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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여호와를 찬양하라!

20:7-13, 성령강림후 둘째 주일, 2014622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이지메, 또는 왕따라고 일컬어지는 집단 따돌림 현상은 청소년들에게 자주 일어나지만 사회 전반에서도 간혹 문제가 됩니다. 집단 따돌림을 행하는 주체들은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겠지만 그렇게 당하는 대상은 극심한 고통에 빠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당시 유대교와 로마 권력으로부터 마녀 사냥 당하듯이 집단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서도 이런 일을 당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렘 20:10절에서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립니다. ‘저자야말로 사면초가다. 고발하자, 고발하자.’ 저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모두 제가 망하기를 바라 모의합니다. ‘걸어 넘어뜨리고 잡아 족치자. 앙갚음을 하자.’

 

표현이 적나라합니다. 여기저기서 고소, 고발이 들어옵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들도 예레미야 선지자가 망하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편들어 주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정도면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겁니다. 여기서 사면초가라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이 단어는 렘 20:3b에 나오는 마골-밋사빕이라는 히브리어의 번역입니다. 당시 예레미야에게 따라다니던 별명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마골-밋사빕, 즉 당신들은 사방으로부터 두려운 일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보면 저기 늙은 마골-밋사빕이 지나간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왜 반대자들만이 아니라 친구들로부터도 외면 받는 처지가 되었을까요? 그 내용이 오늘 설교 본문 앞인 렘 19장에 소상하게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질그릇 하나를 들고 예루살렘 주민들 앞에서 외쳤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고 오히려 우상인 바알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파멸에 이르게 하신다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질그릇을 깨뜨리는 퍼포먼스 보여주면서 예루살렘이 이처럼 부숴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을 들은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체포하여 때리고 목에 칼을 채운 뒤 성전의 한 독방에 가두었습니다. 당시는 바벨론 제국의 위협이 점점 드세져서 예루살렘 주민들이 불안해 할 때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불안을 더 가중시키는 발언을 한 겁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예레미야를 골치 아픈 인물로 여겼고, 당시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바스훌이 나서서 예레미야를 처리한 겁니다. 다음날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일단 풀어주었습니다. 이렇게 겁을 주었으니까 더 이상 떠들지 않을 거라고 기대한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바스훌의 기대와는 달리 다시 예루살렘이 망할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특히 바스훌을 향해서 거짓 예언을 했다고 비난하면서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들도다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영적인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7절에서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듯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거부할 수 없어 마지못해 말씀을 전했는데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8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된다.’고 토로했습니다. 상황이 이런 정도로 악화되면 대부분의 선지자들과 설교자들은 입을 다뭅니다. 말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아니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예언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예레미야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그러나 그는 그러기에는 영성이 너무 예민했으며, 영혼이 너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침묵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9절에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어떻게 보면 예레미야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신탁을 받지 않았거나, 또는 말씀에 대한 열정이 강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큰 어려움 없이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전하지 않으면 마음에 불이 붙는 것 같았고,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듣기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온갖 폭력을 가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줄기차게 전했습니다. 비방 받고 조롱 받아도 그는 말씀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예레미야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 영혼이 불타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으면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운명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신통력이 있었냐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기도를 많이 했다거나 성전 제사에 성실하게 참여했다거나, 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열정은 하나님과 상관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거짓 예언을 일삼던 바스훌도 이런 열정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의 총감독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바꿔 보면 교단 총회의 총회장이나 총무, 또는 대형교회의 담임 목사입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세련되었고 정치력도 뛰어났습니다. 성전 관리능력에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인격적으로도 썩 괜찮았을 겁니다. 가정과 세상에서도 존경을 받았겠지요. 이런 요소만으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즉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가득하다는 사실이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더 큰 잘못을 행합니다. 마치 바둑 아마추어 5급 실력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프로 9단의 바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자기 수준으로만 말하다보니 결국 꼼수에 떨어지는 거와 같습니다. 예레미야에게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른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영혼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영혼의 사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행하시는 진리와 생명에 대한 순전한 열정입니다.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잘 안 됩니다. 진리와 생명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진리와 생명에 대한 생각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 바탕에는 인간적인 욕망과 편견이 자리합니다. 예컨대 선거를 할 때도 우리 편이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보수냐, 진보냐 하는 판단에 치우칩니다. 그래서 툭 하면 종북 좌파라거나, 보수 꼴통이라고 서로 매도합니다. 보수냐 진보냐가 진리 자체는 아닙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려면 이런 편견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가정생활이나 자식교육 등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테니스도 비슷합니다. 테니스 시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볼에 대한 집중력입니다. 시합을 하다보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거나 다른 부담감에 휩쓸려서, 또는 습관적으로 볼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결국 테니스의 진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진리와 생명에 대한 집중력이 곧 영혼의 사건이며, 하나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예레미야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수호해야 한다거나, 예루살렘 주민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거나, 유대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해야 한다는 전제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그의 생명 구원, 그의 통치에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그의 영혼이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치 훌륭한 권투선수가 상대의 주먹으로 안면을 맞으면서도 두 눈을 감지 않는 것처럼 정신을 잃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갑자기 13절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사실 예레미야가 처한 상황은 이렇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말할 정도로 한가롭지 않습니다. 이미 앞에서 예레미야가 반복해서 언급한 조롱과 모욕의 순간이 끝난 게 아닙니다. 오늘 설교 본문 뒤에 나오는 렘 20:14절 이하를 따르면 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자조와 자학에 가까운 이야기를 내뱉습니다. 그는 자기 생일이 저주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고, 왜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맛보고 부끄러움으로 인생을 보내는가 하고 한탄합니다. 이 구절은 욥의 탄식(3)과 맞닿아 있습니다. 욥은 자식과 재산과 건강을 다 잃고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과감하게 외칩니다. 주변에서 이런 말을 들었으며 맛이 갔군!’ 하고 조롱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뜨거웠던 예레미야의 영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신앙의 신비를 모르는 겁니다

