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bec483ba-d204-47d4-afbd-8005746530c3

사순절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사 50:4-9)

여호와는 가까이 계시다

이사야 50:4-9, 종려주일, 3월24일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편안하게 살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벌이는 모든 노력은 그런 삶을 목표로 합니다. 특히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들이 큰 어려움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 다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해도 불행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간혹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잘 했고, 자녀들도 모두 믿음으로 잘 성장해서 이제는 여유 있게 노후를 보낼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술도 가능하지 않은 암이 발견되어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또는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황혼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만이 아닙니다. 세상살이에서 의로운 일을 하다가, 또는 불의한 일에 동참하지 않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신앙적인 이유로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고난이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신앙이 깊어졌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고난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오늘도 기독교인이 무조건 고난을 당해야만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고난이 삶의 목적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고난과 불행을 피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고난을 피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우리 주변에 없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많으면 믿음 생활을 잘해서 그렇다고 하고, 고난이 생기면 믿음 생활을 잘못 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은 제거하고 좋은 일만 허락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이런 태도는 신앙의 본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피할 수 있는 노하우를 찾는 게 아니라 고난을 대면하는 영적 능력입니다. 고난을 피하는 게 아니라 맞서는 겁니다.

 

종의 노래

오늘 우리가 제2 독서로 읽은 사 50:4-9절은 고난 받는 ‘종의 노래’ 모음에 속합니다. 6절 말씀은 고난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구타, 수염 뽑기, 침 뱉기는 가장 모욕적인 행위입니다. 청소년들의 ‘왕따’ 현상과 비슷합니다. 이런 모욕을 견디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사회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당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반복적으로 모욕적인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입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이사야가 이런 치욕적인 모욕을 당한 이유는 그의 잘못으로 인한 게 아닙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직무로 인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4절에 따르면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학자들의 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전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이사야가 치욕을 당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다른 말을 전하는 선지자를 싫어합니다.


이사야와 비슷한 일을 당한 선지자가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주 탄원기도를 드렸습니다. 렘 18:20절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적대자들이 예레미야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습니다. 실제로 그는 감옥에 갇혀서 죽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 렘 20: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위협을 직시하지 못하고 막연한 낙관론에 빠져 있던 당시의 선지자들과 귀족들과 민중들을 향해서 조국의 멸망을 외쳤습니다. 그런 선포로 인해서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했습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한 일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이런 길을 걸었습니다. 그게 말씀 선포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와 이유를 찾은 선지자들의 운명입니다. 예레미야와 제2 이사야는 비슷한 운명을 살았던 선지자들입니다.


이사야는 자기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고난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을 완전히 맡겼습니다. 때리는 이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이에게 뺨을 맡기고, 침 뱉는 이 앞에서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모욕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포자기인가요? 너무 충격적이어서 제 정신을 잃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7절에 따르면 그는 이런 일로 인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게 가능한 걸까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경험적으로 잘 아실 겁니다. 우리는 조금만 기분 나쁜 말을 들어도 성질을 냅니다.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사생결단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남에게만이 아니라 가족에게도 비슷합니다. 신경이 늘 날카롭습니다. 선한 일에, 거룩한 일에, 주님의 일에 날카로우면 좋겠지만 대개는 자기의 이해타산으로 날카롭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이사야는 천사가 아닙니다. 화가 날 때도 있었고, 분해할 때도 있었겠지요. 억울한 미움을 받았는데 왜 그렇게 않았겠습니까. 자신을 운명에 맡겼다는 본문의 묘사는 매순간이 아니라 전체적인 방향에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흔들리다가도 결국은 이런 방향으로 나가는 겁니다. 이 진술은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고 싶다는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단숨에 고도의 영적 경지를 이루는 게 아니라 시나브로 그분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이사야의 이 고백에 그런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운명을 잘 버텨낼 수 있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의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이

이사야의 영적 구도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격과 의지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험을 토대로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선지자와 일반 선생들과의 차이입니다. 선지자들은 세상의 가치 있는 가르침을 전하는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경험에 매달렸습니다. 그들이 주변 상황에 좌고우면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도 하나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또 9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가 누구냐?” 자기의 적대자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적대자에 대한 말씀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여호와께서 적대자들을 파멸시키고 이사야를 지켜주신다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이사야를 비난하고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적대자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은 기세가 등등합니다. 선처럼 행세합니다. 권력과 돈과 명예를 다 차지할 듯이 보입니다. 이사야가 죽을 때까지도 적대자들은 기세가 등등했을 겁니다. 이사야가 그들을 가리켜 옷처럼 해어진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다 옷처럼 해집니다. 좀에 먹힙니다. 아무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적대자들을 향한 이사야의 경고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 또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누가 이기고 지느냐, 누가 잘나고 못났냐 하는 차원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잘 되도 모두 옷처럼 해지고, 좀에 먹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에 집중합니다. 하나님만이 옷처럼 해지거나 좀에 먹히는 운명을 벗어나는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적대자들의 모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인식과 경험이 없으면 세상 방식으로 계속 싸우면서 인생을 허비하고 말 겁니다. 애처로울 정도로 애 쓰고 수고 했는데, 손에 남은 것은 해지고 좀이 먹은 옷입니다. 이것을 얻으려고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는 결코 고난을 직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머물면 끊임없이 불평하고 뭔가 더 좋은 것을 얻어 보려고 몸부림칩니다. 적대자들과 얼굴 붉히며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태도로 세상을 살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으시는지요.


이사야는 다른 차원에서 삶을 이해했습니다. 사람들과의 다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8절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불인정, 모욕, 왕따 등을 가소롭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런 설명을 들으면 그럴듯하긴 한데 몸에 와 닿지 않는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여호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지금 무얼 경험한 것일까요? 그가 혹시 광신자나 사이비 교주들처럼 헛것을 본 것은 아닐까요?


가까이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을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감각의 대상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감각 안에 있는 것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공기도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게 분명하듯이 하나님도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게 분명합니다. 그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분의 통치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공기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움직임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봄에 만물이 새로워지는 것을 보고 그걸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도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평화의 힘을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각각의 경험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을 생명의 능력으로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예수의 수난

앞에서 저는 본문이 고난당하는 종의 노래에 속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노래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고난당하는 종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운명으로 닥친 십자가의 죽음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이 묘사하고 있는 그대로의 태도였습니다. 죄가 없는 자가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할 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그대로 내어주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여기에는 한 가지 대답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순종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험은 이사야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기에 고난을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사야의 이런 경험에서 영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을 겁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들에게서 배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선지자들의 영성을 배제하고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사야와 비슷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경험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사건이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믿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환영한 사건을 기리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능욕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고독의 끝자락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자리입니다. 아니 하나님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자리였습니다. 거기서 인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습니다. 그것은 곧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로부터 삼일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똑같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이사야 50:4-9)
mms://61.111.3.15/pwkvod/dawp/dawp_0324.mp3

설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