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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영생과 하나님

10:22~30, 부활절 넷째 주일, 202258

 

 

유대인들의 질문- 그리스도론

오늘 설교 본문(10:22~30)의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예수님은 당시에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사람들에게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에 관한 소문은 분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6:13절 이하를 따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자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전합니다. 세례 요한이 다시 등장했다거나 구약의 위대한 인물인 엘리야나 예레미야, 또는 여러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소문입니다. 지금도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를 위대한 선지자라고 봅니다. 이런 정도의 평가만 받아도 사실은 우쭐할 만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선지자와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선지자는 여럿이지만 그리스도는 한 분입니다. 선지자는 영적으로 뛰어난 지도자라 하더라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그리스도는 구원을 베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질문에 누구나 알아들을 정도로 명확하고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궁극적인 사건이나 현상은 말로 해명하거나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 예를 들면, 모차르트나 베르디 음악에 대한 경험은, 또는 밤하늘을 비롯한 우주 전체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말을 듣는다고 해도 공감하기 힘듭니다. 예수가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말했다고 해도 당시 유대인들은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다시 그리스도라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을 겁니다. 16:1 이하를 따르면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16: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당시 그리스도 표상에 어울리지 않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라고 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어떤 이가 악을 행하면 그는 악마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어떤 공공기관에서 발급한 자격증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가 하는 일이 보증하는 겁니다. 선지자나 설교자도 그가 하는 행위로 증명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공생애 중에 예수가 한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고, 제자를 부르셨고, 병자를 고치거나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으며, 산상수훈을 비롯한 값진 교훈도 말씀하셨습니다. 다 귀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을 한 사람들은 당시에 많았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오늘날에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영생을 주노니

본문 요 10:28절에 따르면 자기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영생을 준 것이 바로 예수가 행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영생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교회에서 자주 들어서 그 생명력이 고갈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라는 말씀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11:25, 26)라는 말씀을 들어도 소 닭 보듯이 마음이 뛰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진리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알고 믿는 일에 전력투구하겠지요. 재미있다고 여기는 다른 일에는 순삭이라는 신조어에서 보듯이 시간을 물 쓰듯 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가까이 가는 일에는 시간적으로도 인색하게 삽니다.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교양의 차원에서 대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영생도 교양으로만 경험될 것입니다. 교양으로서의 신앙은 세련되어 보이기는 하지만 네가 이같이 하여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통하여 버리리라.”(3:15)라는 준엄한 심판을 듣게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28절 말씀에 따르면 영생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말도 이상하긴 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우리가 지구에서 유지했던 생명은 언젠가 파멸됩니다. 지금 이미 파멸의 길을 가는 중입니다. 육체가 늙는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죄와 결부된 우리의 실존 자체가 사실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여기서 예외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죽습니다. 예수 역시 사람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자기의 죽음도 막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영생은 여기서 늙지 않는다거나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또는 하나님의 품을,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점점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는 걸 느끼십니까? 단테가 쓴 신곡에서 묘사되었듯이 지옥과 같은 삶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 같은 삶으로 상승하고 있습니까?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올라가고 있으신가요? 이 세상의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길을 잃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 충만 가운데서 길을 찾으셨습니까? 그래서 평화와 기쁨과 안식이 여러분의 삶에서 더 풍요로워집니까? 매 순간이 하나님과 더 단단하게 결속된다는 느낌과 확신이,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 분명해집니까? 그런 게 없다면, 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행복한 삶의 조건에 매달립니다. 정말 열정적으로, 성실하게 그런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 애씁니다. 주변에서 칭찬 들을 만한 사람입니다. 배우자감으로 첫손가락에 꼽힙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비교한다면 율법 수행에 최선을 다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생살이에서 나름 큰 업적을 쌓았습니다만, 그의 영혼은 공허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도 공허하지 않다면 그는 24시간 마약에 취해 있는 겁니다. 체면이 있으니 공허하지 않은 듯이 위장하느라 오히려 더 피로하고 더 낙심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했습니다. 자기의 삶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또는 자연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는 사실이 더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볼 때 좋은 조건이나 나쁜 조건이 그에게는 그렇게 결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율법적인 사람이 아니라 복음적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인식하지 못하는 선한 힘이, 즉 자기를 받쳐주는 권능이 자기와 함께한다.’라는 사실을 느끼기에 삶의 조건이 척박해져도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두세 살 된 아이는 아빠가 자기를 공중으로 던져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을 즐깁니다. 아빠가 자기를 안전하게 받쳐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전에 여러 번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발생하는 구원 사건입니다.

