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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영적 자유의 토대

영적 자유의 토대

고린도전서 4:1-5, 주현절후 8째 주일, 2011년 2월27일

 

     지금 우리에게 바울은 위대한 사도요 신학자요 영성가요 성경 집필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살던 당시에는 별로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방 그리스도교의 태두입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별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보도에 따르면 바울은 거의 이단 논쟁이라고 이름 붙여도 괜찮을 정도로 그들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교에서 파송한 사람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와서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만이 아니라 토라와 할례도 병행해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가르침을 가리켜 ‘저주받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를 공개적으로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마게도냐, 아가야 등, 지금의 그리스 지역으로 선교의 자리를 옮겼습니다.(행 16:6-10 참조)

     바울이 그리스 지역에서 세운 교회 중의 하나가 오늘 설교 본문의 배경인 고린도교회입니다. 바울이 세웠다고 해서 교회가 일사분란하게 바울이 원하는 식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도자들도 나름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선교가 바울만으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컨대 로마교회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기 전에 세워졌습니다. 고린도교회 구성원들 사이에도 세력 다툼이 적지 않았습니다. 고전 1:10-17을 보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우들이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복음공동체에 이런 분파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더구나 이 분파에 그리스도 파가 따로 있다는 사실은 해괴하기까지 합니다. 지금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 등이 살아있던 시절에도 이렇게 파가 나뉘었다는 걸 감안하면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교 분열도 이해가 가긴 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분열이 정상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게바와 아볼로는 바울과 신학적인 차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당시에 교회를 이끌어가던 훌륭한 일꾼들이었습니다. 자신을 포함해서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분파의 장본인이 되었다는 현실을 그냥 두고 넘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해명이 필요했습니다. 그 해명이 고전 1-4장의 내용입니다.

     고전 4:1-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만약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분리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주인 행세를 하기 때문에 분리되겠지요. 바울은 일단 자신들이 일꾼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 일꾼에게는 두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적인 속성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속성으로 ‘충성’된 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 2절) 하나님의 비밀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이것이 비밀인 이유는 밖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일단 그 비밀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비밀,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충성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특별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당연한 사실을 그대로 따르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래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정작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인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며, 오직 그리스도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겁니다. 이 사실을 그는 3a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고린도교회에서 파당이 일어나면서 얼마나 많은 소문과 험담들이 오갔을지 상상이 갑니다. 바울을 흠집 내는 이야기도 많았겠지요. 바울은 보기에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약점이 적지 않은 사람입니다. 일단 예수님을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열두 사도에 들지 못합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가 되기 위한 자격은 주님의 부활을 경험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역사적으로 볼 때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 안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다만 먼 훗날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이 경험은 사도들의 경험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런 약점 때문에 바울은 사도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당시에 많았습니다.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도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기도 했습니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구차스럽지만 바울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몸이 약하기도 하고, 성격이 과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험담을 들었지만 바울은 본문에서 사람들의 그런 판단을 작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일꾼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집불통이기 때문에 이런 발언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은 다 틀렸고 자기만 옳다는 말도 아닙니다.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고전 4:3b) 참으로 놀라운 진술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자기의 판단에서도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판단에 묶입니다. 설령 자기 판단의 논리가 부족하더라도 그것을 무조건 방어하고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주장이 허물어지면 자기의 인격 전체가 허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싸울 때 처음에는 서로 논리적으로 대하다가 나중에는 감정적으로 대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집단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폭력까지 행사합니다. 종교전쟁까지 일어납니다. 사람이 이성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생각과 신앙에 확신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는 4a절에서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 아닌지, 무엇이 참 복음이고 무엇이 사이비 복음인지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신학논쟁에서도 늘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전했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의 자신감에 찬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판단이 진리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판단과 인식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사람은 질그릇과 같습니다. 질그릇이 토기장이의 뜻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예외는 없습니다. 자연과학자들도 모든 것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의사들이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 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문제에서도 모두가 동의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서로 입장이 다를 때가 있었고, 사도들도 똑같았습니다.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런 일은 반복되었습니다. 판단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4b절) 이런 영성이 쉽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서로 자신들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한 채 상대방의 신앙행태를 비난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아닌지 서로 입장이 달랐습니다. 여러 은사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머리에 수건을 써야하는지 등등의 문제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고기를 먹어도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절제하는 게 좋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을 절대화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만이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이르면서 주님이 어둠에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했습니다.(5절) 종말에 모든 것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고전 13:12절에서 그는 주님이 오시기 전인 지금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거울로 보는 것과 같고, 주님이 오셔야만 얼굴을 대면해서 보듯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주님이 오시는 때는 어느 때는 예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2천 년 전 유대 청년의 모습 그대로 오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설명한 대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수는 없습니다. 그 예수는 이미 부활체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의 재림은 부활 생명이 그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때를 가리켜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종말은 마지막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기자는 새롭게 시작되는 세계를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그때는 씨앗의 세계로부터 꽃의 세계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생명은 씨앗 안에 꽃이 숨어 있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실증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무죄한 자의 죽음을, 악의 원인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먹이사슬로 지탱되는 이 세상의 생명 메커니즘을 지금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때가 되어야 지금 우리가 잠정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의 속살이 완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마치 개인의 운명도 죽음을 통과해야만 그 실체가 드러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시는 종말 이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바울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긴 했습니다만, 그 말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새겨들어야 합니다. 바울도 끊임없이 판단하고, 때로는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중에 논쟁을 하셨습니다. 안식일 논쟁은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계급에 속한 사람들과의 논쟁으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이런 논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독단적인 태도입니다. 진리의 차원에서 논쟁을 하는 것과 자기와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독단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전자는 종말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과거의 차원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에서 시작된다면, 후자는 다른 것에 종속적인 영혼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위의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의미가 없이 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 신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 사람들이니 이런 문제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지금 바울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다시 보십시오. 서로 자기가 잘난 것처럼 파당을 짓는 상황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싸웁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서로 편이 갈렸습니다. 마치 한국교회의 분열과 비슷합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루터교 등으로 갈렸습니다. 서로가 판단하고 판단을 받습니다. 세상살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편을 만드는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시대정신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소진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인 시야를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십시오. 그분만이 무엇이 알곡이고 무엇이 쭉정이인지 판단하십니다. 그분만이 무엇인 참 생명이고 무엇이 거짓 생명인지 구분하십니다. 그분의 판단에 여러분의 삶을 맡길 때 여러분의 영혼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이 자유는 무엇이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방종의 자유가 아니라 바울의 표현처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겠다는 겸손한 자유입니다.

고린도전서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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