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제자 파송 이야기
막 6:1~13, 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 2021년 7월4일
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인 오늘, 세계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lectionary)의 복음서 항목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 이야기는 예수님의 고향 방문에 관한 것(막 6:1~6a)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예상외로 배척당했다고 합니다. 둘째 이야기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는(막 6:6b~13) 것입니다. 두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주제처럼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 이야기는 둘째 이야기를 돋보이게 합니다. 예수와의 관계는 가족이냐 아니냐, 고향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데에 달린 게 아니라 예수의 소명과 파송에 결부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제자들은 예수와 혈연관계도 없고 고향이 같지 않았지만, 예수의 소명과 파송이라는 차원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 파송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유유자적 소풍을 다니듯이 세상을 구경하면서 경험하라고 보내신 게 아니라 일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일종의 선교 여행이자 노방전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소명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여 파송한 것입니다. 그 순간에 제자들의 가슴이 얼마나 벅차게 뛰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스승의 소명이 자신들에게 이어지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막 6:7~11절에 그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선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고 합니다. 고대인들은 인간 삶을 파괴하는 어떤 독자적인 세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세력이 바로 더러운 귀신입니다. 그 세력은 너무 막강해서 사람이 대처하기 어려웠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능력을 가리켜서 본문은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ἐξουσία: authority, power)”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권능을 주셨다는 말은 이런 권능의 원천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이런 권능을 받고 싶고,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권능을 느껴보셨나요? 어떻게?
8절과 9절에는 선교 여행을 준비하는 절차가 나옵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유랑 전도자로 살아야 하니 뭔가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준비해야 할 것과 준비하지 말아야 할 것이 구분됩니다. 준비할 것은 지팡이와 신과 입고 있는 옷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식, 배낭, 돈, 두 벌 옷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집을 떠나서 일정 기간 살려면 준비할 게 많다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제자라는 정체성으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살이도 이와 다를 게 없습니다.
이어서 10절과 11절에서는 선교 지역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숙소를 정해야 합니다. 일단 누구의 집에 들어가면 그 마을을 떠나기까지 한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여러 사람의 집을 오가면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너무 편리한 집만 찾아다니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11절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표현은 악을 상대하지 말라는 당시의 속담으로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파송 받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출가 유랑 수도자의 태도와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는 한 가지 목표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형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다른 이들에게 환영받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섭섭하게 대한 사람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을 필요도 없습니다. 많은 것을 준비하지 않고, 환대받는 곳에서는 기꺼이 최소한의 마땅한 대접을 받고, 환대받지 않는 곳에서는 발에 먼지를 털 듯이 미련 없이 떠나면 됩니다. 산티아고 순례에 나선 사람들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가야 할 길만 묵묵히, 그리고 흔들림 없이 갑니다.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에게서 받은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태도입니다.
오늘 세속사회에서 사는 우리가 유랑 수도자처럼 살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삶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준비할 일과 물품도 너무 많습니다. 사람도 신경 써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본질의 차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유랑 수도자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소명과 파송에 집중해서 사는 겁니다. 그런 소명과 파송 의식이 우리에게 분명하지 않으니 매 순간 많은 걸 준비하고, 사람에게 너무 신경 쓰고, 자기가 인정받는지 아닌지를 예의 주시하고, 매사에 미련을 두면서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의 사역
스승에게서 파송 받은 열두 제자들이 실제로 행한 일에 관한 보도가 12절과 13절에 나옵니다. 보도가 아주 간략하나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의 영적인 관심이, 즉 그들의 소명 의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우선 12절과 1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2천 년 전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느껴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1) 첫째는 회개 설교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회개하라 전파하고’로 번역했는데, 정확하게 보면 ‘회개하라 설교하고’로 번역해야 합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과 KJV과 루터 성경은 모두 ‘설교’(preaching)라고 말합니다. 설교의 핵심 내용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헬라어 메타노이아의 번역입니다.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고친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근본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고친다는 말과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말은 차원이 다릅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변화는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해낼 수 있습니다. 행동이 착한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법을 잘 지키는 교양인이 되는 겁니다. 이런 변화로 새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행동도 반듯하고 말을 세련되게 하는 사람도 여전히 내면적으로는 교만할 수 있습니다. 모양만 바뀌지 근본이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설교한 회개는 생명 아닌 것들로부터 생명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사이비 생명에서 참된 생명으로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종종 나오듯이 세리나 죄인들보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더 그럴듯한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참된 생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참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생명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향해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외친 말씀이 이를 가리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지금 여기 일상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생명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실현되었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야말로 회개라고, 즉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사이비 생명에 기대서 살 것입니다.
