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의 양식
요 6:24-35, 성령강림후 열번째 주일, 2015년 8월2일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다는 ‘오병이어’ 이야기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주었을지는 명약관화합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떨어지던 모세의 광야시절을 연상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요 6:14,15절에 따르면 당시 군중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모세를 떠올리면서 예수님을 임금으로 옹립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걸 눈치 챈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다음날 군중들은 호수 건너편 마을인 가버나움에 머물고 있던 예수님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요 6:26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 문장에 나오는 표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세메이온’의 번역입니다. 세메이온은 miraculous sign, miracle 등등의 뜻입니다. 루터는 그 단어를 Zeichen(짜이헨)으로 번역했습니다. 표시, 신호, 부호라는 뜻입니다.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겁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고전 1: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말한 것처럼 원래부터 표적을 추구하는 민족입니다.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온갖 종류의 표적들이, 즉 기적들이 나옵니다. 이집트 파라오에게 열 가지 재앙이 내리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 만나가 내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광야에서 길을 안내했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단에 올려놓은 제물을 몽땅 태웠습니다. 이런 표적을 열거하자면 거의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유대인들은 왜 표적을 구했을까요?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표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의 감각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그 기적이 곧 표적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나 깨나 하나님의 표적을 찾았습니다. 이런 표적 신앙 자체를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강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표적 자체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 본문에서 군중들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적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것에만 관심을 보인다고 일침을 놓으셨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런 전철을 그대로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심지어 벼락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백마 탄 남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런 기도 자체를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아니라 표적 자체에 매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결국 자신의 삶에서 이용할 대상으로 떨어지게 되어,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먹고 배부르겠다는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먹고 배부른 것’은 인간에게 영원한 유혹이자 처절한 숙명입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인간은 먹고 배불러야 합니다. 아무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먹는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 창조 질서입니다. 먹어야겠다는 욕망이 작동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지구에서 생존할 수 없을 테니까요. 만약 모든 사람이 거식증에 걸린다면 인류 멸절은 시간문제가 될 것입니다. 먹어야겠다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만 영혼을 몰입시킨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식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소유욕 전반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 욕망에 사로잡히면 결국 먹을거리를 독점하게 되고, 이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인 21세기에도 여전히 소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우리를 무한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현상을 보고 자기를 다시 찾은 유대 군중들에게 27절에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표적 신앙의 오류를 교정하신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일확천금이나 ‘대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야말로 참된 표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즉 영원한 양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합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적인 민족이기 때문에 영생의 양식도 하나님의 일을 해서 얻는 것으로 생각한 겁니다. 그들의 태도는 진실한 겁니다. 눅 10:25절에 따르면 어떤 율법 학자가 예수님에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관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29절에서 다음과 같이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유대 군중들의 질문은 절박한데 반해서 예수님의 답변은 좀 한가해보입니다.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한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기를 기대했는데, 그냥 믿기만 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질문했던 군중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워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장로 투표가 있었습니다. 한 후보자가 당회에 들어와서 소견을 발표합니다. 자기가 장로가 되면 교회를 위해서 어떤 봉사를 하겠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그때 담임 목사가 ‘그런 거보다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했습니다.
