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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6:24-35, 성령강림 후 11, 201885

 

24.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오병이어 이후

오늘 설교 본문인 요 6:24-35절 이야기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고 하는 오병이어사건에 이어진 겁니다. 당시에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지금 우리가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어린아이가 자기와 가족의 먹을거리를 예수님에게 가져온 것에 감동한 군중들이 자기의 것들을 내놓은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는 배불리 먹지 못했거나 한 끼 굶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으로 풍성해진 경험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본다거나 책을 읽을 때 배고픈 것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군중들이 예수님에게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메시야로 느낀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다시 발견한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장을 찾아가는 것보다 더 가슴 벅찬 경험이었을 겁니다.

가버나움에서 이뤄진 군중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오늘 설교 본문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이 대화는 선승들의 선문답처럼 보통 사람들에게는 손으로 구름을 잡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십니다. ‘당신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불렀던 기억 때문입니다. 빵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런 빵은 곧 사라지는 겁니다. 그런 빵을 찾을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필요한 먹을거리를 찾으십시오. 영생의 먹을거리는 내가 당신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알듯알듯한 말씀입니다. 군중들은 다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영생의 먹을거리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군중들이 다시 묻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에 대한 표적이나 기적을 당신이 행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과 같은 놀라운 일말입니다.’ 군중들은 지금 모세를 불러들이는 중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군중들이 척박한 환경의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생존할 수 있도록 놀라운 일을 행한 영웅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당신들은 모세 같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당신들의 조상들이 먹은 만나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다는 겁니다. 설령 모세가 만나를 찾아서 먹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해도 그런 만나는 생명을 줄 능력이 없습니다. 만나를 먹은 당신 조상들은 다 죽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참 떡이야말로 당신들의 생명을 지킵니다.’ 군중들의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당신이 말한 그 참 떡을 주십시오.’라고 간구했습니다. 시쳇말로 대박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35절에서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인간 영혼의 실존

이 구절은 요한복음의 압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사람들의 실존을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배고픕니다. 아무리 시원한 음료를 마셔도 다시 목마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이런 허기와 갈증을 느낀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요한복음에는 유독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요 4장에 한 여자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마을 우물가에서 만난 여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당신이 자랑하는 야곱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은 아무리 마셔도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주는 물은 영원한 생명의 생수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는 예수님에게 간구합니다. ‘그런 물을 나에게 주셔서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러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4:15). 이 여자는 아무도 물 길러 오지 않는 정오 시간에 남의 눈을 피해서 물을 길러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 사마리아 여자나 예수 당시의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삶의 어두운 심연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철없는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들도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느낍니다. 제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붉게 물드는 낙조를 보면서, 또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아득한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나는 누군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이 막연하게나마 어린 저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요즘 저는 전성원의 독서 산문집이라 할 길 위의 독서를 읽는 중입니다. ‘홀로 남겨진 자의 낯익은 고독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한 대목을 읽겠습니다. “실제로 나는 일곱 살에 난생 처음 가출을 했다. 통일로 근방의 구파발에 살았던 나는 화창한 가을 오후,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길을 따라 무작정 북쪽으로 걸어갔다. 저 아름다운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길은 끝나지 않았고, 해가 지자 무섭기까지 하여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아마도 그 시절 성취하지 못했던 소망이 나의 닉네임을 바람구두’(windshoes)로 만들었을 것이다.”

굶주림과 갈증으로 표현된 영혼의 고독이라는 실존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찾습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코드가 맞는 친구와 보내는 순간에는 영혼의 고독을 잠시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와 계속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친구와의 대화 자체가 상투성에 빠져듭니다. 예술 마니아가 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영화 보기에 몰두하거나 음악 듣기에 몰두합니다. 본인이 직접 작곡하고 노래하면서 어떤 열광적인 세계로 들어갑니다. 열광적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우리는 어두운 심연으로 돌아옵니다. 여러 종류의 쇼핑에 병적으로 매달리는 것도 영혼의 고독에 기인합니다. 크고 작은 사디즘과 마조히즘 현상도 우리 사회에 종종 나타납니다. 그냥 지나갈만한 일에도 상대방을 공격적으로 대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가족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걸 일일이 따지려면 끝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를 배경으로 본다면 만나에 대한 기억이 영혼의 허기를 면하려는 노력에서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는 단순히 먹고 사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생산하는 데에 삶의 모든 에너지를 쏟습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정의, 평화, 안식, 기쁨 등등의 가치는 모두 사라집니다. 먹고 사는 것에 묶이는 행태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만나 사건에 대한 집착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습득된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영혼의 고독이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들이닥친 군중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6:27). 모세의 만나는 아무리 놀라워보여도 썩을 양식입니다. 당시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잘 먹어도 죽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삶 자체가 역설적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는데 결과는 죽기 위해서 먹는 게 됩니다. 세상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허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생명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먹고도 죽은 광야의 만나가 아니라 결코 주리지 않는 생명의 떡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 생명의 떡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표현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너무 높이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당시의 글씨기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설교하면서 목사님이 어렸을 때...’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어투가 이상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겁니다.

