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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영적인 인식론




영적인 인식론
고전 2:6-16

성숙한 사람들에게
초등학생들에게 존재, 인식, 역사, 담론 등의 단어를 사용해서 무언
가를 말하려고 한다면 상당한 어려움을 당할 것이며, 또한 그런 방식은
타당하지도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어린아이들에게 어울리는 언어
와 사유구조의 방식으로 설명해야만 합니다. 거꾸로 대학생들이나 그 이
상의 학문적 훈련을 받은 사람에게 초등학생들에게나 어울릴만한 이야
기를 한다면 그것도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청중들의 수준에 따라서
말하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는 이 원칙은 복음을 전달할 때도 똑같이 적
용됩니다. 신앙생활이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말합니다(2:6)라는
바울의 언급이 이런 사정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2장1절부터 5절에서 언
급하고 있듯이 아직 신앙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사실 그대로만, 어떤 면에서는 단조롭게 전했지만 이미 그런 단
계를 지나서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자세는 오늘 한국 교회에 아주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
미 개신교 선교 역사가 100년이 훨씬 넘었고, 남한 전체 인구의 20 프로
정도가 개신교 신자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성숙한 신앙의 세계
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혜로운, 즉 합리적
인 말은 신앙적이지 못한 말로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신앙생활
의 형식과 내용이라는 두 관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첫째, 형식적
인 면에서 교회생활은 합리성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에 대한 보편 타당한 원리를 찾기보다는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
훨씬 우세하게 작용됩니다. 둘째, 내용적인 면에서 신앙이 깊어지지 않
습니다. 그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의 그 수준에서, 그리고 세례 받을
때의 그런 교리적 차원에서 한 걸음도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
컨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사실에만 충실할 뿐이지 그 부활이 무엇
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깊은 인식이 따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해석이
따르지 않는 단조로운 신앙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오늘 많은
기독교인은 합리성이 결여된 형식과 심화되지 못하는 내용에 사로잡혀
서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을 통한 기쁨과 평화와 자유를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결국 자신의 종교적 기득권을 수호하
는 수준에 머물든지 아니면 신앙을 자신의 세속적 성취를 위한 도구로
이용할 뿐입니다.

세상의 지혜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지혜는 무조건적인 합리성이나 그 어떤 지적
깨달음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지혜가 필요하기는 하나
그것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6절). 왜 세상의 지혜가 아니
라는 것인가요? 지혜는 지혜일 뿐이지 세상의 지혜가 있고 교회의 지혜
가 따로 있는 건가요? 물론 겉으로 보면 지혜는 비슷합니다. 어디서나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들을 보면 지혜롭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말입니
다. 그러나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세상의 지혜는 교회가 말하는 지혜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바울의 이런 구분은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6절 후반
부를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곧 멸망해 버릴 통치자들의 지혜와는 다릅
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특히 통치자로 나선 이들은
상당히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따라야 한
다고 열을 올리고, 그래서 인기를 끌어보려고 하는 이들의 태도를 근본
적으로 부정하니까 말입니다. 우선 이 말이 옳은지 아닌지 검증해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통치자의 지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그 당시 로마 황제나 그런 통치 이데올로기를 가리킨다
고 보면 됩니다. 이들은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을 가장 지혜로운
가르침으로 제시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애
국심을 부추깁니다. 이런 애국심은 오늘도 역시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그런데 이 애국심이라는 것은 한 국가 안에서만 타당한 이념이라는 점에
서 분명히 정치적 이데올로기입니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이 땅에 사는
한 국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만약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각각 국가지상
주의에 빠져서 살아간다면 이 지구에는 어느 한 순간도 평화로운 시절은
없을 것입니다. 백제왕과 신라왕들은 애국심 운운하면서 백성들을 전쟁
터로 몰아갔습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남북으로 분리되어 으르렁거리면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이 남북분단 상
황도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
런 문제만이 통치자들의 지혜는 아닙니다. 좀더 적극적인 면에서 돈버는
기술 같은 것이 바로 통치자와 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완전히 가위눌릴 정도로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돈을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이런 지혜는 그것 자체가 생명을 풍요롭게 만들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를 경쟁 관계로 몰아가며, 결국은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죽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바울의 표현대로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지혜가 쓸모없다거나 부정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켜나가기 위한 지혜도 있으며, 예술과
문학처럼 우리를 어떤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지혜도
있습니다. 종교처럼 자기를 초월하게 만드는 지혜도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상의 지혜는, 그리고 우리가 실제적으로
이 땅에 살면서 획득하게 되는 지혜는 자기를 성취하게 하는 기술입니
다. 자기를 확대하고 어떤 이념을 강화시키는 요령입니다. 비록 자기를
희생시키는 행위와 가르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자기를 성취
하는 방법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고전 13장
에서 자기의 모든 재산을 희사하거나 몸을 불에 태울 정도로 희생하더라
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점에
서 이 세상은 이런 요령과 요령, 노하우와 노하우가 충돌하면서 보다 강
한 것이 약한 것을 지배하는 원리로 작동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조폭
세계에서 통용되는 지혜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지혜는 아무리 놀라워
도 결국 망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 경영, 노조 활동, 대학 사회,
문화와 예술계, 그리고 종교 안에도 이런 조폭의 지혜가 통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꾀는 많지만 사랑이 없는 지혜 말입니다.

