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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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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5.11. (고전 2:12-16)

오늘은 전 세계 기독교회가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성령이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에 임한 날은 오순절입니다. 유대교의 삼대절기 중의 하나인 오순절은 유월절 후 50번째 날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유대교의 유월절이 기독교의 부활절과 일치하고, 오순절이 성령강림절과 일치합니다. 예루살렘의 초기 공동체가 경험한 성령강림 사건은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뒤 신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세찬 바람소리와 불길이 그들 위로 내렸다고 합니다. 이와 동시에 신자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거나, 그들의 말을 외국인들이 자기네 나라 말로 알아듣는 신비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사건은 요한복음 16장에 이미 예고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 뒤로 초기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이 성령에 의해서 진행되었습니다. 모든 신약성서는 성령이 바로 초기 기독교의 신앙생활을 결정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도 역시 바로 이 성령에만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예배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드리는 경건한 행위입니다. 그 성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기도드릴 때도 성령의 도움을 바랍니다. 개인이나 공동체나 가릴 것 없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에서 시작해서 성령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 성령 공동체라고 합니다.

루아흐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성령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연조가 있는 분들은 그동안 들은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라는 게 가장 기초적인 대답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답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추상적인 것으로 들립니다. 구체적으로는 방언을 한다거나 신유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우리나라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특별한 은사를 성령의 증거로 받아들입니다. 약간 다른 경향도 있습니다. 주로 신비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분들에게 나타나는 것인데, 그들은 성령을 내면의 소리로 생각합니다. 성령에 감동을 받으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말입니다. 성령을 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성령의 열매를 구체적으로 아홉 가지나 열거하고 있습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가 그것입니다.(갈 5:22,23)
성령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우리가 듣지만 성령을 실제로 경험하거나 그것을 바로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할 뿐입니다. 성령에 관한 분명한 이해와 경험이 없어도 그걸 내색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을 받은 표시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성령을 체험하지 않아도 신앙생활과 세상살이에 별 지장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성령의 체험이 없으면 지장이 많습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인데, 그것이 없다면 생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영이 없는 삶은 겉으로는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영인 성령이 함께 하는 삶과 없는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성령이 함께 하는 삶과 아닌 삶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건 남의 설명을 듣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만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어서 그것 너머의 것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교회 근처 숲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서재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꽃을 활짝 피운 아카시아 나무가 보인 탓입니다. 옛날 어렸을 때 친구들과 어울려 정신없이 따 먹던 그 아카시아 꽃을 보고, 1980년 5월 전라도 광주의 어느 깊은 산속에서 군종장교 입대를 위한 군사훈련을 받던 중 진한 향기에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그 아카시아 꽃을 보고 어찌 방안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옛 시절을 회상하면서 꽃을 입에 넣고 씹었는데, 옛날 맛이 나지 않더군요. 향기도 웬일인지 기대만큼 진하지 못했습니다. 약간 실망한 발길을 돌려 교회로 돌아오면서 저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 이유는 바람에 있었습니다. 바람은 저의 온몸을 감싸고돌았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들판을 내지르며 나무와 풀을 흔들었습니다. 구름을 몰고 다녔습니다. 저는 성서가 기록되던 고대에 사람들이 바람을 무엇으로 생각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지금 우리야 바람이 공기의 이동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 몸을 흔드는 것은 공기라고 말입니다. 고대인들은 물리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보이지 않는 공기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다만 자기들이 살고 있는 그 세상에 무언가를 움직이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차가워지면 지상의 생명들은 조용해지거나 죽습니다. 다시 봄이 되어 뜨거워지면 모든 생명들이 힘을 얻습니다. 고대인들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구약시대의 히브리인들은 그것을 루아흐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바람, 숨, 공기, 그리고 영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생명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영이 바로 바람이라고 말입니다. 고대인들은 루아흐, 즉 바람을 생명의 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루아흐라는 단어를 말하기 시작한 고대 히브리 사람은 아마 영성가였을 겁니다. 이런 경험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개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구경만 했을 뿐이지만 이 영성가는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것과 일치하고, 그것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바람을 온몸으로 느껴보라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 거는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합니다. 숨 쉬는 걸 느껴보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걸 시답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교회의 황기 사범이 하시는 단전호흡은 아마 숨쉬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공부일 겁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아무리 숨을 몸으로 느끼라거나 바람을 몸으로 받아들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대충 피상적으로 따라할 뿐이지 실질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에 마음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구약성서의 영성가들은 루아흐라는 단어를 통해서 바람과 생명의 일치를 아주 현실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소피아
히브리인들의 루아흐를 헬라인들은 프뉴마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 뜻은 영, 숨, 바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된 단어가 바로 프뉴마인데, 헬라어 원어 성경에 보면 약간 변형된 단어를 포함해서 8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이 프뉴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더구나 이렇게 자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위에서 드린 질문으로 바꿔서, 그가 말하는 그 프뉴마는 무엇, 누구일까요? 이런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합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그 프뉴마를 아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원초적 신앙 안으로 들어가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본문을 거론하게 된 전반적인 맥락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쓴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라는 도시에 세워진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지역에서도 아주 잘 나가는 도시였습니다. 경제도 잘 돌아갔고 호화로운 헬라 신전도 있었으며, 정기적인 스포츠 제전도 펼쳐지는 곳이었습니다. 고대건축 역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되는 코린트 양식은 바로 이 고린도의 건축 양식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속한 교우들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별로 높지 않았습니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고전 1:26) 이런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은 철학의 나라인 그리스에서는 당연히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정반대로 말합니다. 무식한 사람들을 통해서 유식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하나님이 고린도교우들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헬라 철학과 정면으로 ‘맞짱’을 뜨는 것입니다. 이 맞짱의 주제는 그리스인들이 진리의 근거로 생각하는 소피아, 즉 지혜입니다. 바울은 지금 무엇이 참된 지혜인가, 하고 묻습니다.
바울은 소피아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세상의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상에서 곧 멸망해버릴 통치자들의 지혜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고전 2:7) 이 지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 이전부터 마련하여 감추어두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은폐된 진리입니다. 바울은 이사야 64:3절을 인용합니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고전 2:9) 이렇게만 말씀드려도 이제 여러분은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가 무엇인지 아셨을 겁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 없어서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세상 통치자를 이상한 눈길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본받고 싶어할만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눈에 예수가 그리스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을까요?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는 아주 평범한 가장에서 태어난 노동자입니다. 그는 부처처럼 왕족도 아니고, 공자처럼 양반도 아니며, 세례 요한처럼 제사장 가문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을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를 어떻게 그리스도로 믿으라는 말인가요? 세상의 통치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은 매우 상식적인 일이며,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사회를 소란케 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넣고, 법을 어긴 사람들을 처벌해서 돈도 벌고, 권력도 쥐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보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지금도 그런 일들을 자주 일어납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세상의 통치자들이 못 보는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를 본 사람들은 바로 세상에서는 무식한 계층에 속하는 고린도교회 교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볼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통찰”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 2:10) 고린도 교우들은 밖으로 내세울 게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고전 2:12)  

