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히 11:8-16)
이스라엘의 혈통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혈통이 아닌 다른 계보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계보에서도 조상입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핵심 내용인 믿음이 바로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는 사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는 이방인의 땅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으로 왔다는 사실입니다. 미래가 확실하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의 이주는 단순히 삶의 자리를 바꿨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제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그가 이삭을 얻을 때 보인 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모두 나이가 늙어서 임신할 수 없었지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런 약속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쉬운 게 아닙니다. 세 번째는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브라함이 그대로 순종한 사건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성적인 논리로 받아들이기 힘든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서 이야기는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믿기 힘든 허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큰 병에 걸렸는데도 기도로 낫게 해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들었다면서 병원 치료를 하지 않는 광신자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런 광신자들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이런 태도는 믿음이라기보다는 욕망의 투사입니다. 마치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성공에 자기 삶을 투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자기 운명과 미래를 건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모두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정착했고, 사라를 통해서 백 살에 이삭을 얻었고, 그의 후손들이 별처럼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표본으로 내세웁니다. 신약성서도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정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모두에게 본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히 11:13) 이런 표현이 이상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모든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면서, 다시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땅, 재산, 후손을 얻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찾은 가나안이 본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고 합니다. 그 본향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히 11:16b)
나그네의 삶
더 나은 본향이라는 이야기가 추상적인 것으로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나그네의 삶과 같으며, 외국인의 그것과 같다는 사실을 아직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성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기독교적인 교양에 머물지 실제 영성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전하는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를 좀더 깊이 있게 따라가면 본향 이야기가 실질적으로 들릴 겁니다.
아브라함은 세속적인 차원에서도 썩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맨손으로 출세한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그가 아버지 데라, 조카 롯, 그리고 아내 사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중간 기착지인 하란에 머물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 가나안으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겪은 어려움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큰 부자였는지를 요즘 식으로 계산해 낸 사람도 있더군요. 빌게이츠보다 더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군사를 끌고 좇아가서 구해냅니다. 군사가 자그마치 318명이었다고 합니다.(창 14:14) 그 외에 집에서 일을 돌봐주던 하인들도 많았겠지요. 그는 명실상부 거부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믿음도 좋습니다. 모두 부러워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진 거나 진배가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궁극적으로는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을 여전히 나그네로 규정하고 본향을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행가 제목에도 나오고 영화나 수필에도 자주 나오는 주제입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일상에서 별로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에 쫓기는 사람이 어떻게 나그네의 삶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모든 것들이 다 급합니다. 마치 화장실이 급한 것과 같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자식 문제일 수도 있고, 자기 출세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부부 사이의 문제나 사회적인 명예에 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돈이 가장 급한 문제이겠지요. 아무도 이런 것을 초월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카를 구하려고 군사를 동원해야 했습니다. 아내 사라와 둘째 부인인 하갈과의 긴장과 갈등도 간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당장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아프면 누워야 하고, 공격을 당하면 방어해야 합니다. 인생살이는 급한 용무로 넘쳐납니다. 그러나 삶이 나그네라는 영적인 실존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급한 용무에 쫓길 때는 어쩔 수 없이 쫓긴다고 하더라도 기회를 얻는 대로 삶의 중심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중심에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영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상태가 각자의 삶에서 어느 정도로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영적인 건강이 달라집니다. 거의 매 순간을 그런 영적인 성찰과 자각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곧 성서기자들이고,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여러 영성의 대가들입니다.
영적인 실존이 나그네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좀더 명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우선 우리의 실존 자체가 일시적, 잠정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평생 돈을 모아서 집을 샀다고 합시다. 그 집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사는 게 아닙니다. 집이 없으면 불편한 게 많지만 집이 있다고 해서 불편한 게 모두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직장도 그렇고, 권력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말에 실감이 가지 않을지 모릅니다. 멋진 인생을 설계하는 꿈에 부풀어 있으니까요. 잊지 마세요. 그 젊음도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그 젊음을 계속 붙들려고 하다가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지금 제가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성서는 지금 이 땅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말 터이니 무조건 잘 먹고 잘 살자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실상을 나그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걸 우리는 감수해야 합니다. 성서가 말하려는 핵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인생을 나그네로 규정한 것은 더 나은 본향을 구했다는 뜻입니다. 그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의 본향을 찾는 사람이 지금은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딜레마였습니다. 참된 본향이 아닌 이 땅에서의 삶은 외롭고 고독한 실존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고 있는지 아닌지, 또는 얼마나 강하게 느끼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강하게 느끼려면 ‘더 나은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합니다. 돌아갈 본향이 없는 사람은 나그네도 아닙니다. 외국에 사는 동포들에게서 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예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은 사람은 외국인이요,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거나 그런 느낌의 강도를 무의식적으로도 약화시켜나갑니다. 거꾸로 돌아갈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나그네라는 사실을 날이 갈수록 더 실감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돌아갈 본향인 하늘나라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나요? 그것이 우리의 생각에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막연한가요?
하늘나라
가장 일반적으로는 죽어서 가는 천당을 하늘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배고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천당에서도 각자 받는 상급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천당, 또는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젊어서 죽고, 아들이 늙어서 죽었다면 천당에서 죽을 때의 그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걸까요? 태어나면서 죽은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피부색도 그대로 남아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호기심을 유발시키기는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들은 생명의 문제를 여전히 이 땅에서 경험하는, 즉 나그네와 같은 차원의 생명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향이 하늘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앞으로 돌아가야 할 생명의 세계가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의 세계와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본향은 우주 비행선을 타고 지구와 비슷한 조건의 어느 행성에 가서 천년만년 살고지고 하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을 자기에게 익숙한 어떤 것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오히려 그 반대를 가리킵니다. 스텐리 하우어워스는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하나님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어 내려하고, 급기야 어떤 이들은 ‘사용자 중심의(user-friendly)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카펫이 깔린 침실 같은 본당에 푹신한 의자가 놓여 있고, 부대시설로 농구장을 구비한, 주변 문화와 너무도 흡사하게 만들어진 이 교회에서 우리는 무언인가 낯선 것, 기이한 것과 마주칠 일은 전혀 없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게 길들이려고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다.”(57쪽)
하늘은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공간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곳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지금 우리의 삶이 나그네와 같다는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의 삶은, 즉 생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완성되는 때를 가리켜 종말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듯이 참 생명과 거짓 생명을 구분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의 생명이 아무 의미가 없거나 가짜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은 은폐된 종말론적 생명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지금 우리의 생명은 부분적인 겁니다. 부분만으로 전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만으로 내 인생 전체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인생의 많은 부분들은 숨어 있습니다. 이 숨어 있는 생명을 가리켜 하늘이라고 합니다. 그 하늘의 생명이 곧 부활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본향이 있습니다. 거기서만 우리의 생명은 완성됩니다.
이미 그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은폐된 종말론적 생명의 선취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 참된 생명이 그에게 당겨져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의 완성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신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하늘과 하나님, 하나님 우편은 모두 똑같이 은폐된 생명 사건이며, 생명 능력입니다. 하늘나라의 본향에 이미 들어가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선물로 줄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경험과 믿음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그 이외의 것들, 즉 물질적인 복을 받거나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은 기독교의 시작과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을 억압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살아가는 한 그런 억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세속적인 행동도 자주 할 겁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결코 매몰되지 않습니다. 질적으로 다른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에 힘을 내십시오. (성령강림절 후 열한째 주일, 8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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