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성령강림후 14주, 2018년 8월26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서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예수는 누군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오해할 수도 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앎 자체가 희미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대한 질문과 비슷합니다. 삶이 무엇인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보여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삶이라는 게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가 누군가에 대한 질문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죽을 때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신앙적인 화두입니다. 질문은 무슨 질문이냐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잘 믿기 위해서라도 질문은 계속되어야합니다. 평생 예수를 믿고 선포한 목사로서 저도 여전히 예수가 누군가, 하는 질문을 껴안고 삽니다.
떠나는 제자들
이런 질문이 복음서에는 직접적으로 나오기도 하고 간접적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6:60-69절에는 간접적인 형태로 나오는 반면에 마 16:13절 이하에는 직접적인 형태로 나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회자되던 소문을 그대로 전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세례 요한으로, 또는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여기에 열거된 인물들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베드로가 나서서 그 유명한 발언을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 이 발언이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기독교의 가장 압축된 표현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실 자라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발언이 오늘 설교 본문인 요 6:69절에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도 베드로가 나섭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발언을 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일부 사람들이 예수 공동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회 출석을 그만둔 것입니다. 요 6:66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들이 떠나게 된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닐 겁니다. 요 6:60절에 따르면 그 이유가 좀 특이합니다. 제자들 중에서 여럿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알아듣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어렵다고 느끼는 것도 상대적입니다. 실제는 어려운 게 아닌데도 자신이 알아듣지 못하면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합니다. 그들이 어렵다고 투덜거린 내용은 예수가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내용은 바로 앞 구절에 나옵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잠시 허기를 면하게 할 뿐이지만 예수가 허락하는 생명의 떡은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이게 무슨 말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자신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수군거리다가 결국 예수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예수를 떠난 제자들이 있었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예수를 직접 만나지 못한 우리도 지금 예수를 믿는데 예수를 직접 경험한 제자들이라면 더더욱 예수 곁에 머물러야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당시에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본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진리는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참아내지 못하기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오늘 여기 모인 분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나름으로 인생을 살아갈 겁니다. 교회에 다닐 때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일단 교회의 책임이 크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런 분들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예수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연민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
일단의 제자들이 떠난 걸 보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도 저 사람들처럼 떠날 생각인가?’ 하고 묻자 앞에서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요 6:68-6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어 자체가 막연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말로 들리기도 하고, 또는 죽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일단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서 영원하게 산다는 말로도 들립니다. 영원한 생명의 반대는 유한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하고 무상한 생명을 살아갑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흔한 표현으로 ‘인생무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머물지 않고 다 지나갑니다. 여러분의 지난 과거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해보십시오.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싶으실 겁니다. 거기에 계속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기는 하나 실제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했던 순간을 지금 여기서 다시 경험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경험이 영원한 생명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생명에 관한 일반적인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수명이 무한하게 연장되는 것을 영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 지금과 같은 삶이 다시 반복되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연장이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만이 무상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창조주이면서 창조의 완성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경험이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지금 이미 여기서’ 영생을 얻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기초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좀더 꼼꼼하게 이 문제를 대해야 합니다. 막연하게 대하면 신앙의 진보는 불가능합니다. 두 가지 관점이 필요합니다. 첫째,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예수에게서 나타났다는 말은 예수가 영원한 생명을, 즉 무상하지 않은 생명을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당시 유대교 전문가들의 가르침과 달랐습니다. 서기관들은 기껏해야 회중들에게 종교적인 정보나 인생 처세술을 전달했지만 예수는 생명을 선포했습니다. 이게 겉으로는 별로 달라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막 2:1절 이하에서 한 가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는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누가 죄를 용서해줄 수 있겠는가.’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유대교 교리로만 세상을 보고 판단했습니다. 교리 문자주의에 떨어진 겁니다. 예수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의 관점에서 판단했습니다. 