골짜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죽이라 명령하고 카르멜 산으로 올라가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가뭄을 끝내주기를 기도합니다. 그러자 비가 억수로 퍼붓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가 바알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찬탈하여, 전쟁만이 아니라 땅을 비옥하게 유지하는 데도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지요.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유일신을 섬길 것을 제안하여 전통 종교에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킵니다. 바알을 무시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하고 귀중한 종교적 자원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바알 신앙을 통하여 세계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아지고, 밭이 비옥해지고, 불모나 기근과 싸우는 허리라 휠 것 같은 투쟁에 의미를 부여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여호와, 다산 분야에서는 전혀 명성이 없는 여호와만 믿으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 엘리야의 신인식과 경험

카르멜 산에서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 증명해 냈으나, 자신의 신학, 신인식, 이해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엄청난 저항이 뒤따릅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마저 느낍니다. 그리고 도망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떠나 시나이산(북 왕국 사람들은 호렙산이라 불렀다)에 있는 여호와의 신전으로 피신합니다. 산의 바위틈에 숨어 신의 계시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과거의 신성한 전사 여호와는 마침내 바알처럼 자연의 격변 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여호와가 다가오면 엄청난 바람이 불고 산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며 나무가 시들고, 강물이 요동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강한 용사,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는 전사로서의 여호와의 등장 모습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전사 여호와의 모습이지요.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신성입니다. 신의 모습입니다. 신인식, 신경험입니다. 이것은 감추어진 신성입니다. 이제 더는 자연의 격렬한 힘이 아니라, 소리의 가냘픈 속삭임 속에서, 작은 산들바람의 느껴질 듯 말 듯, 그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서, 소리 내는 침묵이라는 역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월의 순간입니다. 여호와는 자연 세계에 내재한 신성을 드러내는 대신 자연을 초월하는 다른 존재로 인식됩니다. 엘리야는 겉옷 자락에 덮인 채 동굴 밖에 서서 여호와가 아합의 후계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를 제외하면 모두 죽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 새로운 신인식의 탄생, 새로운 신앙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입니다.

 

▣ 나가는 말

- 바알에 입맞추다

바알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 바알에 입맞춘다는 것은 ‘다신성의 세계’에 산다는 것입니다. 바알은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신들을 섬긴다는 것은 실상 신들이 아니라 종교를 빌미로 인간의 이익과 욕심을 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필요에 따라 여러 신이 존재해야 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신인식, 신경험, 무한의 이익과 욕심을 추구하는 삶과 세계 속에서 엘리야는 다른 믿음, 탐욕과 증오, 자기중심주의를 초월하는 새로운 신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신이 아니라 오로지 일신. 욕망의 추구가 아니라 욕망의 초월.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 살아내는 삶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의 신인식

시편 82편에서 하나님은 신들을 모아놓고, “너희가 언제까지 불공평한 재판을 하며, 언제까지 악인들을 편들려 하는가?” 질책합니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며, 악인의 손에서 구해주어라.” 명령합니다. 세상의 거짓된 신들을 심판합니다. 그 신들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 헛된 것들이기에 악인의 편에, 불의한 자의 편에 서 있는 우상들이라는 것이지요. 진정한 신은, 진정한 믿음은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넘어, 자신을 초월하여 세상의 어두운 곳, 약한 자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 진정한 신, 진정한 믿음이라는 지적 아닐까요.

우리는 어떤 신을 믿고 있을까요. 어떤 신인식, 어떤 신경험을 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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