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긴장감
고린도교회의 특수성
편지는 일반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보내는 게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용무가 있을 때 보냅니다. 바울도 여러 경로를 통해서 고린도교회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편지를 썼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아주 독특했고, 그 안에 있는 고린도 교회도 역시 독특했습니다. 예컨대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오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기도하거나 말씀을 전할 때 남자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하고, 여자들은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로마가톨릭의 미사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미사보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찬식 때 서로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거나, 술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들은 고린도교회의 독특한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우상숭배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8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8장에서 말하는 우상숭배 문제는 주로 시장에서 사먹는 고기에 관한 것입니다. 그 당시 고기는 대개 신전에서 바쳐졌던 것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런 고기를 사먹어도 되는가 아닌가 하는 논쟁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상은 원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전에 바쳐졌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먹는데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자유를 강조한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양심이 약한 사람들이 이런 일들로 인해서 시험에 들린다면 자기는 고기를 절대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우상으로부터 자유롭지만 형제와 자매를 위해서 그 자유를 유보하겠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제 10장에서 다시 우상숭배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8장에서는 구체적인 문제인 (소)고기만을 언급했지만 10장에서는 훨씬 포괄적인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 내용은 구약의 사건들과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연결시키면서 설명하기 때문에 마치 신학논문처럼 조금 복잡합니다. 우선 그가 예로 든 구약의 이야기를 간단히 간추리는 게 좋겠습니다.
홍해와 광야
본문 1절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인도로 모두 홍해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2절에서 바울은 이 사건을 일종의 세례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과 더불어 산다는 의미의 세례와 같은 의미입니다. 유형론적 해석처럼 보이긴 하지만 양쪽 모두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것이니까 그의 해석은 옳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넜을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5절) 자신이 선택해서 애굽으로부터 탈출하게 하셨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으며 광야에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두 죽게 했습니다. “그 시체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5b) 그 이유가 5-10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들은 악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악은 우상숭배입니다.(7절) 바울은 출애굽기 32:6절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백성들이 앉아서는 먹고 마셨고 일어서서 춤을 추었다.”고 말입니다. 우상숭배는 곧 음행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2만3천명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평을 하다가 죽음의 천사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10절) 바울은 이런 일련의 예를 일일이 제시하면서 그것은 악을 행하면 안 된다는 경고라고 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설명을 고린도교인들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을 죄책감에 떨거나 주눅 들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그것이 바로 오늘 “세상의 종말”을(11b) 앞에 둔 기독교인들에게 교훈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은 단지 시간적인 종말이라기보다는 예수 사건으로 인해 선취된 카이로스로서의 종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면 그것은 곧 영적인 차원에서 종말이 시작된 것이니까요. 즉 기독교인들이 이제 새로운 시간에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서 홍해를 건넜지만 결국 광야에서 모두 죽고만 구약의 이스라엘 조상처럼 우상숭배와 악을 행하지 말라고, 즉 영적인 긴장감을 늦추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원파
고린도교인들이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그러나 이미 잘 알고 있는 구약의 끔찍한 사건들을 열거한 다음에 바울이 정작하고 싶은 이야기는 12,13절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지만,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약성서 학자 C.K. 바레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한 부류의 영지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헬라 지역에 영지주의가 광범위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가현설이 초기기독교 안에서 매우 강력한 가르침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바레트의 설명은 옳습니다.
영지주의들의 주장은 명백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와 성만찬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 어떤 악과 죄를 범한다고해도 자신들의 영적인 구원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주 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아니 믿음으로만 본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돈독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있는 믿음이 아주 좋은 신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일과 상관없이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도덕적인 문제까지 초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상 앞에 가서 함께 무엇을 먹든지 그 당시에 퇴폐적인 윤리를 따르든지 아무런 상관없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거의 광신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이 세상의 삶과 아무런 상관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구원은 실제적인 구원이 아니라 단순한 심리적인 구원입니다. 심리적으로 위로를 받을 뿐이지 실체가 없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박옥수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구원파입니다. 구원파는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던 영지주의자의 짝퉁인 셈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받은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한편으로 구원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높이 사야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구원과 믿음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큰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늘 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실존적인 삶의 무게를 저들은 간단하게 해체해버립니다. 그렇지만 다시 이 세상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겉으로는 모든 걸 해결한 것처럼 시늉을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삶에 지쳐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구원에 대한 확신 가운데 몰입하려고 애를 씁니다. 악순환에 빠진 셈입니다.
구원파는 노골적으로 그쪽으로 떨어져나간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정통교회 안에서 적지 않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공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왔으니까 구원받았고, 다른 이들은 지옥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사는 거야 당연하고,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이 극단화하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향에서 기독교 신앙을 파괴합니다.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을 지옥에 떨어질 사람 취급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잘못이고 신앙적으로도 잘못입니다.
일전에 가까운 곳에서 의사생활을 하고 있는 친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더군요. 포항에서 의사회의 모임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기독교인 의사와 비기독교인 의사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특히 기독교인 의사들은 비기독교인 의사들을 흡사 벌레 보듯이 한다는 군요.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뉘앙스였습니다.
“예수구원, 불신지옥”이라는 공식에 의해서 일어나게 될 또 하나의 왜곡은 오늘의 삶 자체에 대해서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삶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는 곧 신앙과 삶의 분열입니다. 그들에게서 신앙과 삶의 일치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태계가 허물어지는데도 그걸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소외되고 억압받는데도 나 몰라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자신들의 이익에 관계되는 일에는 체면 몰수하고 극단적으로 투쟁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늘나라만 사모하는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의 손해는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지난 몇 달 동안 서울 영락교회당에서 사학법 재개정을 위한 기도회와 삭발 사건이 몇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 일들은 정치적인 것들입니다. 서로 찬반으로 논쟁할 필요는 있겠지만 순교의 정신으로 투쟁할 사안은 아니겠지요. 이런 일들은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게 아닐는지요.
시련 가운데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은 그렇게 넘어지는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겁니다. 영혼만 구원받으면 되니까 어떻게 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신앙에서는 영적인 긴장감이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기독교인들은 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생각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이 무뎌진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이며, 무엇이 세상의 요구를 따라가는 건지 판단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믿는 우리의 마음보다도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무조건 믿는 것은 광신자들, 사이비 이단들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즉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긴장감을 갖고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일상에서 감당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릴 때 이런 데 마음이 쏠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풍요롭게 살아야겠다는 욕구가 왜 우리에게 없겠습니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시험에 들기도 하고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13절 말씀에 ‘시련’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는 걸 보면 아마 고린도교회에도 이런 일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은 그들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13절) 그렇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책망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권고하며, 거기에 만나게 되는 시련들을 이길 수 있다고 용기를 줍니다. 물론 누가 보더라도 힘든 시련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가, 그런 영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십시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에게 운명을 맡긴 사람들은 이 현실과 투쟁하면서 겪게 되는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길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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