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 바다
제가 바다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 3학년 즈음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물, 밀려오는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압도적인 크기… 처음 본 바다는 정말 엄청나더군요. 가뜩이나 물에 대한 공포가 있던 저에게 바다는 공포였고 두려움이었고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 엄청난 힘과 변덕스러운, 감히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존재, 모든 것을 압도하고 공포로 몰아넣는 무시무시한 혼돈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이성과 과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기에 그 공포는 한층 더했을 것입니다. 신비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간직한 신과 같은 존재였을 테지요.
- 노아의 홍수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의 홍수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지구 전체를 뒤덮는 홍수 사건이 실재했을까. 방주는 정말 존재할까. 방주에 모든 생명체를 수용할 수 있을까…
현대에 와서는 홍수 사건이 실재하지 않았음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 흔하게 전해져 오던 홍수설화에 빗대어 불의한 이들에 대해 신이 내리는 재앙과 의로운 자들의 생존으로 다시 시작되는 역사를 설명하기 위한 성경의 이야기 방식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겠지요. 홍수 이야기는 옛 중동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이야기입니다. 홍수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 서사시, 수메르인들의 지우시드루, 헬라인의 듀칼리온, 힌두인들의 마누 등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성경 저자들은 그런 홍수 이야기를 이용하여, 홍수로 말미암아 인류가 원초적인 혼돈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상징적인 뜻을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 바빌론의 창조설화 : 성경의 창조
- 에누마 엘리시
바벨론 문명의 창조설화 에누마 엘리시에 따르면, 땅 아래의 신선한 물인 압수(Apsu)와 대양의 소금기 어린 물인 티아마트(Tiamat)가 뒤엉켜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열등한 신들이 창조됩니다. 이 신들이 너무 많아지자, 압수 신은 이 신들을 전멸시킬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에아’신이 이것을 알고, 압수 신을 최면을 걸어 죽이고 신들의 왕이 되지요. 그러나 압수 신의 아내였던 티아마트가 ‘킹구’라고 하는 신을 사령관으로 삼아 전쟁을 벌입니다. 전세가 위태로워지자, 에아신의 아들인 “마르둑”이 등장해 킹구를 격파하고 신들의 왕에 등극합니다. 우주의 왕이자 최고 신의 지위에 오른 것이지요.
왕이 된 마르둑은 땅과 바다를 나누어 바닷물이 덮쳐 그들의 승리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정하고 지킵니다. 원시바다를 상징하는 티아마트가 땅과 바다로 갈라지게 된 것이지요. 또한, 마르둑은 킹구의 몸을 잘라 다른 여러 노동자 신들의 힘든 일을 대신하게 하려고 신들의 노예로 인류를 만듭니다. 전쟁의 승리와 인간 창조에 감사한 신들이 마르둑의 안식을 위해 성전을 지어 바칩니다. 그리고 마르둑은 이 에사길라 성전에서 안식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신화가 끝나지요.
- 성서의 창조와 노아 홍수
성경의 저자들은 바로 이러한 신화들의 영향을 받아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고대의 문화에 성경이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성경이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들을 성서적 관점으로 새롭게 재창조 혹은 재해석했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성경의 창조 사건은 “원시 바다”에 잠겨 있는 땅을 건져내신, 구원해 내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창조는 원시 바다 아래 잠겨 있는 땅, 그래서 어떤 땅 위의 피조물도 살지 못하던 공허한 땅을 바닷물 가운데서 분리해 내고 그 위에 온갖 종류의 생명체로 충만하게 한 놀라운 생명의 창조 사건, 구원사건이라는 것이지요. 물과 땅이 뒤엉켜 있던 창조 이전의 혼돈은 이제 사라졌다. 창조 사건은 땅의 구원사건이라는 선포입니다.
고대인들은, 고대의 히브리인들은 바다를 땅을 뒤덮는 혼돈과 창조 질서의 반역 세력의 근거지로 간주했습니다. 바다는 혼돈과 무질서, 죽음, 고통, 심연의 장소인 것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는 땅과 그 위에 사는 인간과 생명체에 대한 심판으로서 땅을 원시 바다 아래로 침수시키는 사건입니다. 결국,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은 하나님 자신의 창조 질서를 스스로 무효로 만든 조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참을 수 없는 진노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통해서 혼돈과 혼란의 세계에 선과 질서를 확립하셨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람 아담으로부터 세계는 점점 타락해 다시금 혼돈과 혼란, 악과 죽음의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노아라고 하는 새로운 인류를 통해 또다시 새로운 창조 질서를 세우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역사성을 묻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지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노아 사건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불의한 세계 / 인간
- 홍수는 무엇인가?
물은 혼돈을 의미합니다. 홍수 사건은 홍수로 인해 인류가 원초적인 혼돈의 세계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질서와 규범이 없는 세계, 정의와 평화가 사라진 세계, 그 어떤 존엄과 존중이 사라진 세계,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는 세계와 삶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일지. 그것이야말로 정말 지옥, 고통의 바다와 같은 삶이 아닐까요.
지금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홍수는 무엇일까요. 이 홍수는 사람과 국가의 이기주의와 교만이 낳는 재앙과 같은 사건들, 자연 및 인간세계를 혼돈으로 몰아넣는 지독한 형태의 사건과 사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깨뜨릴 때, 그 결과는 창조된 세계 전체를 허무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광을 찾는 자들,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자기 출세만 찾는 자들이 역사 속에 전쟁, 굶주림, 질병 등과 같은 숱한 재앙을 불러들여 무수한 사람들을 죽게 만듭니다. 홍수는 그런 역사상의 커다란 재앙들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그런 재앙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르지 않고 자기네 뜻과 계획을 따르면서 제멋대로 놀아날 때 들이닥칠 비극적인 운명을 보여 줍니다.
