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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

(계 5:11-14)

 

 

     마지막의 비밀

     물리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가 대략 45억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태양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지구는 불덩어리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지구에 여러 변화가 나타났고, 결국 생명체가 살게 되었습니다.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10억 년 전을 가리켜 캄브리아기라고 하는데, 그때 지구에는 생명의 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시기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호모 에렉투스, 즉 직립인을 최초의 인간적 특징을 지닌 유인원으로 본다면 3백만 년 전입니다. 앞으로 인류는 지구에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까요?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지구는 영원히 계속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구는 태양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우주물리의 관점으로 본다면 태양의 남은 수명은 대략 45억년입니다. 그 뒤의 우주는 어떻게 될까요? 인류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문제는 너무 까마득한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그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신앙이 기본적으로 이 우주를 하나님의 창조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주의 궁극적인 미래를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 개체가 마지막을 곧 맞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바로 우주의 마지막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죽음과 더불어 우주의 미래로, 종말의 사건으로 말려들어갑니다. 창조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죽어야 할 자신의 실존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주의 마지막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계시록도 바로 그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마지막을 묵시적인 방식으로 서술합니다. 극단적인 상징과 메타포가 등장합니다. 십사만 사천, 육백육십육이라는 숫자도 나옵니다. 천사와 용의 싸움, 이상하게 생긴 짐승들도 나옵니다. 예컨대 13장에는 두 마리 짐승이 나옵니다.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인데, 뿔에는 왕관이 있고 머리에는 신성을 모독하는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장면은 마치 SF 영화처럼 기괴해 보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무덤에 묻혀 썩는 장면이나 불에 들어가 타는 장면을 생각하면 이런 묵시적 묘사가 실감이 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계시록이 묘사하고 있는 우주의 종말이 무조건 혼란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악한 세력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를 가리켜 요한계시록 기자는 ‘보좌에 앉으신 이’라고 표현했습니다.(계 4:2)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을 계시록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 4:3) 보좌 둘레에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관을 쓰고 앉았다고 합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묘사가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이렇게 찬양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여기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세상의 임금처럼 온갖 종류의 보석으로 꾸민 보좌에 앉아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계시록 기자가 그렇게 묘사한 이유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권위를 가장 적나라하게 가리키는 대목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입니다.(계 5:1) 이 두루마리에는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비밀이 적혀 있습니다. 세상의 비밀이 바로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걸 보기만 하면 세상의 미래를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는 일곱 개의 인으로 봉해졌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곱 개의 옥쇄가 찍혔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그걸 열어볼 수 없습니다.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계 5:3) 죽음 이후에 대해서 아무도 알 수 없듯이, 그리고 하나님을 아무도 보지 못했듯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아무도 펼칠 수가 없습니다. 궁극적인 생명이 완전한 비밀에 쌓여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그리고 동의하실 겁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요한의 묵시적 환상은 계속됩니다. ‘어린양’이 등장합니다. 그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뗄 자입니다. 세계의 미래를 밝히 보이실 분입니다.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양이라는 사실은 이미 요한복음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어린양 개념은 이미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이사야의 언급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종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 또는 털 깎는 자 안에서 잠잠한 양 같다고 했습니다. 성서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어린양은 유월절과 연관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던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죽음의 천사는 양의 피가 발린 집은 그냥 지나가고 바르지 않는 집은 들어가서 장자와 짐승의 맏배를 죽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통해서 어린양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서 두루마리를 건네받았다는 말은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동일한 권능으로 세상의 궁극적 미래를 결정할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돌아갈 영광과 찬양이 바쳐져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기자는 어린양을 찬양하는 무리를 셋으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둘레에 있는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입니다.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후략>”(계 5:9,10) 두 번째 무리는 천사들입니다. 이 천사들은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를 둘러섰습니다. 숫자가 만만이요, 천천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세 번째 무리는 모든 피조물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세 무리의 찬양이 끝나자 보좌에 둘러 선 네 생물이 ‘아멘’이라고 했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땅과 하늘, 전체 우주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찬양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린다는 말은 누가 들어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께 영광과 찬양을 드린다는 말은 좀 어색합니다. 어린양은 가장 연약한 존재입니다.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걸 주인의 뜻에 맡길 뿐입니다.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찬송에서도 어린양이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무기력하게 죽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능력과 영광과 권능을 돌린다는 말이 타당한가요? 이런 노래를 예배 시간에 부른 초기 기독교인들은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인가요? 아니면 너무 심한 박해를 받아서 헛것을 보고 있는 중일까요.