 

영생과 예수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한다.’라는 이 한 가지 사실에 매달려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영생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과 경험이 있었기에 예수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나왔듯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라고 대담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아빠에 의해서 공중에 던짐을 당한 아이가 아빠와 나는 하나야.”라고 말하는 거와 같습니다. 꽃을 영혼의 깊이에서 사랑하는 사람도 꽃과 나는 하나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시인들도 이런 상황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 절대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으로 쏟아내는 고백입니다. 사람 사이도 그렇고, 사람과 사물 사이도 그렇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라는 예수의 진술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신성모독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오해할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오해를 받은 겁니다. 세상살이에는 쓸데없는 오해가 많긴 합니다. 오늘 본문 뒤로 그런 옥신각신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자처한다는 트집을 잡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예수는 시 82:6절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이런 표현은 은유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완전하게 사로잡힌 사람은 거룩하고 존귀한 사람이니까 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실제로 시 82:6절에는 신들이라는 단어와 지존자의 아들들이라는 단어가 함께 나옵니다. 예수님은 마녀사냥 하듯이 돌을 든 그들에게 간곡하게 말합니다. 10:38절을 풀어서 읽어보겠습니다. ‘나를 믿지 않아도 좋으니 내가 선포한 영생만은 믿으시라. 당신들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오. 그걸 깨달으면 당신들도 나와 똑같이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될 것이오.’

우리가 영생에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10장은 예수를 선한 목자로 제시합니다. 제자들은 양입니다. 그냥 양이 아니라 예수의 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반복해서 내 양이라고 말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목자를 따르는 양처럼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즉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운명을 책임지기 때문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26절과 27절에 나오는 이 귀한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 양이 아닌 사람은 예수를 믿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영생 경험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신뢰할만한 분인지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에 들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하면서 조마조마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가능한 영생을 줄 수가 없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눈앞에 놓아줘도 못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내 양은 예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들이 듣는다는 사실을 예수는 압니다. 예수의 하나님 경험이 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에 영생 경험도 온전하게 주어집니다.

 

만물보다 크신 이

예수와 제자들의 특수 관계는 영생 경험에서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28절은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표현했습니다. 29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표현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어떤 세계가 확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며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며라는 말은 하나님이 만물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이것도 흔히 들었던 말씀이지요? 우리가 아는 건 만물이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원리입니다. 현대인은 만물을 분석하고 소유하고 소비하고 즐기는 걸 인생의 최고 목표로 여깁니다. 만물에 관해서 정말 아는 게 많습니다. 그걸 안다고 해서 만물의 궁극적인 현실(ultimate reality)를 아는 게 아닙니다. 과학철학이 말하듯이 만물을 알면 알수록 모르는 영역이 더 늘어날 뿐입니다. 정치를 정말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정치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된 과학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게 만물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합니다.

자연과학자 중에는 만물에 대한 자신의 작은 지식을 절대화해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도 있습니다. 만들어진 신이기적 유전자등을 쓴 리처드 도킨스가 대표적입니다. 그가 비판의 주 대상으로 삼는 기독교는 신학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한스 큉은 나는 무엇을 믿는가160쪽에서 리처드 도킨스가 얼마나 경솔한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연과학 자체의 문제들도 잘 알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는 그 문제들과 관련되는 철학과 신학의 기초 문헌을 무시하거나, (또는) 진지한 논증을 싸구려 자만과 빈정댐으로 대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좁은 식견을 스스로 폭로한다.”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다.”라는 아포리즘을 단순히 종교적인 도그마나 낭만적인 덕담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철학 개념에 전체는 부분의 총합 그 이상이다.”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제가 다른 설교에서도 예로 들었습니다만, 한 사람의 육체에 해당하는 소립자를 시험관에 넣어서 돌린다고 해서 사람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뇌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게 분명하지만, 거꾸로 우리의 의지와 행동이 뇌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대구 샘터교회는 구성원 개개인을 한곳에 모아놓은 총합 공동체 그 이상입니다. 구성원 상호 간에 관계를 통해서 거룩한 시너지가 발생합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힘이 곧 성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물의 총합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인식하고 믿었던 예수님은 만물을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세상의 온갖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바로 그런 휩싸임이 영생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영생이 주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나도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으신가요?

요한복음 10:22~30
https://youtu.be/s5vLFlgUJ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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