2) 파송 받은 제자들이 행한 두 번째 일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축귀는 현대인에게 불편한 단어입니다. 무식한 사람들이나 그런 걸 생각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삶을 파괴하는 세력을 귀신이라고 보았습니다. 본문 7절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입니다. 고대인들의 그런 관점이 21세기 우리의 눈에 우습게 보이겠으나 악의 근원을 뚫어보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틀린 게 아닙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삶을 파괴하는 일들은 일어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게 되었는데도 지금도 인간 세상은 폭력적이고 야만적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귀신이 출몰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귀신 출몰 현상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이미 다 아십니다. 예컨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이후 인간의 낙관적 미래를 노래하던 유럽이 20세기에 두 번에 걸친 전쟁을 벌였습니다. 귀신 작용이 아니면 해명이 안 됩니다. 우리나라도 남북전쟁을 벌였습니다. 지금도 종전 선언을 못 한 상태입니다. 한반도가 휴전 상태이니 언제라도 전쟁이 재발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귀신 들렸다는 말 외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경제 만능주의, 성장제일주의는 귀신이 아닌가요? 우리가 아무리 제어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세력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곳곳에 세련된 포즈를 취한 귀신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쫓아내야 할 교회 안에도 귀신이 출몰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교회가 차별금지법을 집단으로 반대하고, 타종교를 혐오하는 현상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귀신의 장난이라고 표현해도 됩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 예외 없이 많게, 또는 적게 이런저런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참된 평화와 안식을, 즉 참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3) 병 고침
세 번째로 제자들은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다고 합니다. 이 기름이 올리브유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근동에서 환자에게 자주 사용한 물품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21세기 의학은 이런 고대인들의 행위를 유치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치한 부분이 있는 건 분명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이런 치병 행위를 모두 부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병의 원인과 그 치료 방법을 지금도 다 아는 게 아닙니다. 현대의학도 모든 병을 고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기름을 발랐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병을 고쳤다는 사실(치유)이 중요합니다.
앞에 나온 축귀도 치유이고 여기에 나오는 병 고침도 치유입니다. 치유를 단순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든 개인과 세상을 건강하게 고치는 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런 일들은 세상이 더 잘합니다. 병은 병원에서 잘 고칩니다. 잘못된 교육제도는 그것을 맡은 전문가들이 잘 알고 잘 고칩니다. 정치 문제는 정치인들이 더 잘 다룹니다. 복지 문제도 세상의 조직과 기구가 실제로 해결해야 합니다. 교회가 일일이 그런 일을 감당하지는 못합니다.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사회에서 신앙적 관점에서 그런 일을 감당하면 됩니다.
교회는 치유의 근원을 세상에 알리는 공동체입니다. 치유의 근원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기에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여깁니다. 그게 설교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여러분에게 치유의 근원인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할 뿐이지 삶의 방법을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맛본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스스로 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왜 치유의 원천이라는 걸까요? 여러분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경험해보셨나요? 그래서 치유 경험이 있으신가요?
예수의 십자가
우리 인생을 훼손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난폭한 세력 앞에서 살아간다는 불안과 걱정입니다. 마음이 척박해졌고, 뒤숭숭해졌고, 조급해졌습니다. 요즘 종종 거론되는 공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불공정한 세상이 우리의 삶을 가로막고 망가뜨린다고 생각합니다. 옳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세상은 당연히 뜯어고쳐야겠지요.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뜯어고쳐야만 공정한 세상이 될까요? 공정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모두가 만족하는 공정한 세상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미국은 공정한 나라일까요? 흑인들이 공정하다고 느낄까요? 저는 공정 논쟁이 잘못되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 문제는 정치계와 교육계와 시민사회가 뜻을 모아서 투쟁할 때는 투쟁하고, 참을 때는 참으면서 좋은 쪽으로 풀어나가야 하겠지요. 제가 보기에 교회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에게 분에 넘칠 정도로 공정하게 대접받았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치유 받을 겁니다. 그럴 때만 구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회개를 설교하는 일이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고, 병을 고치는 일의 본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케리그마(kerygma), 즉 복음 선포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 자비와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믿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껴보셨나요? 그래서 자기 인생이 어떤 상황에 놓인다고 해서 절대 외롭지도 않고 서럽지도 않다는 사실을 느껴보셨나요? 너무 한가한 소리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가혹한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한다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 대목을 조금 더 보충해서 설명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살이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합니다. 내면의 완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불안한 겁니다. 가끔 착한 일도 하고, 남에게 본이 되는 일도 합니다. 그런 일이 사실은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면 얼마나 돕겠습니까. 세상의 공의를 외친다고 해서 우리가 얼마나 공의롭게 삽니까. 공장식으로 사육되는 동물의 고통을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끔찍한 과소비로 인해서 우리 후손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될지를 생각하면 하루하루의 삶이 버겁습니다. 이래도 되나 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거꾸로, 될 대로 되라 하는 현상도 벌어집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가 십자가를 지셨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았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은총에 대한 기쁨으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더러운 귀신의 작용으로 자기 인생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사로잡힌 겁니다. 악령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생명의 영으로 충만해진 겁니다. 존재론적인 깊이에서 치유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고후 5:17) 되었습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은 그런 경험을 안고 세상에 나가서 회개를 설교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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