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알리라!
에스겔 37:1-14,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11년 4월10일
에스겔의 환상
구약의 에스겔은 에스겔이라는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기원전 587년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기 전부터 시작해서 함락 직후 10년 까지 활동한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유다가 몰락해가는 역사적 현장에 있었습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어떻게 몸부림을 쳤는지,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서 어떻게 줄다리기 외교정책을 펼쳤는지, 그 과정에서 유다 왕들이 얼마나 무모하거나 무기력했는지를 목격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해서 도시 전체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과정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비참한 운명 앞에서 신앙의 근본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의 몰락을 방관하시는 걸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이유를 뭐라고 해명해야만 할까요? 그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로 마음고생이 심하던 에스겔은 이상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설교 본문인 겔 37:1-14절입니다.
1-10절은 환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이고, 11-14절은 환상의 의미에 대한 해설입니다. 에스겔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영을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골짜기의 바짝 마른 뼈들이 산을 이룬 모습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장면입니다. 마치 쓰나미로 인해서 수천수만 명이 떼죽음을 당한 일본의 후쿠시마 지역과 비슷합니다. 에스겔은 뼈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외치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주 여호와께서 ...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 너희가 살아나리라.” 이런 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공동묘지나 납골당에 가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외친다면 미쳤다는 말을 들을 겁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 명령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뼈들이 서로 부딪치며 연결되는 소리가 났습니다. 해골과 목뼈, 척추와 팔다리뼈가 우두둑 거리며 제자리를 찾았다는 겁니다. 오래된 무덤을 열었을 때 발견할 수 있는 뼈만 남은 사람의 형체를 머리에 그려보십시오.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씌어졌습니다. 그러나 생기는 없었습니다. 아직 숨을 쉬지 못했습니다. 에스겔은 다시 소리를 듣습니다.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은 그 명령을 따랐습니다. 골짜기의 모든 뼈들이 사람으로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룰 정도라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없겠지요.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일어나서도 안 됩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은 세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원하기만 한다면 이보다 더 놀라운 일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능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의 생명 원리를 어떤 필요에 따라서 일시적으로 파괴하지 않습니다. 물을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게 한다거나 죽어서 이미 썩은 사람의 몸을 다시 피가 돌게 하는 방식으로 살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살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이 터져 폭탄 세례를 받으면 온몸이 산산 조각이 납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에 폭탄 파편을 부드러운 솜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와 생기 이야기는 어떤 영적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환상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이런 방식의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그것을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다니엘, 이사야, 에스겔입니다. 이사야는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살고, 표범과 어린 염소가 함께 노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이런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메시아가 직접 다스리는 평화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도 똑같습니다. 에스겔은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을 이런 환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친절하게 가르쳐줍니다. 뼈들은 이스라엘 온 민족입니다. 뼈가 말랐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합니다.(37:11b) 에스겔은 마른 뼈에게 외쳤던 말을 다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외쳐야만 했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12절) 골짜기의 마른 뼈가 서로 연결되고 살과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가 군대를 이루었듯이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죽었던 것과 같았던 이스라엘이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사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존적인 차원에서 어떤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마른 뼈와 같은 상태에, 바벨론 포로와 같은 상황에 빠져듭니다. 원인은 둘째 치고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납니다.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실연을 당할 수도 있고, 큰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주변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한민족의 역사에도 그런 일은 많았습니다. 일제식민 체제와 지금의 분단체제는 그런 상황에 가깝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마른 뼈와 비슷한 상황에 빠져 있는 이들을 하나님이 살려주신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를 영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풍요롭고 원만하더라도 영적으로 마른 뼈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황폐한 삶을 말합니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며칠 전에 수재들만 모인다는 카이스트 대학교 학생이 또 자살을 했습니다. 금년 들어서 4명이 자살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징벌적 등록금 제도로 대표되는 무한 경쟁시스템이 한몫 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학교였는데 지금의 총장이 부임한 뒤로 학습의 효율성을 위해서 학점이 낮은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내게 하는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오늘의 시대는 겉으로는 아주 역동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른 뼈와 같은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6절과 12절이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마지막 구절인 14절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정리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본문은 바로 그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마른 뼈와 해방 사건은 그것 자체로 궁극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역사에는 계속해서 그런 일들이 반복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50년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큰 희망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국가 재건을 위해서 모든 힘을 쏟았지만 희망은 잠시 뿐이고 결국은 민족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은 반복해서 수탈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과 파괴가 반복되었습니다. 에스겔에게 중요한 것은, 특히 그의 신탁을 읽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본문이 전하는 그 사건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여호와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알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여호와라는 사실을 아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게 쉬웠다면 선지자가 그걸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배웁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고, 모세를 선택하셔서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일어난 매우 놀라운 사건들에 대해서 조상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우상을 따랐습니다. 사사시대에는 그것이 반복되었고, 왕정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고, 바벨론포로 귀환 이후에도 사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말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고, 따라서 여호와와 우상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방식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질그릇이 토기장이의 뜻과 행위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우상이 무엇인지 구분해낼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들은 불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타종교를 우상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우상을 타파하겠다는 생각으로 땅밟기를 시도합니다. 또는 어떤 이들은 세속적인 것들을 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걸 교회 중심으로만 생각합니다. 부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는 틀렸습니다. 그건 영적인 사태를 잘 모르는 데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여호와와 우상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예컨대 개교회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한국교회는 우상을 숭배하는 겁니다.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 어떤 교회는 기초 생활도 불가능한 상태이고, 어떤 교회는 돈이 넘쳐난다면 분명히 우상의 기운에 사로잡힌 겁니다.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교회와 가장 큰 교회가 다 대한민국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를 알려주는 지표입니다. 다시 거론하기도 싫지만, 일전에 한국사회에 크게 알려진 한기총의 돈 선거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속으로는 우상에 철저하게 기울어져 있으면서 겉으로만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그럴듯한 포즈를 취할 뿐입니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말씀에 기대해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 도대체 뭘 보고 알 수 있을까요? 여호와가 행하신 일이 그 대답입니다. 여호와의 일을 마른 뼈의 되살아남과 같은 이스라엘 해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별로 큰 의미가 없다고 앞에서 저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면 분명한 답이 나옵니다. 핵심은 ‘살리는 능력’입니다. 여호와는 살리는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와만이 살리는 능력, 즉 생명의 근원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의 힘을 느끼는 곳에, 바로 그 순간에 여호와가 일하십니다. 생명의 힘을 사랑의 힘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거꾸로 탐욕의 기운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생명과 사랑의 능력은 모든 것을 살립니다. 일시적으로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날지 모르지만, 마치 폭풍이나 장마나 화산처럼, 결국은 사람과 세상을 살립니다. 탐욕의 능력은 매혹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를 부자가 되게 할 것처럼 보여도 결국 생명을 파괴합니다. 이 둘을 구별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성령과 악령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악령도 역동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막 13:22 참조)
우리는 생명의 원천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에스겔이 경험한 그 여호와의 능력은 예수님의 운명과 일치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생명의 근원이며, 여호와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구약시대가 아니라 신약시대에 살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모호했던 여호와의 능력을, 즉 생명의 능력을 예수님의 운명에서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믿음이 막연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것보다는 자신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더 실감이 나시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더 집중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생명의 능력을 분명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생명의 순리를 따라야한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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