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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부활절 여섯째 주일, 2015510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인생살이를 싸움, 또는 경쟁의 과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극에 달한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말이 정말 절실하게 들립니다. 일종의 시장 논리가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이런 현실을 무조건, 또는 적당하게 피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싸움에서 승리하고 싶으시지요? 오늘 읽은 성경 본문 중에서 한 구절이 이런 싸움의 승리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요한일서 5: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 구절에는 두 가지 명제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인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이긴다.’는 명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승리는 믿음이라는 명제입니다. 이걸 줄이면,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말씀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현실성은 좀 떨어진다고 느낄 겁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늘 승리하지는 않습니다. 실패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입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승리라고 말입니다. 세상살이와 믿음생활을 분리해서 보는 겁니다. 그래서 가능한 대로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만 바라보려고, 즉 세상으로부터 수도원으로 도피함으로써 영적인 안식을 누리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정통 기독교가 아니라 영지주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영지주의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봅니다. 인간의 육체도 악합니다. 오직 하늘의 영원한 세계와 인간의 영만이 선합니다. 악한 세상과 관계 맺는 것, 악한 육체에 관련된 일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와 그 육체로 살아가는 세상을 부정하고 순수한 영의 세계에만 집중하라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은 이런 영지주의를 배격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이는 형제를 부정하는 건 거짓말입니다(요일 4:20). 요한만이 아니라 교부들로 대표되는 정통 기독교는 순수 심령주의에 빠진 채 세상을 등지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온갖 불의와 왜곡과 미움이 범벅되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세상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있어야 합니다. 도피주의는 기독교 안에 발붙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실존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세상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기독교 신앙으로 살려면 많은 충돌을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믿음이 승리라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이를 승리주의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승리주의는 매력적입니다. 저도 다른 일에서는 열을 내지 않는데, 테니스 게임에서는 이기려고 전력을 다 합니다. 승리에 대한 욕망은 그것이 선하든 않든 상관없이, 진보냐 보수냐를 불문하고 아주 강렬합니다. 제가 신학대학교 다니던 70년대에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자주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승리하리.’입니다. 영어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We shall overcome.’입니다. 가사를 조금 더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 승리하리. 어느 날. , 마음 깊이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 미국에서 흑인 인권 운동과 노동 운동을 펼칠 때 자주 불리던 노래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이 노래를 애창했습니다. 사회 소수자들과 박해받는 이들을 위해서 투쟁할 때 이런 노래를 부르던 전통이 이 노래 담겨 있습니다. 데모 할 때도 함께 불렀습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날 때도 자기편 사람들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서 이런 찬송을 부르곤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기복주의 신앙도 따지고 보면 승리주의입니다. 기복주의 자체가 유치하기도 하고, 실제로도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더 나가서 반()기독교적인데도 불구하고 교양 여부를 떠나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데 기울어지는 이유는 승리주의 매력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패배주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즉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실업자가 되고 고생을 바가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살이 문제는 기독교 신앙과 직접 관련되지 않습니다. 믿음 생활을 잘해도 삶이 힘들어질 수 있고, 믿음 생활을 시원치 않게 하거나 아예 신앙이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승리의 길이고, 또는 승리는 바로 믿음에 있다.’는 본문의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을 가리킵니다. 5절은 믿음의 내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명제에서 시작되고 이 명제로 집약됩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는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나사렛에서 자랐고 서른 살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출가하고 3년 가까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한 자연인을 가리킵니다. 그는 우리와 다른 게 하나도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배고프고, 외롭고, 감기 들리고, 배설하고, 울고 웃으면 살았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역사에 제한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그를 베레 호모’, 즉 온전한 인간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존재를 가리킵니다. 역사에 제한받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세상과 인간을 구원할 신적인 존재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제는 둥근 삼각형이라는 말처럼 형용모순입니다. 어떤 사물이 기체이면서 동시에 고체일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초월적인 존재가 어떻게 내재적인 존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신약성경은 한결같이 인간 예수가 바로 초월적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즉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제시했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예수라는 형태는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나름으로 합리적인 주장입니다. 우리의 몸은 세월과 더불어서 늙고 죽어서 썩습니다. 잠시 이 땅에 머물러 있기는 했지만 곧 없어지고 맙니다. 그걸 신적인 속성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6절에서 역사적인 실존 인물인 예수를 거듭해서 강조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뿐만 아니라 세례도 받으시고 수난의 피도 흘리셨습니다.