감추인 지혜
바울이 성숙한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
이며,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이 감추어 두었던 지혜라고 합니다(7절). 바
울은 예레미야 9:22-23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 이게 무슨 지혜일까요? 일단
하나님이 감추어 두셨던 지혜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너무 추상적인 것처
럼 들립니다.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시면 될텐데 공연히 감추
어 두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실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고 반문할 수
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툭하면 하나님이 감추어 두셨다는 말로 어려
운 상황을 피해갑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무언가 비밀 가득한, 그래
서 보편적인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의(秘儀)의 같은 것으로 오해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감추어 두셨다는 말을 오해하거나 오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굳이 오늘 본문 말씀을 거론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진리는 원래 숨
어있던 것이 드러나는 사건을 뜻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숨어있지 않
은 참된 것은 없습니다. 물질의 실체도 역시 그 근본은 숨어 있습니다.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는 우리의 감각에 잡히지 않습니다. 현미경이 발견
된 이후에 그 원소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 이전까지는 학자
들이 어느 정도 예측하기는 했지만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원소의 세계
안에서도 역시 핵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전자가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자 현미경이 발견된 이후에 확인되었습니다. 핵과 전자보다 훨씬 작은
소립자는, 예컨대 쿼크는 그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물질이 얼마나 작은
세계로 구성되어 있는지 지금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숨어 있다는
말입니다.
약간 다른 분야이지만 문학의 참됨도 역시 숨어 있습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는 만약 그 작품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한다면 아직 모든 것
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토지가 드러내려는, 또는 숨겨두
고 있는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실존과 역사의 실체가 아직 온
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한 인간의 운명도 역시 그렇습니다. 출생으
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건과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인간의 운
명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들이 점쟁이입니다만
그들은 다만 통계학에 근거해서 어느 정도의 윤곽을 그리는 것뿐이지 실
체를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지혜를 창조 이전부터 감추어 두었다는 말은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나타나는 것들도 숨
겨져 있는 것인데 하물며 가장 궁극적인 지혜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
니까?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풀어주는 사람들이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이
었으며, 신약에서는 사도들과 교회의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숨은 지혜를
말한다는 점에서 점쟁이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들은 점쟁이처럼 어떤
통계학이나 마술이 아니라 지혜의 근원이 드러내 주는 것만큼만 해석한
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계시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한 지혜의 노출
바울은 창조 이전부터 감추어 있는 지혜를 세상의 통치자들은 깨닫
지 못했다면서,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증언합니다.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만이 알 수 있듯이 하나
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성령만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11절). 적절한 비
유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지혜는 사람들이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지
혜는 하나님의 성령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계시의 본질입니다.
계시는 계시되는 것만큼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의 이런 논리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는 하나님의 지혜, 또
는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알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우
리와 상관없는 세계라는 뜻이 아니라 죽어야할 운명 속에 있는 우리와
전혀 다른 범주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어린아
이들은 부모님의 생각을 완전히 알기 힘듭니다. 매일 티브이나 보고 군
것질이나 하면서 지내고 싶은 게 어린아이들의 마음인데, 부모님들은 그
것을 못하게 하고 더 나아가 아침저녁으로 양치질하는 것이라든지 좀 귀
찮은 일들을 시킵니다. 전쟁의 상황에서도 사단장이나 연대장이 어떤 전
술을 쓰고 있는지 졸병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졸병들은 작
은 지역의 전투에 충실하면 되지만 사단장들은 넓은 범위의 전투를 생각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생각은 아무리 고상하고 심
원하다고 해도 역시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세계를 완전히 인식하기에 턱
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지금은 내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
하다"고 고백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성령만
이 알 수 있다는 바울의 주장은 옳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말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옳은 건 옳습니다.

