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예수 변모 주일, 2020년 2월23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
오늘은 세계 교회력에 따른 예수 변모 주일(Transfiguration Sunday)입니다. 예수가 빛으로 휩싸여 변모된 현상과 관계됩니다. 그 내용은 공관복음에 각각 다 나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다. 제자들의 이름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거기서 예수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 특징이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옷이 빛같이 희어진 현상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빛입니다. 그 자리에 천사처럼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도 빛과 연관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아서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일종의 아우라입니다. 모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두려워서 가까이 가지 못하자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말할 때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출 34:29-35절 참조). 초자연적인 기적 행위자로 잘 알려진 엘리야는 마지막 순간에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인물입니다(왕하 2장).
예수의 얼굴이 빛났고 옷에서 광채가 났다는 말을 문자적으로만 생각하면 그 의미를 충분하게 따라가지 못하는 겁니다. 여기서 빛은 가장 깊은 종교 경험을 표현하는 메타포입니다. 일상을 예로 들어볼까요? 신생아는 엄마와 아빠에게 유일무이한 특별한 존재로 경험됩니다. 그런 경험을 빛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인들 사이에도 그런 경험이 가능합니다. 시인들은 사물에서 그런 빛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백무산 시인의 시집 『길은 광야의 것이다』에 나오는 시 “그 쬐그만 것이”에서 앞의 두 연만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나 그때 넘어져서 보았다
온몸에 멍이 들고 상처를 입고
쓰러져 얼굴을 처박았던 곳
그 코앞에 핀 쬐그만
냉이꽃 한송이를
내 생애도 무너지고
세상도 온통 균열이 지는 통에
그 쬐그만 냉이꽃 한송이가
아주 쬐그만 것이 그 무심한 것이
바람도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땅의 일이라고 전지구의 사건이라고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노라고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빛을 경험했다는 말은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시인들은 자연의 신비를 보았지만, 제자들은 그 신비로운 자연을 창조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생명의 능력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질적으로 완전히 차원이 다른 생명 경험입니다. 질적으로 다른 생명이라는 말이 멀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이 설교가 끝날 때쯤이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들어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하늘로부터의 소리
일단 오늘 이야기를 조금 더 따라가겠습니다. 예수의 변모 현상을 본 베드로는 예수에게 한 가지 의견을 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좀 엉뚱한 의견입니다. 4절을 그대로 읽어볼 테니, 들어보십시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지금 베드로가 목격한 광경은 매우 황홀하기에 그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을 겁니다. 우리도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도 그런 재미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에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앞에서는 예수가 빛에 휩싸이는 현상이었는데, 이번에 빛과 더불어 소리 현상입니다.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고 구름 속에서 어떤 소리가 났습니다. 5절(후)에 그 소리의 내용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진술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복음서가 전하려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가 이 소리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예수의 세례 사건을 보도하는 마 3:13-17절에도 이와 똑같은 진술이 나옵니다. 예수 세례 사건 역시 변화산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예수는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단강으로 갔습니다. 요단강에 몸을 담는 방식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마 3:16,17절이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 장면과 오늘 설교 본문의 장면이 오버랩될 겁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진술에 복음서가 전하려는 예수의 정체성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영적 권위가 똑같다는 뜻입니다. 영적 권위는 구원 능력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구원 능력을 경험했기에 예수를 하나님이 아들로 인식하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는 세례를 받거나 최소한 기독교 교리를 공부했다면 다 아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능력, 또는 생명 능력이 실제로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에 관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가 한편으로는 쉽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렵습니다. 쉽다는 말은 개인들의 신앙 경험에서 얼마든지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큰 병에 걸렸다가 치료받았다거나 고독한 가운데서 큰 위로를 받은 경험이 그런 것입니다. 또는 죽어서 천당에 들어가는 확신이 들었다는 대답도 가능합니다. 이런 대답이 틀렸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대답만으로 하나님의 생명, 그 구원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대답의 근본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즉 생명의 근본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도대체 생명이, 또는 삶이 무엇인가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생명의 변화
오늘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다 알지 못합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모든 힘을 다해서 생명을 살기는 하지만 그 삶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다니고, 돈을 벌고 자식들을 키우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저는 먹고 마시고 보는 삶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삶이 지금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시원적인 생명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 설교에서 생명의 깊이를 다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아주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어머니 자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 배아가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지체가 자라서 태아가 되었습니다. 태아의 생명이 완성된 생명은 아닙니다. 세상에 나와서 아주 천천히 더 자라야 합니다. 육체적으로는 20세 전후에 현재의 모습이 결정되었습니다. 시간이 더 가면 육체가 노쇠해집니다. 언젠가는 생명이 끝납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생명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한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멈추면 죽습니다.