프뉴마 vs 프쉬히코스
여러분은 바울의 이런 주장을 이해하시나요? 그리고 거기에 동의하시나요?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비밀인데, 고린도 교회는 그것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와 비밀을 알았다는 것은 바로 그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믿는 게 쉬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적인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바울은 “영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프쉬히코스’라고 하는데, 개역 성서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번역했으며, 루터는 “자연적 인간”(Der natürliche Mensch)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앞에서 거론된 세상의 지혜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합리적 논리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런 사람은 “성령께서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눈에 그것이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입니다.(14b)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고상한 도덕심과 윤리적 기준들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아무리 신경을 써도 영적인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앞부분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고전 1:23)
여러분은 영적인 사람들인가요? 여러분은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신가요?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인가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단순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다는 한 순간의 경험으로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닙니다. 처음은 그렇게 시작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이 왜 하나님의 심오한, 숨겨진 지혜인지를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무엇이 참된 생명인지도 알아가야 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영적인 삶입니다. 영적인 인식입니다. 그런 인식의 심화가 없다면 여러분은 바울이 젖먹이라고 책망한 고린도 교우들과 같습니다.(고전 3:2) 초보 신앙의 자리에서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가십시오. 성령께서 영적인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신앙의 놀라운 경지를 허락하실 겁니다. 그 경지를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도 아폴로도 베드로도 이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고전 3:22,23)

고린도전서 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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