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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영혼의 투쟁 (호 6 : 1 - 6)

▣ 들어가는 말

- 천 개의 얼굴을 지닌 사람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찾아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몰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지요.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먼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참 많은 얼굴을 하면서 살아온 것 같습니다.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사람 좋은 웃는 얼굴이기도 하고, 때로는 저리도 찌질할 수 없다 싶을 그런 비굴한 얼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스스로 대견할 만한 조금은 근사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그 많은 얼굴 중 어느 것이 진짜 내 모습일까요. 쉰이 넘어서야 조금씩 깨닫습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런 욕망이 오히려 삶을, 내 영혼을 망쳐왔다는 것을. 사는 거, 참 어렵습니다. 특히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은 더더욱이요. 무수한 시간 속에서 실수도 하고 배신도 하고 …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모습이 진짜 나였던 걸까요. ‘인심만 안 잃으면…’ 끝까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사람다움의 마지막 보루는 ‘인심’ 즉,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에서 다양한 사건과 상황과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 속에서 ‘인심’ ‘사랑’을 지키면 사람다움을 벗어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음란한 여인을 사랑하라

작년에도 한 번 호세아를 가지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원고를 찾아보시면 조금 더 디테일하게 호세아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호세아서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어려운 점은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리실 수가 있을까요. 누구나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을 맞아 아내로 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인데, 처음부터 음란한 여인을 맞으라니요. 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분명 우리가 가진 상식적인 생각을 깨뜨리는 ‘그 무엇’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호세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부르심 혹은 임재. 호세아라는 인물의 신경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호세아라는 남자와 고멜이라고 하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고, 그 사랑의 이야기는 신의 계시, 신의 뜻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니 “음란한 여인을 사랑하라”는 신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런 표현을 사용했는지, 그런 표현을 통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탐구해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고대인들의 사랑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서로 사랑하고 가정을 만들고 아이를 낳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사랑의 모습을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고대 근동의 세계에서 볼 때, 호세아와 고멜의 사랑은 뭔가 달랐고 특별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세계에 찾아볼 수 없는 한 남자의 특별한 사랑,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를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 아닐까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훨씬 더 차원이 높은 신의 사랑,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려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의미를 함께 탐색해 보겠습니다.

 

▣ 사랑, 그 위대함에 관하여

- 사랑

철학적으로 볼 때,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완성을 향한 투쟁입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사랑에 관해 논합니다. 사랑에 대해 이렇게 다양하고 깊이 있고 밀도 있는 논의를 하는 책은 보지 못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고상하게 살려는 사람들의 일생을 인도해야 할 원칙은 가문이나 지위나 재산이나 그 밖의 어떤 것에 의해서 보다도 사랑에 의해서 가장 잘 세워질 수 있습니다.” 캬~ 멋있지요. 사람이 사람으로서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진정한 사람이 되려 하면, 일생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이끄는 원칙은 기껏해야 돈이나, 지위 따위가 아니라 오직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원칙을 좇을 때, 사람은 완성으로 나아간다는 뜻일 겝니다.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이야말로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성숙하는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위대한 신학자다운 말이지요.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학문이나 훈련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사랑을 자유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이 가장 근원적인 바람은 자유인데, 그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고 본 것이지요. 역시 대가들의 통찰은 남다릅니다.

저는 이러한 철학적 관점들이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호세아서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세아서는 그저 이상하고 지독한 사랑 이야기를 전해주는 수준 낮은 막장드라마가 아닙니다. 호세아에는 사랑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 들어 있습니다.

- 사랑의 저주

호세아는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됩니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요. 그 사랑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듭니다.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여자를 그렇게 진지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고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과 사람과 여인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사랑이 삶을 이렇게 풍요롭고 아름답게 하는지, 삶을 근원적으로 다르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에게 고멜은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그리도 아플 줄 어찌 알 수 있었을까요. 지독한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당시의 세상이 여인을 그저 생식과 번식을 위한 수단, 많은 아이를 낳아 번성하고 재산을 불려줄 수단으로 여기던 때에, 그는 고멜을 온전한 사람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으로, 심지어 그녀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을 사람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하다 보니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인들을 데려다가 산당에서 술을 먹이고 신에게 희생 제사 드린다는 빌미로, 태를 열어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어처구니없는 명분을 가지고 성행위를 강요하고 짓밟은 끔찍한 만행들이 보입니다. 자신의 연인 고멜도 다른 여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달이 차지 않았는데 아이를 낳습니다. 첫째 아들 “이스르엘”입니다. 분명 자기의 아들이 아닙니다. 희생 제사의 성적인 일을 통해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를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마음이 찢어집니다. “하나님이 흩으신다.” 뜻의 이름을 짓습니다. 마음이 갈가리 찢기고 흩어집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자꾸만 갈라집니다. 의심이 생기고 흔들립니다. 두 번째 딸 아이를 낳습니다. “로루하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다” 도저히 그녀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한 번은 실수할 수 있다고 되뇌며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딸 아이마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의 아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 세 아이 모두 자기 아이들이 아닙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1:9) ‘너는 내가 사랑한 여인이 아니야’, ‘너는 내 아내가 아니야’. ‘나도 이젠 너의 남편이 아니야’. 절규합니다.

