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소명
아나돗의 예언자 예레미야
예레미야 1:1-3절에 예레미야의 신상에 대한 몇몇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그는 아나돗에 사는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아나돗은 제사장 아비아달이 솔로몬의 왕위 등극 이후 추방당한 곳입니다. 몰락한 제사장들이 유배당했던 지역인 셈입니다. 이곳 출신 예언자들은 당연히 사독 계통의 후손들이 제사장직을 독점하고 있던 예루살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겠지요.
예레미야가 야훼의 말씀을 받기 시작한 것은, 즉 신탁(神託)이 내리기 시작한 것은 요시야재위 13년이 되던 때였다고 합니다. 7세기 초입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멸망당했고,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기 얼마 전입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아 왕과 나이가 비슷하니까 대충 20살 안팎의 나이에 야훼의 말씀을 받기 시작해서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킴이 왕위를 물려받은 시기와 또 다른 아들인 시드키야가 왕위를 다시 물려받고, 결국 유대귀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던 기원전 587년 전후까지 그는 매우 오랫동안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이런 설명을 들은 여러분은 예레미야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실 겁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예언자로 활동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옳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집단인 예언자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기 말아야 할 사실은 예레미야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역사 과정에서 등장한 예언자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확고한 영적인 권위를 확보하고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일관성을 확보하지도 못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점쟁이 비슷한 역할도 했고, 국가와 왕을 종교적으로 보위하는 역할도 했고, 때로는 사람들을 거짓말로 선동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금 더 냉정하게 본다면 오늘 우리가 구약성서에서 발견하는 예언자들보다는 사이비 예언자들의 활동이 그 왕성했습니다. 다행히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몇몇 참된 예언자들이 역사에 등장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예언자 전통이 확립되었습니다. 예언자 전통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서, 여러 세력의 각축을 통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역사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예레미야라는 예언자의 소명 장면을 읽었습니다. 그 자리에,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야훼 하나님의 선택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내렸다고 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났습니까? 예레미야는 야훼 하나님이 예정하고 세우신 특별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옳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실제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야훼는 무슨 방법으로 예레미야에게 말을 걸 수 있을까요? 예레미야는 야훼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을까요? 아니면 예레미야의 주관적인 깨달음일까요? 어느 순간에 그에게 임한 확신일까요? 모차르트는 무슨 소리를 듣고 작곡했을까요? 이런 걸 분간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요즘도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처럼 말하고 다닙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가 들은 야훼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맙시다. 그것은 예레미야의 고유한 체험이기 때문에 우리가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대신 그가 들은 말씀의 내용으로 들어가는 게 좋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 문제가 조금씩 해결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5a절 말씀은 야훼께서 예레미야를 뽑아 세웠다고 합니다. ‘뽑아 세웠다’는 히브리어 ‘야다’는 ‘안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지적인 앎을 넘어서는 총체적인 인식을 가리킵니다. 이런 일들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5b절은 야훼께서 예레미야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예언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한 인격체가 구체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야훼가 그를 예언자로 삼았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야훼 말씀을 자신의 개인적인 실존 경험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야훼의 말씀은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삶을 초월하는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런 말씀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들립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삶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결국 자기가 잘되기 위한 것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고 기도 많이 해서 복 받고 살자는 것입니다. 복 받지 못한다면 말씀도 없고, 봉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신의 운명을 뛰어넘어서 활동하는 야훼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야훼의 말씀과 대면했습니다.
아! 야훼 나의 주님
자신을 예언자로 삼았다는 야훼의 말씀을 경험한 예레미야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였습니다.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6절) 예레미야는 ‘아!’라고 탄식합니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외침입니다. 그는 자신이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아이이며, 다른 하나는 말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레미야의 나이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스무 살 안팎이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겠지만 스무 살의 나이는 한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어려보이는 걸 분명합니다. 그는 말솜씨가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렇게 타고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레미야가 나이가 든 다음에 말을 잘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대중들이 그의 예언을 듣기 싫어했다는 걸 보면 그가 대중을 쥐락펴락할만한 연설솜씨가 없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의 소명은 여기에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예언자의 일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는데, 야훼의 말씀은 자기에게 압박해 들어옵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딜레마는 오늘도 많은 설교자들이 당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는 불가능성과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실존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딜레마는 단지 설교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려는 여러분이 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잘 모릅니다. 물론 고민하지 않고 단순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하고 봉사하면서 사는 것 말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모든 일들이 이런 방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그대로 살기 어렵다는 사실과 더 근본적으로는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갈등을 겪습니다. 이런 갈등이 없다는 것은 이미 도사가 되었든지 아니면 어떤 것에 완전히 세뇌당한 것이겠지요.
야훼의 소명을 받은 예레미야는 지금 어린 나이와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와 말솜씨 자체가 핵심은 아닙니다. 그는 당대에 아무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리와 직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나이가 어리다거나 말솜씨가 없다는 이유로, 즉 예언을 할 만한 외적인 권위가 없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했습니다. 어린 예언자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주저하고 있는 예레미야를 향해서 주신 야훼의 말씀인 7,8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사람들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7,8절) 17b절에서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인들에게 두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레미야처럼 위대한 예언자도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서 제국의회가 있는 보름스에 갈 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마귀가 제국의회 건물의 기왓장처럼 많더라도 나는 가서 진리를 말하리라.” 그만큼 두려움이 컸다는 말이겠지요. 어리다는 이유로, 말솜씨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예레미야를 휩쌌습니다.
포퓰리즘
예레미야가 우리와 똑같이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두려움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야훼의 명령이 훨씬 강력한 경험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말씀,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야한다는 말씀이 그의 실존 전체를 사로잡았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예레미야에게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야훼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요? 당연히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위대성입니다.
이런 선택이 겉으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참으로 어려운 부분입니다. 성서에는 자세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예레미야는 여기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는 가능한대로 소명을 피하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예언자들처럼 민중들을 적당하게 위로해주고 “다 잘될 거다.” 하고 예언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습니다. 민중들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 하거든요. 예레미야 시대의 대다수 예언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예언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바벨론을 물리쳐주실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것과는 정반대로 예루살렘이 초토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예언은 웬만하면 하기 싫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어렵기도 합니다.
제가 지난 몇 년 동안 진행한 설교비평 작업에서 젊은 설교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서텍스트에 충실한 설교를 하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대중추수주의(포퓰리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퓰리즘는 바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예레미야처럼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인, 요즘 설교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삶의 무게를 놓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갑니다. 만약에 사람들의 평판과 눈치를 넘어설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영과 훨씬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야훼의 말씀
우리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무인도에 가든지 산골짜기에 가지 않는 한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눈치를 직간접적으로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결국 야훼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어느 정도로 사로잡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7b절을 보실까요?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예레미야의 영혼을 울린 야훼의 말씀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두렵지만 야훼의 말씀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씀이 자신의 실존 전체를 휘감았습니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어떤 황홀한 빛에 휩싸이듯이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듯이 그 소리를 따라서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영적인 상태에서 그는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문 건져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8절)
우리 기독교인들은 역할은 다를지라도 모두 예레미야처럼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소명을 받았다는 건 야훼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히 채운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야훼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 이 말씀은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훨씬 분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참된 생명 사건인 이 부활과 말씀의 빛이 여러분의 영혼을 환하게 비추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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