영적인 인식
하나님을 생각을 성령만이 알 수 있다면 결국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만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우
리는 이것을 <영적인 인식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영
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으므로(14절)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습니다.
영적인 인식론을 가리키는 영성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상당히 왜
곡되기도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영성이 아주 비현실적인 어떤 능력으로 간주됩니다. 40일 금
식기도를 마치고 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어떤 주술적인 능력 같은 것을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성은 별 것 아니라고 폄훼 되기도 합니다.
영성은 아주 비이성적인 현상으로 종교적으로 편협한 사람들의 자기 도
취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한쪽에서는 영성의 배타적 우월성을 강조하
고, 다른 쪽에서는 그것의 편협성을 강조합니다. 양측 모두 영성을 비이
성적인 현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영적인 인식론의 근거라 할 영성은 주술적 능력이 아니
라 가장 철저한 이성적 해석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애매한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세계보다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애매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을 그러려니, 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따라갈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7,80년 동안 끊임없이
자기만을 생각하면 살아가고 있는데, 즉 자기만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불확실한 것입니다. <잔치에 초청 받은 사
람들>이라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와 있듯이 모두가 자기의 현안에만 삶
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왕의 초청이 궁극적 관심거리가 아닙
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왕의 초청은 아주 어리석은 일에 불과합니다.
결국 그들은 소를 사러간다, 아들 장가를 보낸다, 밭을 산다, 등등의 이
유를 들어 초청을 거절합니다. 그들은 이성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
장 가치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현안이라고 생
각한 것들은 사실은 아주 추상적인 일에 불과했습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실제로 추상적인 일과 리얼한 일을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살아간다는 점
에서 가장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인식의 리얼리티
바울이 말하는 영적인 사람의 인식론적 리얼리티는 바로 그리스도
생각(마음, Sinn)에 달려 있습니다. 그는 이사야서 40:13,14을 인용하면
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에는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알아서 그분의 의논
상대가 되겠느냐?"고 하였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고 있습니
다.(16절). 이사야는 인간의 인식은 하나님에게 닿을 수 없다는 점을 강
조하고 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야말로 영적인 인식의 리얼
리티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왜, 그리
고 어떻게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는가에 대해서 아는 것은 세상
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지혜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영
적인 인식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고 그 사실에 근
거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에게서도 판단 받지 않습니
다.(15절). 이 세상의 궁극적인 비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
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에게서 인간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궁극적으로 생명의 완성인 부활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보다 더 본질적이고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은 이 세상에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영적인
지혜를 가진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헤아리고 반
성하면서 살아갑니다.
                        <6월29일>


고린도전서 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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