당시의 사람들 누구도 하지 않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주었건만, 세상 모두가 여인을 가축처럼 대할 때, 온전한 사람으로, 존귀한 사람으로 섬기며 사랑했건만, 그 사랑과 존중이 배신으로, 업신여김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니요. 그의 사랑은, 마치 저주 같습니다. 이렇게 지독히도 아픈 고통과 불행이 또 있을까요. 미칠 것만 같습니다.

- 영혼의 투쟁

그 여인은 집마저 나가버립니다. 배신감에 치가 떨립니다. 그런데,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호2:1)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9-20) 오히려 더 사랑하라 합니다. 딸 로루하마의 이름을 ‘루하마’(긍휼히 여김)로, 아들 로암미를 ‘암미’(내 백성)로 바꾸고, 자기 아이처럼 아끼고 사랑하라 합니다.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3:2) “너는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3:1) 집 나간 아내를 돈을 주고 다시 사와 그녀를 진실하게 사랑하라 합니다. 온전한 남편이 되어주라 합니다. 너의 사랑이 진정으로 사랑인지 살펴보라 합니다. 마치 시혜 베풀듯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말합니다. 너는 고멜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너 자신만을 사랑한 것 아니냐 묻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삶을 끊임없는 투쟁으로 보았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가장 깊은 투쟁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본능과 이기심, 두려움을 극복하고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 나아가려 싸움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의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사랑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사랑이 우리를 진정한 자유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삶의 완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호세아가 말하려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사랑은 이러한 영혼의 투쟁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자신을 초월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며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되는 것이지요. 사랑은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 삶을 완성으로 이끄는 여정입니다. 호세아는 고멜의 배신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경험합니다. 고멜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녀를 다시 받아들이는 호세아의 행동은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명령, 운명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비롯된 선택입니다. 이는 단순한 순종, 복종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자기희생과 영적 성장을 이루려는 투쟁입니다. 사랑은 때로 아픔과 상처 속에서 우리를 완성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랑이 호세아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 신의 부르심은 사랑으로 부름이다.

호세아서에서 분명한 것은 호세아를 향한 신의 명령, 부르심은 사랑으로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4: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여기에서 ‘지식’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입니다. 사랑을 알지 못해 망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애’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단순한 자비나 사랑을 넘어 끊임없는 사랑, 충성스러운 자비 등을 의미합니다.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한 가지는 오직 사랑이며, 그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사랑, 그것이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 전체, 하나님의 뜻은 한 마디로 진실한 사랑뿐 아닐까요.

▣ 나가는 말

- 사랑이 구원의 길입니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투쟁’ 이라는 개념은 사랑이 삶을 완성하는 과정이라 말합니다. 사랑은 결코, 쉽지 않고 때로는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지만, 그 투쟁 속에서만 우리는 삶의 완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투쟁’, 다른 말로 ‘사랑의 투쟁’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으로 성숙,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결핍을 채우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합니다. 사랑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해집니다. 사랑은 상처와 고통 속에서 더욱 깊어지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한 사랑으로 우리는 비로소 자유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명령이며, 동시에 가장 큰 도전입니다. 호세아의 사랑에는 극심한 고뇌가 따릅니다. 배신과 아픔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투쟁을 지속합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용서와 인내를 요구합니다. 호세아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랑의 깊이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결국, 그의 투쟁 속에서 구원이 싹트며, 사랑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닮아가게 됩니다. 사랑이 여러분의 삶을 온전히 완성하는 여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구원의 길입니다. 사랑만이 참사람의 길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호세아와 같은 사랑의 용기를 주시고,

사랑을 통한 영혼의 성숙을 이루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사랑을 통해 완성되도록 인도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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