 

지난 2월부터 수요 모임에서 저는 칼 바르트의 책 <복음주의 신학입문>을 강독하고 있습니다. 지난 618일에는 파트 2, 8책임’(Verpflichtung)의 후반부를 읽었습니다. 거기서 바르트는 신구약성서에서 선포된 하나님 말씀의 이중성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Yes(긍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No(부정)입니다. 예스는 은혜이고, 노는 심판입니다. 예스를 빛이라고 한다면 노는 그림자입니다. 인간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노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이 노가 하나님의 예스 안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예스가 노보다 우월하고, 복음이 율법보다 우월하고, 은혜가 심판보다, 생명이 죽음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신학자는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만족한 인간입니다. 바르트의 마지막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신학자는 만족한 사람으로서 교회 공동체와 이 세상에서 이 만족을 확산시키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106).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 안에서 만족한 사람이 된다는 것과 예레미야가 말하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만족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며, 그 중심에는 기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도 나름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기도원에 들어가 앉아서 기도만 하면 모르겠지만 이전투구와 같은 세상에서는 매일 매순간이 스트레스라고 말입니다. 오늘의 세상살이가 구조적으로 각박해서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사람들도 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어렵습니다. 억울하거나 짜증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부르짖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옳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늘 웃고, 늘 만족하고, 늘 감사하게 사는 건 아닙니다. 바르트나 예레미야가 그런 현실을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겁니다. 시행착오가 반드시 발생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의 만족한 삶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으로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예레미야처럼 영혼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칠 수 있을까요? 이건 흉내를 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마음공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한 조건들이 실제로 늘어났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주로 그런 조건을 성취하는 일에 삶의 에너지를 쏟으며 살다가 죽습니다. 일희일비 하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실제로 깊이 깨달아 아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예레미야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즉 의로운 자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찬양의 이유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난한 자, 즉 의로운 자의 생명을 악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다는 말에 실감이 갑니까? 이런 일이 실제로는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의가 세상에 바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갔다고 해서 의로운 자가 구원받는 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고, 의로운 사람은 여전히 고난을 당했습니다. 악한 자들도 역시 자기의 권력에 도취해 있었습니다. 이런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레미야의 말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지금 예레미야는 사회과학적인 진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회과학은 상과 벌을 통해서 세상을 뜯어고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방식의 구원 앞에서 놀라고,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 즉 고난 받는 의로운 자의 구원을 하나님이 고유한 방식으로 완성하신 사건을 여러분은 이미 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유일하게 의로우셨던 예수님은 조롱과 멸시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은 600년이 지나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신분의 차이, 업적과 능력의 차이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방식의 구원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어느 누구도 조롱과 모욕을 당하지 않게 되었으며, 당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는 아직도 조롱과 모욕과 저주가, 집단 따돌림이 기승을 부린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종말의 차원에서, 그리고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이런 악한 현실과 시시때때로 투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로 있지 말고 저항해야 합니다. 겁이 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기독교인들의 삶입니다.  

예레미야 20:7-13
https://youtu.be/tfh27a2RG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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