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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예수는 머릿돌이다

21:33-46, 창조절 다섯째 주일, 2014105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20세기 어느 유명한 유대인 학자가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들이 메시아로 믿고 있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증거가 무엇인가? 메시아가 세상에 왔으면 세상이 완전하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뭔가는 달라졌어야만 했는데, 예수 이전이나 이후나 달라진 게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이후에도 장애로 태어나는 사람들이여전하고, 이유 없이 폭력에 시달리고 그렇게 죽는 사람도 여전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인생이 망가지는 이들도 많고, 빈익빈부익부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모든 사람은 여전히 병에 시달리고 늙어 죽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증거를 대라고 자꾸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마귀에게서 세 가지 시험을 받았다는 이야기도(4) 그런 요구 중의 하나입니다. 1)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봐라. 2)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봐라. 3) 마귀인 나를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주겠다. 예수 당신에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 뒤로도 메시아 증거를 보이라는 유대교 고위층의 요구나 민중들의 요구를 예수님은 거절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모든 악한 권력을 굴복시키고 심판하는 메시아 표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메시아 증거를 보이라고 요구한 사람들이 뭔가를 크게 착각한 것일까요? 그들의 인격이 왜곡되어서 말도 되지 않는 요구를 트집 잡듯이 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방식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 증거에 대한 요구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시아라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먹는 문제로 해결해주고, 고통도 줄이거나 없애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명예를 얻어야 하고, 취미활동도 해야 합니다. 행복한 삶의 조건들을 채워나가는 겁니다. 이런 것들과 거리가 먼 이야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으면 죽기 살기로 싸워서, 그것을 쟁취해나갑니다. 전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피를 흘리더라도 상대방을 제압해서 뭔가를 얻어야만 합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왕들과 장군들이 그런 방식으로 메시아 노릇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의 역사도 이와 다를 게 없습니다. 자신의 요구와 욕망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나 세력을 응징하는 겁니다.

 

오늘 제3독서인 마 21:33-46절에 나오는 비유가 그런 역사를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 농장을 크게 만들어 동네 사람들에게 관리를 맡긴 채 먼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당시 흔했던 부재지주였습니다. 포도 수확 철에 소작료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종들을 때리고 돌로 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주인은 더 많은 수의 종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두 번째로 온 종들도 똑같이 처리했습니다. 소작료를 주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이 비유이긴 하지만 이 세상의 현실과 다를 게 없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높이기 위해서 기회와 능력만 주어진다면 악행을 서슴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방법만 세련되게 바뀌었는지 모르나 실제로는 비슷합니다. 주인은 세 번째로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이 아들만큼은 주인으로 인정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더 나빴습니다. 농부들은 아들이 상속자이니 그를 죽이면 포도원이 자신들의 차지가 된다는 계산을 했습니다.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고나가 죽였습니다.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으로 생각하느냐, 하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대답은 당연합니다. 악한 농부들을 죽이고, 소작료를 낼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 관리를 맡길 겁니다.

 

비유의 내용은 아주 끔찍합니다. 당시 마태복음의 독자들은 이 비유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곧 눈치 챘을 겁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고, 종들은 선지자들이며,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역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거부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4:1절 한 절만 인용하겠습니다.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없는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양심을 뒤흔드는 외침들입니다. 이런 외침은 구약 선지자들의 설교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 누가 이런 말을 듣고 싶었겠습니까? 그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선지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까지 십자가 처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 예수님을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불가사의입니다.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을 위태롭게 하는 반역분자들에게 선고되는 형벌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치신 예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무장 봉기를 획책하지도 않았고, ()로마 혁명을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하는 함정 있는 질문을 받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반로마 혁명가들의 눈에 예수님은 회색분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암시했을 때 제자들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에는 여자들 몇몇만 남아 있었고,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제자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도 이제 모든 게 끝났다 보고 원래 자기들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작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역사에 자주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흩어졌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어서 땅에 묻혔던 예수님이 일정한 시기에 그들에게 나타나신 경험이 그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현상인지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빛에서 예수님의 운명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이를 통해서 오히려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 42절은 시편 118:22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여기서 버린 돌은 그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 수 없는 돌입니다. 그런 돌을 머릿돌로 쓰는 석수가 있다면 그는 제 정신이 아닐 겁니다. 머릿돌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돌인데 그걸 몰라보고 버렸다면 그 석수도 문제입니다. 그런 일들이 가끔 있기는 합니다. 미켈란젤로에 얽힌 일화입니다. 그가 로마에서 돌을 파는 가게 앞을 지나다가 버려진 돌을 보았습니다. 가게 안에 들어가서 주인에게 그 돌을 가져가도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아무 쓸모가 없어서 버린 건데 왜 가져가려고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눈에는 저 돌 안에 피에타 상이 들어 있군요.’