     오늘 우리는 현실을 왜곡하거나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큰 능력을 행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런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한다면 십자가에 처형당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 십자가는 처절한 실패였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저주와 조롱거리였습니다. 그렇게 죽은 이를 위대한 존재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큰 능력을 행하셨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나 귀신에 들린 사람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태풍도 잔잔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를 보고 놀랐으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표현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성서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 앞에서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고 놀랐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초기 기독교 신앙이 자리가 잡힌 뒤에 나온 신앙고백들입니다.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근거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초능력자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실제로 아무런 능력이 없는 어린양의 그것과 같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승리주의로 호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모두 부자가 되고 출세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미국이 잘사는 것도 다 예수님을 잘 믿기 때문이고, 동남아시아 나라가 가난하게 사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선포됩니다. 물론 믿는 사람들의 생활조건이 넉넉해지고, 그래서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는 것은 서로 기뻐해 줄만한 일들입니다. 문제는 신앙을 승리주의와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어린양처럼 무기력하게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개선장군이나 대기업 회장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 오류, 왜곡입니다. 이런 왜곡의 열매가 현대의 바알숭배라 할 ‘삼박자 축복’으로, 기독교 신앙을 처세술로 타락시킨 <긍정의 힘> 유의 행태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승리주의를 말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 그렇습니다. 12절과 13절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십시오.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과 권능이 나옵니다. 단어에만 매달리면 안 됩니다. 이런 단어가 왜 나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았을 때 불린 찬송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비밀을 담은 두루마리를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찬송입니다. 우주의 마지막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리고 실행된다는 사실을 노래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종말론적인 것, 최종적인 것, 궁극적인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과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것입니다.

 

 

     종말과 현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입니다. 이 종말은 생명이 완성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지금 우리의 생명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하루만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파 견디지 못합니다. 물을 못 마셔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외로움을 잘 탑니까?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우리의 중심이 갈급합니다. 무언가를 채우려고 무지하게 노력합니다. 우리의 생명 현상이 지금 잠정적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은 이렇게 불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전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완전한 생명은 종말에 회복될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인 종말에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명을 완성하십니다. 그 종말이 바로 우리 신앙의 기준점입니다. 그 종말의 시각으로 오늘을 바라보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한계시록도 바로 그 시각에서 어린양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라고 노래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궁극적 생명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묵시적 표현으로 바꿔 두루마리를 취했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예수가 궁극적인 생명의 완성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왜 메시아인가,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기 모인 분들은 개인의 차이가 있긴 하겠으나 대부분 이미 그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부활절과 그 다음 주일의 설교에서 충분히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더 현실적인 질문은 종말론적 시각으로 오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이 살벌할 정도로 경쟁하고 있는 이 현실에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생명이 완성될 종말이 너무 멀게,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는 말이겠지요.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시절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씀드리는 게 좋겠군요. 요한계시록은 로마 황제 도미티안 통치 말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주후 1세기 후반입니다. 도미티안은 기독교를 박해한 최초의 황제입니다. 그 이전에는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 로마는 원래 정치적인 부분만 제외하면 식민지 국가에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나름으로 정치적 판을 했겠지만 도미티안 황제는 ‘Dominus et Deus noster’(우리의 주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에게 경배하듯이 자기에게 경배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소아시아 일반 주민들은 이런 조치에 대해서 큰 저항이 없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 투쟁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떤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순교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밧모 섬에 유배당한 요한은 하나님의 묵시를 받아 적었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종말의 시각에서 하나님이 이루실 궁극적인 생명을 희망한다는 것은 오늘의 황제숭배를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2천 년 전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21세기 우리도 역시 황제숭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앞장서서 권력의 정점인 황제숭배를 부추깁니다. 돈과 권력을 숭배합니다. 자녀들을 그렇게 내몹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모두 총체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을 죽임에 내몰고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 때 돈과 황제는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겁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아멘! (부활절 셋째주일, 4월18일)

요한계시록 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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