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영성을 향해!
예언자 전통
오늘 본문말씀에 어떤 설명을 보태는 것은 이미 완전하게 그려진 명화 위에 덧칠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설교한다는 생각으로 이 자리에 서지 않았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다른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은 의도적으로라도 저의 역할을 줄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61편에는 더 이상 넣거나 뺄 것도 없고, 무슨 보충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복잡한 말씀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오늘 본문이 어떤 상황에서 기록된 것인가에 대해서 안내만 할 생각입니다. 이는 흡사 미술관의 안내원 같은 역할과 비슷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이사야 예언자의 영적인 호흡을 생생하게 경험하셨을 겁니다. 소위 제3 이사야라는 사람이 쓴 오늘 말씀은 남유대의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난 시기인 기원전 5세기 초반에 기록된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일제식민 통치에서 신음하며 해방의 날을 학수고대하던 신학자가 해방을 맞았다고 말입니다. 또는 난치병으로 오랫동안 병원 생활하던 사람이 이제 병원 문을 나서게 된 순간을 상상해보십시오. 노래하고 춤추고 싶지 않겠습니까? 본문은 이런 상황에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해방, 자유, 희망이라는 단어가 이런 상황을 반영합니다.
이사야의 이런 예언은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5:8-12절에 보도되어 있는 희년(禧年) 전통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희년은 안식년 전통에 그 뿌리가 있고, 안식년은 또 안식일 전통으로 소급됩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엑서더스 정신의 결과입니다. 창조와 엑서더스 모두 생명, 해방, 자유, 희망을 의미합니다. 이런 전통 줄기의 끝에 희년이 놓여 있습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인 오십 번째의 해를 희년이라고 하는데, 이때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오십 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레 25:10).
이런 희년 전통에 근거해서 이사야는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b,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야훼께서 우리를 반겨 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여라.” 이 말씀의 내용은 희년에 일어나야 할 일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은 공교롭게도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장 처음으로 읽으신 말씀이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4장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갈릴리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고향인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읽으신 예언서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예언자의 전통은 어떤 한 두 사람의 기발한 발상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출애급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받은 율법으로부터 시작해서 포로 귀환 후의 이사야에게, 그리고 이제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의 활동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도대체 예언자 전통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끌어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에 묶이지 않고 인류 전체 역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복음서 기자들이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통을 예수님의 구원 행위와 하나로 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도대체 이 예언자들의 전통이 무엇이기에 신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단 말입니까?
영의 사람들
예언자 전통은 우선 ‘영’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 야훼의 영을 내려 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레위기서에 나오는 희년 전통 역시 야훼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회당에서 읽으신 예수님도 역시 세례 받을 때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성령이 임하셨다는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령 안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이런 예언자 전통인 영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기독교 공동체는 곧 성령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만이 아니라 신약성서는 모두 성령의 활동에 대한 보도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됩니다. 신자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나 이 영과 연결된다는 것은 곧 예언자적 전통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성령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오늘 본문 1절에 기록된 “주 야훼께서 영을 내려 주셨다.”는 말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한 가지는 영의 도구화입니다. 성령을 이용해서 자기의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행위들이 곧 그것입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성령이 많다는 사람들이 점쟁이들처럼 어떤 신자들의 미래를 알아맞히는 일들을 합니다. 임신한 여교우들의 아들을 낳을 것인지, 딸을 낳을 것인지를 예언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방언과 일치하기도 합니다. 이런 건 매우 순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성령의 도구화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영을 오해하는 또 하나의 현상은 영의 극단적 관념화입니다. 물론 영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관념적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긴 하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영의 왜곡입니다. 보통 우리가 영혼 구원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만약 이 말이 인간의 육체는 아무 상관없고 오직 영적인 부분만 구원받는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을 영육이원론의 구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순전히 정신적인 어떤 것으로 여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문제는 좀 복잡하기 때문에 설교시간에 길게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령을 물질적인 것이나 육체적인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순수 심령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실히 하면 충분합니다. 성령을 흡사 귀신처럼 생각하는 그런 태도는 결코 기독교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영에 대한 오해를 간단히 설명했는데, 이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서에도 영에 대한 진술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영을 어떤 한 가지로 끊어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한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예희는 세상에 태어난 지 네 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예희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한 힘은 무엇일까요? 예희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요. 물론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난자와 정자의 결합이지만 심층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난자와 정자가 결합해서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나도록 하는 훨씬 근원적인 힘이 작용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아마 인간으로 진화해온 지난 수백만 년의 역사가 작용했을 것이며, 현재 어떤 유전자 활동이 개입했겠지요. 이게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알고 있는 기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걸 연구하면 생명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서울대학교 황 아무개 박사의 배아줄기 연구문제로 인해서 나라 전체가 시끄러워졌는데, 이런 연구로 생명이 본질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분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세상이 왜 다른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인간은 흙일뿐만 아니라 영이고, 영일뿐만 아니라 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은 곧 이 영이 흙을 통해서만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몸이 없으면 영도 없습니다. 그게 참으로 신기한 거죠. 영과 육체가 서로 다른 현상이기는 하지만 서로 결합되어야만 생명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이걸 가능하게 하는 힘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이렇게 은밀한 방식으로, 은폐의 방식으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아주 비밀스럽게 이 세상에 생명을 가득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곧 세상의 신비입니다. 그런 신비한 생명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이며, 예언자들입니다.
정의와 찬양
이스라엘에는 생명의 심층을 눈여겨보는 영적인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이사야는 역사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역사를 영적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예언입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는 이사야가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책상머리에 앉아서 어떤 초월적인 신탁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아주 신비로운 그런 하나님의 통치를 포착하려고 했습니다.
이사야의 마음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야훼 하나님의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도 우리와 똑같은 역사 안에서 살았던 인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를 초월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그 배경으로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사관이 물씬 풍기는 예언들이 모두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너희를 ‘야훼의 사제들’이라 부르고 ‘우리 하느님의 봉사자’라 불러 주리라. 너희는 다른 민족들의 재물을 먹고 그들의 보물로 단장하리라.” 이런 구절들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런 민족주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긴 했지만 무조건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정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면 언제든지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이사야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보다도 야훼 하나님의 뜻에 훨씬 더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민족을 통한 야훼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그런 통치를 전하려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본 야훼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구원통치는 오늘 본문 끝구절인 14절에 정확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주 야훼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신다.” 이 말씀을 꼼꼼하게 읽어보십시오. 예언자 전통이 분명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안에 세워진 것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편향적인 건 결코 없습니다. 예언자들의 관심은 정의로운 공동체였습니다. 이런 정의로운 공동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유효한 게 아니라 “만백성”에게 해당됩니다. 만백성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는 외치고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라고 하더라도 정의롭지 못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공동체는 곧 앞 단락에서 여러 방식으로 설명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억눌린 자들, 포로들, 슬퍼하는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기초는 곧 정의입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이 희년 전승과 연관된다는 말씀을 기억하시죠? 사회의 모든 불균형이 새롭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그 희년은 곧 정의로운 공동체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정의로운 공동체와 영성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야훼 하나님의 영을 받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사회가 되어야만 정의로울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거꾸로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통치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오늘 말씀 끝부분에서 정의와 찬양을 한 묶음으로 제시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와 하나님 찬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정의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는 말도 됩니다. 정의로움에 대한 목마름이 역사의 영성이며, 그걸 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집니다. 대림절 셋째 주일을 맞아 우리가 함께 드리는 이 예배가 여러분의 삶에서 정의로운 공동체를 향한 희망과 기다림으로 승화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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