 

생명의 떡

예수님이 왜 생명의 떡이냐, 하는 질문이 중요합니다. 예수에게 오는 사람에게는 주림이나 목마름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그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표현들은 곳곳에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 집을 방문하여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사실은 죽습니다.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병들면 고통스럽습니다. 실직을 하거나 사업이 안 되면 불안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으면 배고픔도 없고 갈증이 없다고, 즉 생명으로 충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 영혼의 문제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영혼이 배부르면 다른 삶의 조건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영혼이 빈곤하면 삶의 조건이 화려해도 삶이 피곤합니다. 이런 말은 공자 왈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실 자체가 중요하기도 하고, 그 사실을 듣는 것에 머물지 말고 실제 삶의 능력으로 삼아야 하기에 반복해서 선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불볕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중입니다. 다음의 두 풍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에어컨이 잘 작동되는 사무실에서 근무하지만 마음 불편한 사람들과 함께 근무하는 사람이 있고, 선풍기만 켜 놓았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는 동료들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혼이 풍요롭다는 말은 삶에 대한 토대가 탄탄하다는 뜻입니다. 그 탄탄한 토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신다.’(6:32)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떡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풍성하게 살리는 참 떡이라는 말씀은 일부 사람들에게 실감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감이라는 말은 실제로 자기의 삶을 끌어가는 대상에 대한 확실한 느낌입니다. 삶에 대한 태도에서 이 실감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여기 초등학교 교사가 있다고 합시다. 학교와 교육청 당국이 요구하는 것을 잘 따라가서 높은 점수를 받아 교감과 교장으로 승진하는 것만을 실감하는 교사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학생들은 이용할 도구가 됩니다. 이용할 가치가 있으면 취하고, 없으면 버리는 대상입니다. 아이들에게 전인교육을 시킴으로써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실감하는 교사가 있습니다. 그에게 아이들은 교육의 목적이 됩니다. 자신의 존재 목적이 바로 아이들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야말로 우리의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요한복음이 반복해서 예수는 생명이라고,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주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는 자유의 원천

저에게 예수는, 그리고 예수 운명과 그에게 일어난 사건은 제 삶의 현실입니다. 그것을 실감한다는 뜻이다. 그런 실감의 하나를 말씀드린다면 예수는 저에게 자유의 원천입니다. 자유는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거나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유는 오히려 궁극적인 것에 의존함으로써 주어지는 삶의 능력입니다. 요한복음 8:32절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진리는 수능고사 성적을 잘 받는 거나 국가의 경제를 부흥시키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충만하게 제공하는 힘이 진리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진리이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자유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저는 예수의 십자가를 내 삶과 운명에서 가장 중요한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거기서 삶을, 즉 살아있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교권과 로마의 정치권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힘에 의해서 죽임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운명을 제가 실감하기에 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하면 죽겠다고 아우성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걸 지금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십자가 운명을 실감하기에 유대교 교권과 정치권력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의 부활 사건도 역시 저에게 실감(reality)으로 다가옵니다. 예수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활 생명으로 경험했습니다. 이 경험은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비밀한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다는 인식이자 고백입니다. 저도 그 제자들의 인식과 고백에 동의합니다. 학생들이야말로 교육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교사처럼 저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내 삶에서 실감합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저에게 주어진 운명을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전업 목사이니 그런 신앙과 경험과 인식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철저히 자본주의 체제로 작동되는 세속사회에 발을 딛고 사는 일반 신자들에게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전업 목사냐 아니냐,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쩌면 전업 목사의 위치는 더 불리할지 모릅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술자가 되어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실감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기독교인이 예수에게 얼마나 가까이 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 신자들에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예수에게 가까이 갈 기회가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누군지, 그의 운명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해도 교회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고, 더구나 세상살이에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점점 더 예수와 상관없는 쪽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여러 종류의 만나만을 더 열정적으로 찾을 것이며, 거기서 어느 정도 성과는 내겠지만 결국에는 주림과 목마름 역시 더 강렬해질 겁니다.

저는 여러분의 개인적인 형편과 여러분이 대면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여러분보다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 사회학자나 경제학자가 아니며, 심리 전문가도 아닙니다. 성경의 세계를 여러분보다 조금 더 알기에 그것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운명에서 일어난 사건에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즉 예수가 우리의 생명 충만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6:24-35
https://youtu.be/N04CVOaqO4s
http://afreecatv.com/nfer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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