인류라는 종의 역사를 봐도 생명의 본질이 변화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인류는 처음부터 지금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인류와 침팬지의 공동 조상에서 갈라졌습니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호모 에렉투스(직립인)의 등장이 중요합니다. 직립을 통해서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났습니다.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뇌의 용량이 늘어났고, 성대가 발달했습니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서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생각할 능력이 생겼고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인간은 이런 탁월한 능력으로 문명을 발전시킴으로써 지구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이게 인간에게 축복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아직 모릅니다.
요즘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19’로 인해서 대한민국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떨어졌습니다. 특히 지난 주간에는 대구와 경북 청도지역에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방역에 최선을 다하고 개인은 개인대로 최선을 다하여 이 소동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대합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생명체인데도 스스로 지구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을 큰 불행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 이번에 다시 확인됐습니다. 앞으로 전염력이 더 뛰어나고 독성이 더 강한 바이러스가 출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 생태계는 균형을 유지하려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습니다. 예컨대 숲이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한 생명체가 너무 과도하게 많아지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지구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과도하게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은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학자들의 한결같은 진단입니다. 에너지의 과소비로 인한 기후 변화가 가장 특징적입니다. 바이러스의 창궐도 어쩌면 인간에 의해서 파괴된 생태계가 완전한 파멸에 떨어지기 전에 몸부림치는 현상일지 모릅니다. 무슨 말인가요? 생명은 인간이 마음먹은 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인간은 우주를 포함한 거대한 자연에 속한 일부로서 겸손하게 자기 역할을 감당해야겠지요. 자신이 주인행세를 하면 지구 생태계만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생명도 치명적인 위험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빛 경험
잠시 지구에서 살다가 떠나야 할 인간이 마치 지구의 주인인 듯이 자연을 마음 내키는 대로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경제를 발전시켜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욕망입니다. 만약 경제발전을 이루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자연을 약탈하지는 않겠지요. 문제는 인간의 내면세계가 근본에서 공허하기에 그걸 채우지 않으면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걸 채우려면 소유가 많아야 하고, 다른 이와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괜찮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확인하려는 열정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걸 우리는 인생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삶을 성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남이 부러워할 만한 뭔가를 이루면 그 이룬 업적이 순식간에 평범한 일상으로 떨어지고, 그런 평범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기에 다시 더 많은 업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악순환입니다. 그게 자본주의 체제에서 극에 달했습니다. 현대인들은 그 악순환마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서 생명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삶을 배웠습니다. 그 새로운 삶을 가장 특징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 ‘아빠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이제 그들은 종이 아니라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위해서 의무에 묶여서 삽니다. 그런 삶의 대표자들이 예수와 초기 기독교 당시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똑똑하고 세련되고 도덕적이었지만 자신들의 온갖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에게서 인정받으려고 했기에 종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와 달리 아들과 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삶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율법으로부터 복음으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늦겨울 햇살 하나만으로도, 그리고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삶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삶을 빛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삶을 빛으로 경험할 수 있었기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고백이 예수의 변모 현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문 6절에 따르면 이상한 현상을 경험한 제자들이 땅에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당연합니다. 삶, 즉 생명을 빛으로 경험하는 일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밤중에 혼자서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사람은 낯섦을 두려워합니다. 제자들이 산에서 경험한 현상은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입니다. 30년 후의 미래가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다. 우리가 실감하지 못할 뿐이지 사실은 30년 후가 바로 내일이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그 생명을 우리가 잘 아는 기독교 용어로 바꾸면 부활입니다. 제자들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어떤 특별한 생명을 예수에게서 경험한 것입니다. 두려워서 땅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우리가 보통 무섭게 느끼는 현상과 차원이 다릅니다. 루돌프 오토는 성경이 말하는 두려움을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모세도 호렙산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출 3:6)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자기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달이 뜨지 않는 그믐밤에 은하수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누구나 거룩한 두려움을 느낄 겁니다. 무한히 넓고 깊고 큰 대상을 대면하면 정말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와서 손을 대시면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복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저 아득한 우주와 늘 위태로운 우리의 운명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우리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지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토대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의 기뻐하는 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마 13:44) 인생의 순간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찬양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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