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30. 마 2:13-23
이집트 피난 이야기
마태복음 기자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모르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헤로데 왕이 새로 태어난 예수를 죽이려 한 사실을 꿈속에서 천사에게 전해들은 요셉이 아기 예수와 아내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갔다가 헤로데가 죽은 뒤에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와중에 헤로데는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은 그대로 수행되었습니다. 이 명령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이게 역사적 사실인지 도저히 믿겨지지 않습니다. 로마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역사기록에 따르면 헤로데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악하고 잔인한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 아들을 처형시켰고, 자기 장례 때는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게 하기 위해서 각 가정에서 한 사람씩 죽이게 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가 헤로데의 영아살해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헤로데의 성품에 비쳐볼 때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영아살해에 관한 또 다른 유명한 이야기가 모세 출생에 관한 보도인 출 1장에 나옵니다.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이민을 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비교적 잘 적응하면서 살았습니다. 소수 민족이 당해야 할 어려움을 당하긴 했지만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자식도 잘 낳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골칫덩어리였습니다. 이집트 왕은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남자 아이면 죽이고 여자 아이면 살리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절대 권력을 갖게 되면 그 권력이 위협을 받을 때 이렇게 잔인한 음모를 얼마든지 꾸밀 수 있습니다.
마태가 전하는 헤로데의 영아살해 이야기를 읽은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분명히 그보다 훨씬 이전인 모세 시대의 끔찍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했을 겁니다. 더 나아가 모세가 이집트 파라오의 절대 권력을 피해서 생명을 건진 것처럼 아기 예수도 헤로데의 절대 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예수님을 모세의 운명과 비교함으로써 예수님을 드러내려는 게 바로 마태의 집필의도입니다. 그런 흔적이 본문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제가 보기에 세 대목이 이에 해당됩니다. 첫 대목은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영아살해 명령입니다. 이제 나머지 두 대목을 마저 찾아봐야겠습니다.
예수 가족의 이집트 피난이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은 박사들이 물러갔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수소문하다가 헤로데까지 만나게 되었습니다. 헤로데는 동방박사들에게 말하기를 그 아기를 찾으면 자기도 경배할테니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헤로데의 생각은 경배가 아니라 자신의 경쟁 대상이라고 간주한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에게 경배한 후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이 동방박사들이 물러간 뒤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본문입니다. 천사가 꿈에 아기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했습니다. 이집트는 바로 이스라엘의 민족 영웅인 모세가 태어난 곳이며, 이스라엘이 모세의 영솔로 영광의 탈출을 한 곳입니다.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인 엑서더스는 구약성서의 모판과 같습니다. 이 엑서더스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를 횡단하면서 율법을 받았으며, 민족적인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집트라는 지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받을 수도 있는 모세의 운명이 바로 헤로데에게 잡혀 살해당할 수도 있는 아기 예수의 운명과 비슷하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와 관한 이야기인 출 2:1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파라오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의 손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달아나 그곳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세 번째 대목은 아기 예수의 가족이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집트로 피난을 떠났던 요셉에게 천사가 꿈에 다시 나타나 이렇게 알렸습니다.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이미 죽었으니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입니다. 모세도 파라오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피신했다가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을 얻어 다시 이집트로 돌아갑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소수민족으로 고난당하고 있는 이집트를 잊지 않고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돌아갔습니다.
마태는 본문에서 예수의 운명을 모세와 비교하는 게 분명합니다. 마태의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켰듯이,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태공동체는 바로 그 사실을 알리는 일에 전력투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해방자라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그렇게 믿고 있지만 초기 기독교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주변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들은 주변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마태 공동체가 처한 이런 형편을 조금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서 함락당하고 이스라엘과 유대교가 몰락의 길로 떨어질 위기에 닥쳤을 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더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묵인해주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시 기독교는 처음부터 유대교와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에세네파 등등의 여러 계파가 있듯이 나사렛파로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한 분파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절이 끝났습니다. 유대교는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럴 때 예루살렘 공동체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했을까요? 순교가 최선의 길이었을까요? 그들은 유대교로부터 쏟아지는 비난과 박해 앞에서 자신들을 변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최선의 변호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바로 유대교의 전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바로 모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모세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예수 가족의 이집트 피난 사건을 통해서 변증한 것입니다.