본문 30절에 따르면 유대 군중들은 예수님에게 다시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는 표적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모세의 만나와 같은 표적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라고 예수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씀하셨는데, 군중들은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다시 예수님을 향해서 표적 운운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한번 틀이 잡히면 변화되기가 힘들다는 게 여기서도 확인됩니다. 표적과 기적에 마음이 쏠려 있어서 모든 문제를 그쪽의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들도 혹시 신앙과 삶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헛것에 마음이 쏠려서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몇몇 논쟁이 오간 뒤에 예수님은 35절에서 다음과 같이 돌직구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 망측한 말인가요?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게, 자기에게 오는 자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는다는 게 말이 될까요? 당시 예수님에게 와서 따지듯 논쟁하고 있는 군중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는 인간의 먹고살기 힘든 현실을 외면한 채 뜬구름 잡은 이야기로 구체적인 인간 실존을 호도하는 전형적인 종교 사기꾼은 아닐까요?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잘못은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물들었고, 썩어 없어질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신앙생활이나 열심히 하다가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칼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가리켜 민중의 아편이라고 했겠습니까. 히틀러 시대의 독일교회는 관념적인 신학과 신앙에 떨어져서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히틀러에게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도 성속이원론과 영육이원론에 떨어져서 경제정의와 통일 문제 등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소극적인 정도가 아니라 민족의 역사 앞에서 퇴행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은 영육이원론과 기복주의가 교회 안에 착종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은 ‘둥근 삼각형’이라는 말처럼 형용모순입니다. 일종의 정체성 분열증세로서, 신앙을 정직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이 위험한 말씀은 당시의 유대 군중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책임 있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설교자로서 여러분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며, 그에게 가면 굶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습니까? 근거를 댈 수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예수가 생명의 떡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말 표현으로 바꾸면 예수가 생명의 밥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마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생명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생명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하기 전에 생명에 대한 성서의 대전제를 알아야 합니다. 성서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질적인 차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성서는 그 관계를 토기장이와 질그릇 비유로 설명하곤 했습니다. 질그릇이 토기장이를 향해서 자기를 왜 이런 모양으로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규정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먹고 마시고 호흡하면서 생명을 부지하고 있지만 생명의 본질을 다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방식이 아닌 다른 생명을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채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능력을 허락하기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이 좀 불편하게 들리나요? 인간을 너무 초라하게 말하는 것 같은가요? 여러분 마음에 들던 않든 간에, 이게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실존이니 제가 어떻게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약간의 위로를 드리기 위해서 어떻게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숨을 쉬지 않고 10분 이상 버텨낼 수 있다면 다른 토를 달아도 좋습니다. 이런 생명 조건을 우리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조건의 세상 안으로 던져진 존재들(세계내존재)입니다. 과학발전이 크게 이루어진 먼 훗날 인간 수명이 2백 살이 되거나, 우주여행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이런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게 피조물의 속성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은 우리의 신세를 초라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든든하게 세우는 신학적인 대명제입니다. 생명이 우리 손에서 처리될 수 있다면 우리 운명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한 겁니다. 세상이 아귀다툼으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밥을 다섯 끼씩 먹고, 가난한 사람보다 1백년은 더 오래 살려고 애를 쓸 겁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확대하려다가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생명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그분만의 방식으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가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분만이 고유한 능력으로 생명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즉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를 좀더 생생하게 이해하려면 생명 충만감을 얻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생명의 깊이로 들어갑니다. 신약성경의 핵심 주제가 이것입니다. 이 말씀을 제가 어떻게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를 사랑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를 통해서, 또는 그녀를 통해서 세상을 전혀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모든 사물에 생기가 돕니다. 그와 함께 한다면 아무리 허술한 밥상이라도 진수성찬 부럽지 않게 됩니다. 더 근본적으로 삶의 기쁨이, 존재의 기쁨이 밀려드는 걸 느낍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보충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도 이런 경험이 주어지는데, 하물며 예수를 사랑한다면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본문의 표현처럼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옳다는 건 분명한데 왜 나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을까, 이상하게 여길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경험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따분하고 피곤한 일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니 교회 안에서 사소한 일로 충돌이 일어나고, 공연한 일에 마음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자기라는 성채에 갇혀 지내는 사람의 운명과 비슷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통한 생명 충만의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삶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지 않으십니까?
본문이 답을 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이라고 했습니다. 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너무 쉬운 대답이라서 허전한가요? 40일 금식기도가 아니라서 시시해보이나요? 예, 쉽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학위나 돈이나 인격이나 온갖 업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오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앞에 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겉으로 쉬워 보이지만 그게 가장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뭔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에 관심이 있고, 그래서 그런 것에 열정을 보이지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열리는 생명의 신비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알지만 잘 안 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생살이의 돌부리 같은 것에 걸려서 결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주님의 약속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채 영적인 갈증만 더 심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또는 완전히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이라는 늪에 빠져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요 6:66절이 말하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제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난 것처럼 복음의 세계로부터 시나브로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는 지금 여러분의 신앙과 삶의 문제를 한방에 해결해드릴 묘책을 제공할 수가 없습니다. 각자 영적 수준만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단계에 머물러 있던지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말고, 혹시 잊었다가도 다시 기억해내도록 하십시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의 참된 양식입니다.’ 아멘.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