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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005.2.20.          

요 3:1-8

영은 바람이다

니고데모의 방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나눈 대화가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유대인들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의 다른 두 대목에 등장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체포하려고 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도대체 우리 율법에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거나 그가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죄인으로 단정하는 법이 어디 있소?”(7:51). 제법 경제적인 여유도 있고, 사회적 신분도 높았던 사람이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에 의해서 매도당하고 있는 인물에게 호감을 보였다는 건 그렇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사람이 원래 사리 판단이 분명했는지, 아니면 예수님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유대의 지도자로서는 매우 특이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혔을 때도 니고데모는 그 당시 장례법에 따라 시체에 바를 기름을 가져왔다고 합니다.(19:39).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오긴 했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른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관리처럼 영생에 이르는 길을 알고 싶다거나, 남에게 알리지 못할 죄가 있다거나, 병을 치료하거 싶다거나, 세례 요한처럼 예수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궁금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2절). 그는 단지 어떻게 보면 좀 아부 성 발언같이 들리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니고데모라는 인물 자체는 오늘 본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위대한 신앙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는 잘난 사람들을 그럴듯하게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과의 대화 중간부터 전혀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무슨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도 성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서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통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새롭게 경험하게 된 하나님의 나라가 핵심입니다. 유대교의 신앙과 헬라 철학 사이에서 전혀 새로운 길을 가고 있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니고데모의 입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적 이야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간주하는 근거는 예수님에게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기적의 관계는 단지 니고데모의 증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니고데모를 대표로 하는 유대교의 기본적인 신앙입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그런 기적과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성서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출애굽 사건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입니다. 이 사건은 기적으로부터 시작해서 기적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와 문둥병 현상이 있었습니다. 바로에게 내린 열 개의 천재지변은 전형적인 기적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는 계기였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이야기라든지, 만나와 메추라기, 바위에서 터져 나온 샘, 이방 민족들과의 전쟁 등등, 모든 기적 설화들은 야훼 하나님이 살아 있으시며, 자기들을 지킨다는 증거였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선생님,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마 12:38)고 노골적으로 말한 적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요구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참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이 감각적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역시 이런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요즘도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런 증거를 찾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서, 또는 자신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우연한 사건에서 그런 증거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우울증에 걸렸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깨끗하게 치료되었다거나, 사이가 나빴던 친구와의 관계를 예수님이 해결시켜주었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이런 신앙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기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들의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 적이 있습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마 12:39).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감각적인 방식으로 확인하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다른 하나의 이유는 신앙을 호기심의 차원에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새로 나온 핸드폰이나 유행하는 옷, 또는 전원주택을 향한 사람들의 호기심이 뜨겁듯이 기적도 역시 우리의 신앙적 호기심을 뜨겁게 자극합니다. 기도로 불치병이 치료되었다거나 부도날 회사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흡사 ‘호기심 천국’ 수준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아 켐피스는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힌 사람은 당연히 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그의 가르침은 젊은 수도승들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약간 극단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옳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감정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느끼는 호기심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남’에 대해
니고데모의 호의적인 발언에 대해서 예수님은 좀 민망할 정도로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종의 동문서답,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문현답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니고데모는 기적과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새로 남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적 이야기가 이제 ‘새로 남’(born again)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관계가 있나요, 없나요? 기본적으로는 다르지만, 내면적 의미로 본다면 소통되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다른 점은 이렇습니다. 기적은 어떤 한 사람의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인데 반해서 ‘다시 남’은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기적은 자기 밖에 있는 세계가 바뀌는 것이지만 다시 남은 자기 안의 세계가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설명한다면 기적은 육적인 것이지만 다시 남은 영적인 것입니다.
기적과 다시 남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두 사건 모두 일상적 차원을 뛰어넘는다는 데에 그 공통점이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다거나 장애인이 치료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남도 역시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다시 남도 기적입니다. 니고데모가 말한 기적은 세상의 기적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시 남은 자기 내면의 기적입니다.
니고데모는 다시 나야 한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니고데모만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인하고 싶어 하던 모든 유대인들도 똑같았을 것입니다. 늘 밖에서 큰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은 자기 내면의 변화를 알지 못합니다. 메시아를 통해서 정치적인 독립국이 되고, 더 나아가서 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던 유대인들이 마구간에 태어난 목수의 아들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관심이 전혀 다른 경우에는 진리를 바로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순진한 건지 아니면 어리석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니고데모는 이렇게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4절).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이런 현실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실증주의자들에게 영의 세계는 무의미합니다.
이 니고데모의 말이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시 난다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대답을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5,6절). 이 말씀에서 핵심은 물과 성령에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물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세례 요한의 세례를 의미 있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세례 요한의 설교와 세례만은 수백 년 동안 듣지 못했던 예언자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만 니고데모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세례는 곧 영적인 세례입니다. 민족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세례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생명의 영인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이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심사숙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한 사건이 근본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특히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경험했던 그 성령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신앙의 토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의 물세례가 아니라 오히려 부활을 통해서 종말론적 생명을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미리 맛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가 그들의 신앙적 토대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그들은 이제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물세례로만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물세례와 성령 세례가 바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된 것입니다.  

바람 같은 성령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새로 나다’는 말을 부연 설명하십니다.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이다.”(7,8절).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언급하다가 바람이라는 단어가 느닷없이 등장합니다. 이건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원래 성령이라는 뜻의 헬라어 ‘프뉴마’나 히브리어 ‘루아하’는 동시에 ‘바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령은 생명의 바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아마 고대인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이 곧 영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물리학적인 지식이 별로 없던 그 사람들로서는 바람을 일종의 물질인 공기의 이동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숨에도 작용하기 때문에 바람을 생명의 영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그렇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성령의 세례, 새로 난다는 것은 곧 바람의 속성을 가진 성령에 의존하게 되는 삶으로의 변화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8절에서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성령 자신의 뜻대로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도 이게 무슨 뜻인지 종잡기 힘드시죠?
이 말을 이해하려면 오늘 예수님을 찾아와서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시 확인해야만 합니다. 그는 전형적인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이 세상의 역사, 이 세상의 구원은 이미 결정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런 결정론적 구원론, 그런 역사관에 의해서 메시아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렇게 자기들의 신념, 전통, 선입관에 안주하는 사람은 그것을 뛰어넘어 활동하는 프뉴마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선입관을 깨뜨린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위로와 기쁨과 구원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물만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 받은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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