구약 인용
아기 예수의 운명이 모세와 비교된다는 사실은 마태의 암시적인 변증인데 반해서 구약성서의 인용은 직접적인 변증입니다. 마태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암시적으로 지적하면서 동시에 예언자들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인용함으로써 예수의 출생 이야기가 구약성서 전체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직접적으로 인용한 구약의 말씀은 모세와의 비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세 대목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요셉은 천사들의 지침에 따라서 가족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습니다. 이 사건을 가리켜 마태는 호세아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호 11:1)
2. 헤로데가 두 살 이하의 아이를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사건을 가리켜 마태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렘 31:15)
3. 헤로데가 죽은 뒤에 요셉 가족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원칙으로만 한다면 그는 당연히 아기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부왕 헤로데와 마찬가지로 잔인한 왕이었던 아르켈라오가 그 지역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했다. 그 순간에 다시 꿈에 나타난 천사를 지시를 받아 요셉은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 동네로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직업이 목수인 탓에 어디를 가든지 먹고 사는 건 크게 걱정이 없으니까 그렇게 과감하게 고향을 등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을 가리켜 마태는 예언자를 시켜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23절)
마태가 아기 예수의 이집트 피난과 연관해서 구약 예언자들의 말씀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용했는지는 끊어서 말하기 힘듭니다. 예컨대 세 번째 인용인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는 예언은 구약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공동번역의 난외주에 그 대목을 판관기(사사기) 13:5,7절이라고 설명합니다만, 그 내용은 좀 차이가 납니다. 판관기의 그 대목은 삼손의 출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천사가 오랫동안 불임이었던 마노아의 아내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아들의 머리에 칼을 대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께 바쳐진 나지르인이다. 그 아이가 비로소 이스라엘을 불레셋 사람들 손에서 건져낼 것이다.”(판관 13:1) 7절에서도 나지르인이라는 사실이 다시 언급됩니다. 나지르는 나자렛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마태가 구약성경을 정확하게 인용하지 못했다는 건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지금 예수님이 바로 구약 예언자들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분이라는 사실을 마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는 중입니다. 그는 치열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하는 데만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언의 성취
이 변증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의 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며,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모세처럼 살해의 위협을 받았고, 쫓겨 다녔으며, 세상의 공격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본문에 꿈, 천사, 예언자 등등의 용어들이 등정하는 이유도 바로 이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기독교 공동체를 핍박하기 시작한 유대인들의 구약성서가 이미 예언하고 있는 바로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 공동체에게 예수님은 구약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대답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왜 옳은지를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게 이해시켜야 합니다. 위의 질문을 조금 달리해서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똑같은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믿지 않을까요? 유대인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또는 하나님이 신약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대답으로 이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위의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마태의 진술은 우리에게 오늘 무엇을 말합니까?
‘예언의 성취’라는 말에서 사람들은 ‘예언’을 점쟁이들이 하는 어떤 것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에게서 신탁을 받아서 선포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특별한 카리스마를 확보한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탁 행위는 철저하게 역사적인 것입니다. 예언자는 신학자요, 역사학자입니다. 역사신학자인 셈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이 역사에서 어떻게 구원 통치를 행하시는지를 예민한 영성으로 파악해서 그것을 선포했습니다. 마태도 역시 이런 예언자의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는 당대에 일어난 예수님의 구원 사건을 과거에 활동한 예언자들의 예언을 근거로 해서 해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예언의 성취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원은 갑자기 하늘에서 땅으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이미 역사적으로 예언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증언인지 모릅니다. 역사라는 말이 여러분에게 확 와 닿지 않는다면 쉽게 삶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삶은 한 순간만 있는 게 아니라 과정이 있습니다. 어린애였다가 청소년이 되고, 장년과 노년이 되는 것이 삶의 과정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한 순간에 머물지 않고 삶의 전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언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의 삶에서, 한민족의 역사에서,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이 너무 거창하게 생각될지도 모르겠군요. 거창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거창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말아야겠지요. 그래도 거창한 질문이 골치 아프면 작은 문제의식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예언의 성취로 다가오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미 오래 전에 선택하신 것으로 믿고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한 순간이 아니라 여러분의 전체 인생에서 말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온 구원 섭리와 계획에 여러분의 마음이 사로잡히고 있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07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금년 한해를 지냈습니다. 곧 2008년이 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잊지 마세요. 이 역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는 예수님에게로 모이고, 그 이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다시 열렸습니다. 종말까지 이런 역사가 계속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 이 긴 역사에서 우리는 지금 아주 짧은 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순간에 불과한 삶이지만 우리는 예언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한 사람이기 때문에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인 영원에 속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역사의 신비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언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종말에 드러나게 될 영원한 생명에 이미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담대하게 2008년을 맞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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