 

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당시 다른 유대인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수난의 피를 흘렸다는 것은 당시의 로마 역사에 깊숙이 관련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합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받아들이기 더 힘들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동의하기 어려운 교리였습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영지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성을 강조한 에비온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인간 예수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게 아니라 나중에 신성을 입은 인간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대적 에비온주의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깨닫게 해준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와 비슷한 역할로 생각합니다. 부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믿으라고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가르쳤습니다. 불교도들에게 부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위대한 정신적 멘토입니다. 정통 기독교는 예수의 인간적 요소를 부정하는 영지주의를 배격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신적 요소를 부정하는 에비온주의도 배격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제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설명이 좀 복잡하게 들리시나요? 이런 교리적인 문제가 실제 신앙생활이나 세상살이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와서 예배 잘 드리고, 가능하면 기독교인답게 모범적으로 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리와 신학이 잘못되면 실제 신앙생활도 잘못됩니다. 세계관이 잘못되면 그 사람의 인생살이가 점점 왜곡되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의 사도들과 교부들은 이런 신학적인 문제를 좋은 게 좋다.’ 식이 아니라 진리 논쟁의 차원에서(요일 5:6) 접근했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할 순간이 왔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왜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까? 그 답을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다음 구절인 요일 5:11,12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본문은 과감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믿음이 승리의 길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런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이런 말을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로 넘어갑니다. 생명 문제에서 절실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위 구절은 승리에 대한 5절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도 바쁜데, 돈 벌고 자식 키우고 자존심 지키며 사는 것도 힘든 마당에 예수와 생명 문제를 어떻게 절실하게 생각할 수 있느냐고 속으로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냥 세상에서 재미있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20년 전과 20년 후를 하나로 놓고 생각해보십시오. 40년의 세월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그 세월 동안 우리에게 남는 게 무엇인지도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여러분들은 별을 보신 적이 있나요? 천억 개로 구성된 은하계 안에서 지구는 점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작습니다. 그런 은하계가 천억 개가 넘습니다. 전체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먼지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런 거시적 세계가 너무 먼 이야기로 느껴진다면, 최근 몇 달 동안에 우리 영혼의 건강상태가 어땠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듯이 한 순간도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지 못한 건 아닐까요? 인생살이에서 골치 아픈 문제는 해결이 잘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게 해결돼도 또 다른 골치 아픈 문제들이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이렇게 한평생을,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한 거지만, 허둥지둥 대면서 영적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구원을, 그 평화를, 그 생명을 우리가 찾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는 말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절대적인 사건입니다. 130억 년 전에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종말에 완성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 생명에 참여한다는 약속받았습니다. 그 약속은 참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이라 하더라도 믿는 사람들은 이미 그 부활 세계에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세상에서 승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아직도 이런 사실이 흔쾌하게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기독교 교리가 옳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거칠고 야비한 세상을 그런 믿음만으로 버텨낼 수 있으며 승리할 수 있느냐, 그런 말은 실제적인 게 아니라 종교적인 위로가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은 아주 실제적인 것입니다. 아주 구체적인 것이고 역동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라고 믿는 그것들이 오히려 공허한 것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인정받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들은 우리를 실제로 강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약하게 만듭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자극시킬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노예로 만듭니다. 돈이 많을수록, 명예가 클수록 우리는 거기에 점점 더 깊숙이 예속됩니다. 잃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다 쓰다가 불안하게 되고, 때로는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해서 교만하게 됩니다. 안 그런가요?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은 우리를 내면의 깊이에서 해방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걸 확실하게 믿는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불이익을 받아도 크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십자가 처형과 같은 운명에 처해지는 어떤 사람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사실보다 우리를 더 강하게 해줄 수 있는 진리는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다면 세상에서 우리는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 논리에 길들여져서 이런 기독교 진리를 실감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문제를 제가 해결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말라고, 어느 한 순간 깜빡 잊었어도 다시 기억해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요한일서 5:1-6
https://youtu.be/fQ7ODtQQm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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