- 방주는 무엇인가?
혼돈의 세계, 죽음과 고통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마치 나일강의 거친 물결을 바구니 안에서 떠내려가던 아기 모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위태롭기 짝이 없지만, 아기 모세는 안전하고 평온한 잠을 잡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좇아서, 이웃의 삶과 세계와 자신의 삶마저 파괴하는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을 파멸로, 혼돈과 무질서,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탐욕입니다. (최근에 시설에서 아이를 대하면서 정말 종말이 온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주 사건에서 놀라운 것은 생명의 역사,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정의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류의 역사를 이끄는 동력은 기술이나 능력, 과학, 정치 등이 아니라, 인간의 선한 의지, 생명을 아끼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놀라운 성경의 통찰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흥망성쇠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라, 선한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정의로운 사람들은 재앙을 가려낼 줄 알고 살아남아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태도를 치할 줄 압니다. 그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역사가 완전하게 무너지고 단절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은 소수의 정의로운 사람들을 통해서라는 말입니다.
대제국 바빌로니아 시대를 이방의 땅에서 정처 없이 헤매는 유대민족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혼란과 혼돈의 시대, 거대한 혼돈의 바닷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혹은 지켜내기 위한 그들의 필사적인 분투를 상징하고 있는 지도요. 그런 세계 속에서도 자신들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방주는 단순한 선박이 아니라 죄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는 이들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히브리 정경 시대의 신학적 이해로 보아야 합니다.
▣ 믿음이란 무엇인가
- 120년 방주를 만들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오늘 우리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그때보단 좀 나은가요? “마음으로 생각하는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아셨다는 표현이 꼭 맞는 세계가 아닌가요? 우리들의 마음을 가득 채운 계획들은 항상 개인의 성공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지 않던가요? 정말이지 무서운 세상입니다. 두려운 시대입니다. 악이 가득한 세계입니다. 부끄럽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인 것은 저의 내면도 꼭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정말 어찌해야 좋을까요.…
그런데 노아는 그 욕심에 가득한 세계 한가운데에서 방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도 바닷가나 강가에서가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모든 사람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 자신의 일을 해냅니다. 노아의 망치 소리는 120년이나 계속됩니다. 그 망치 소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는 외침입니다. 돌이키라는 선언입니다. 신의 안타까운 기다림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애달픈 사랑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120년을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견디며 방주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기심을 좇아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고, 더 높은 곳만을 바라볼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소유보다 존재하려 하고, 밟고 넘어가기보다 일으켜 함께 가려 하고, 선한 사람으로 살려는 노력과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았고 그를 경외하였기에 그가 하신 말씀을 당연히 믿고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늘 자신의 마음속에 모시고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이기도 합니다. 자기 혼자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불의와 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것을 구원하고자, 살리고자, 아름답게 하고자 애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의인입니다. 의인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희생해서라도 타인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대의 세상을 구원코자 했으니 그가 ‘완전한 자’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세계의 기준에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도 실수하고 아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신의 명령을 따릅니다. 신의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 “휴식”이라는 뜻입니다. 멸망과 혼돈과 죽음의 세계에서 노아는 신의 은혜를 의지해 위로와 안식을 얻습니다. 그는 새로운 인류의 희망이 됩니다. 이 절망의 세계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노아를 통해 위로를 얻습니다. 우리가 완전해서도 아니요, 선하게 살 수 있는 자신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의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 나가는 말
- 고대 신화 : 성경의 해석
고대의 다양한 창조설화와 성경의 이야기가 다른 것은 원조가 어디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의 위대함은 그 시대를 지배하던 다양한 이야기들, 시대정신들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 재창조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 만들어냈다는 것이나, 인간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멸종시켜야 하겠다는 등의 홍수에 대한 이해를 성경은 인간은 그렇게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인간은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모습을 따라서 손으로 빗으셨다고 해석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천명합니다. 인간 삶의 가치를 격상시킵니다. 신들의 노예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신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인간을 위해 낙원을 준비하시는 신을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인간 세상을 파멸시키는 힘, 이유가 신들의 장난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한 의지가 진정한 역사의 존폐의 기준이 된다는 엄청난 통찰은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인간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이토록 높이 평가한 적이 있었던가요.
- 방주를 지으라
하나님은 멸망하는 세계를 안타깝게 여기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마른 날에 산 위에서 배를 지으라는 명령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황당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방주야말로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노아는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물에 잠기게 될 것을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에게 방주를 짓는 일은 고역이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가족과 이웃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 사명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계실까요? 노아에게 명령했던 생명의 방주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당신에게 무엇을 준비하라 명령하실까요? 악의 세계, 불의의 세계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의 방주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작은 실천이 이 역사를 지탱하고 이어가게 하는 놀라운 일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을 향한 노아의 망치 소리가 될 것입니다.
- 방주의 목적
우리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는 것은, 신의 뜻을 향해 희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바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방주는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방주는 노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방주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방주는 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기다리심이요, 하나님의 애달픈 은혜입니다. 지금도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호소입니다.
방주를 짓는 삶이 되시길, 그 삶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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