서기관들은 문자에 얽매였지만 예수는 생명에 붙들렸기에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죄 용서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전통에 묶이는 게 중요한지에 대한 관점이 전혀 달랐습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의 공생애에서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금년 들어서 남북관계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되는 중입니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에 남북분계선을 넘어 남쪽 판문점으로 한번 왔었고, 얼마 후에 문재인 대통령도 판문각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곧 3차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9월 중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찬반이 있습니다. 서기관의 관점도 나름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은 일가가 보인 태도를 보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그런 태도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제법 됩니다. 제주도 예멘 난민을 이슬람교도라 하여 배척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중풍병자에게 죄 용서를 선포한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몰아가는 서기관의 관점입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이 아니라 자신들의 전통과 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려고 모의를 꾸미다가 결국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가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 머물지 말고 그 말씀을 하신 예수와 하나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요 6:57절에서 예수는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표현은 상징이자 은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직접 먹을 수는 없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예수와 그의 말씀을 실제로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를 교회는 성찬으로 표현했습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와 일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차원에서 예수와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몸과 우리의 몸은 다릅니다. 생명의 떡인 예수를 먹는다는 것은 빵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소화되듯이 예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온전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기타도 좋고 오카리나나 리코더도 좋습니다. 악기 연주나 소리에서 아마추어일 때는 악보를 따라가는 것에 급급해서 음악의 깊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상당한 연륜이 쌓이면 오카리나와 자기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오카리나나 리코더 연주에서는 실력이 느는 걸 스스로 느끼는데 기독교 신앙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유는 아주 명확합니다. 저처럼 심심할 때만 가끔 리코더를 꺼내들고 심심풀이로 대하고 있으니 실력이 늘지 않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 정도라도 완전히 손을 떼는 것보다는 나으니 교회생활과의 끈을 이어가십시오. 언젠가 신앙적인 득음의 순간이 득달처럼 달려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예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베드로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확장됩니다.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입니다.’ 거룩하다는 단어는 우리의 일상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들립니다.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그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범접하지 못할 능력이 있습니다. 인도 콜카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평생을 바친 마더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본의 아니게 이름이 유명해진 것뿐이지 그분과 비슷하게 일생을 보낸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의 삶은 거룩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온 내용과 정신세계가 보통 사람들과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삶이 아무리 고귀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호 하기오스 투 데우)라는 타이틀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이 타이틀은 예수에게만 해당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 예수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앞에서 마 16:13절 이하에 나오는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제자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를 거론했습니다. 당시에 가장 위대한 인물들로 평가받던 이들입니다. 이들은 성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예수가 아무리 귀한 진리를 전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온갖 기적을 행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극존경의 대상되는 것만으로는 예수도 세계 4대 성인에 속할 뿐입니다. 세상의 평가는 여기까지이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전혀 다른 존재로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의 토대는 예수의 부활입니다. 바울에게도 예수의 부활이 핵심이었습니다. 고전 15:14절을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다.’ 여기서 예수에 대한 세상의 평가와 기독교의 신앙이 갈립니다. 그들은 예수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봅니다. 여러 성인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근거로 예수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부활을 자연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으니 예수 부활에 관한한 기독교 신앙이 세상의 판단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지성적인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런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자연과학은 예수 부활 사건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연과학의 다음과 같은 특징에 놓여 있습니다. 1) 자연과학은 실험을 통해서 동일한 결과를 보이는 것만 판단할 수 있다. 2) 자연과학은 과거와 현재의 물리현상을 말할 뿐이지 궁극적인 미래는 말할 수 없다. 3) 자연과학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자신들이 모르는 영역이 늘어난다는 사실만 확인된다. 그게 자연과학의 본질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 부활은 반복이 불가능한 종말론적인 생명 사건입니다. 역사 전체를 통해서만 증명이 되는 창조 완성 사건입니다. 자연과학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화론이 옳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성서의 증언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인 것은 결국 선택의 차원에 속합니다. 저는 제자들의 고백, 그리고 교부들과 지난 2천년 기독교 신앙에서 유지되고 선포된 사실, 즉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진리로 선택했습니다. 그런 신앙의 눈이 열리면 예수가 여러 성인의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기자가 살던 시대에 기독교는 별로 큰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에서 오해도 많이 받았고 내부 시련도 많았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생존의 위기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가룟 유다에 대한 코멘트가 당시의 위기를 말해줍니다. 이런 상황은 지난 2천년에 걸쳐서 반복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영적인 위기의 돌파는 오직 한 가지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는 누군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알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에 실제로 관심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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