 

오늘 설교 본문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모퉁이 머릿돌을 알아보지 못하고 버린 석수, 또는 장사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들 나름으로는 머리를 굴리고 유대교의 종교 전통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한 일이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겁니다. 사람의 지혜는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처럼 이럴 경우가 많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농부들의 행동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당장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런 일로 인해서 파멸 당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관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이제 다른 이들에게 넘어가야만 합니다. 그 다른 이들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인 제자들과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 사실을 본문 43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은 물론 기독교인들입니다. 이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겁니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그것에 대한 증거가 있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 질문은 설교 앞머리에서 예로 든 어떤 유대인 학자의 질문, 즉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이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받았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일단 눈에 보이는 증거는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다른 이들과 비교할 때 눈에 뜨일 정도로 다른 거는 없습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양심이 바르고 도덕적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뚜렷한 거는 아닙니다. 기독교가 대세인 유럽이나 미국이 이슬람이 대세인 중동 나라에 비해서 더 양심적이라고 말할 증거도 없습니다. 사실 예수 믿으면 달라도 뭔가는 달라야 마땅합니다. 다르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은 늘 상대적인 거라서 그걸 예수 믿는 증거라고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았다는 증거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듯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서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메시아의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 이후에 세상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달라졌고, 기독교인들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달라졌습니다. 다만 그게 은폐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걸 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각이 필요합니다. 특별한 시각이라고 해서 시력이 갑자기 좋아졌다거나 밤눈이 밝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는 투시력이 생겼다는 뜻도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와 동의와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구원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걸 복음이라고 하는 이유는 율법을 지키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방식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의 업적을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웬만해서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44절은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진다고 했습니다. 유대 고위층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도 예수님이 그들의 종교적 업적인 예루살렘 성전과 안식일 법을 상대화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자랑하고 싶은 것들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면 마음이 상하는 겁니다.

 

오늘 세상은 우리에게 확실한 증거를 대라고 계속 요구합니다. 뭔가 그럴듯한 것을 보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일 것이 없습니다. 실제로 변화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변화된 것, 나름으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무런 확신이 없는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삶의 머릿돌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저는 지난 102일 저녁 한동대학교 뉴턴홀 212호에서 포항지역 교우들과 함께 딤전 3장을 중심으로 영성에 대해서를 공부했습니다. 그 공부의 마지막 단락이 오늘 설교에도 맞춤합니다. 기독교인이 영적으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 고전 13:13절에 근거해서 세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첫째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에(과거) 대한 전적인 신뢰로서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것은 창조와 예수 사건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그 외의 것으로 인해서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은 사소한 것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종말에 이루실 것(미래)에 대한 강력한 기대로의 희망입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기자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한 절대적인 생명의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런 희망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에 의해서 좌절하지 않고, 좋은 일들로 인해서 정신을 잃지 않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현재)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실질적 경험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거나, 하나님 나라를 받았다는 증거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살이에서 수많은 요구를 받고 삽니다. 예수 믿어서 실제로 달라진 증거를 대라는 요구, 다른 이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았다는 증거를 대라는 요구에 우리가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 요구가 때로는 광풍처럼, 때로는 속삭임처럼 우리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집니다. 그런 요구 앞에서 당황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그런 증거를 대려고 공연한 수고를 하지 마십시오. 다음의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 머릿돌이 되게 하셨는데, 그 머릿돌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21:33-46
https://youtu.be/eKO0Rxp3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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