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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다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다

고린도전서 2:1-12, 주현절후 넷째 주일, 2011년 1월30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과 유대를 거쳐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에서 큰 세력으로 자랐습니다. 그 즈음에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의 관계 설정으로 인해 큰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방 그리스도교는 유대 그리스도교와 겨룰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방 그리스도교의 대표 격인 바울은 소아시아를 포기하고 마케도니아, 아가야, 고린도 지역으로 갔습니다. 지금의 그리스입니다. 그리스의 지형은 남북에 걸친 반도인데, 중간에 개미허리처럼 생긴 지협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 지협에 고린도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당시에 남북을 왕래하려면 반드시 고린도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교통의 요지입니다. 문화가 크게 꽃피웠습니다. 당연히 헬라 신전도 우뚝하게 서 있었고, 올림픽과 비슷한 운동경기도 열렸습니다. 사도행전 18장의 설명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에 들어와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설교했다고 합니다. 회당장인 그리스보와 온 식구가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이외에 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시작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고린도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본문이 고린도전서입니다. 편지는 목적이 있을 때 씁니다. 바울은 인편으로 고린도교회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린도 교우들은 서로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했다는 겁니다.(고전 1:12) 오늘 우리의 눈에는 이런 현상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을 했는데, 왜 아볼로가 나오고 게바가 나오는 걸까요? 당시에는 바울의 권위가 별로 특별하지 않은 듯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가 다른 지도자들 중의 하나로 거론된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당시에는 아직 신학적인 체계가 정착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고린도 교우들이 뭔가를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 고린도서를 쓴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앎과 믿음의 관계

     고린도는 다신교적 헬라 문명의 중심에 자리한 도시입니다. 거기서 정신적인 자양분을 먹고 산 사람들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자신들이 알고 있던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문제로 서로 파가 나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많이 베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자신의 사명은 세례를 베푸는 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고전 1:17) 세례를 베푼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말고 세례의 주체에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가 베풀어지니까 세례의 주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꾸로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둘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이건 단순히 인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분쟁하고 있던 고린도교회 사람들도 인격적으로는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요즘 사이비 이단에 빠지는 분들도 인격적으로는 다 괜찮은 분들입니다. 핵심은 ‘앎’에 있습니다. 바르게 알지 못하면 아무리 인격이 고상하다고 해도 결국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사람들이 믿음이 먼저냐, 앎이 먼저냐 하고 다툽니다.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과 비슷합니다. 안셀름은 알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성적으로 따지는 사람보다는 순전하게 믿는 사람이 바람직할 때도 많습니다. 저는 믿음보다 아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앎은 단순한 정보나 실증적인 증거에 대한 앎이 아니라 실존 전체로 아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앎입니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돈오의 차원입니다. 믿음까지 포괄하는 앎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런 앎의 토대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바울은 앎의 문제를 극단적인 관점으로 접근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바울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아는 게 많았습니다. 고대 헬라 철학, 로마 법, 유대 율법에 이르기까지 당시 근동과 유럽의 정신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앎의 목표였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2천 년 전 처음 복음을 접한 고린도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십자가 사건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23)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술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그야말로 부끄럽고 모두 피하고 싶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 사건을, 그런 운명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예수를 어떻게 모든 앎의 근원이며 목표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바울의 대답은 성령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성령으로 보이셨다는 말은 성령으로 ‘알게’ 하셨다는 말(고전 2:12b)과 똑같습니다. 성령이 알게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을 반이성적인 차원으로, 주술적이거나 밀의적인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지난밤에 기도 중에 성령의 응답을 받았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자기만 어떤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사이비 이단의 교주들에게서 이런 주장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일종의 처세술로 격하시키는 태도입니다. 성령이 알게 한다는 말은 앎의 근원이 우리의 주관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저는 앎이 단순한 수학 계산이나 돈벌이 등의 정보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 운명 전체가 연루되는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냥 세상살이의 요령을 아는 것과 하나님이 주인이신 생명의 근본을 아는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로 비교해서 설명했습니다.(고전 2:6,7) 세상의 지혜는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것입니다. 바울이 살던 당시에 헬라와 로마 문명은 이런 세상의 지혜를 대표합니다. 하나는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입니다. 철학(philosophy)은 지에 대한 사랑입니다. 삶의 지혜입니다. 처세와 교양의 기술입니다. 이런 기술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들을 스승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의 정치는 군사, 경제,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기술이요 힘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이런 철학적 지식과 정치적 능력을 지혜로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무조건 나쁜 뜻으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런 세상의 지혜는 세상을 유지시키는 유무형의 질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과 비슷합니다. 높은 학력과 고소득, 사회적 명예는 모두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지혜를 습득해서 나름으로 세상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면서 살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것을 몰라서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와 대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세상의 지혜를 궁극적으로 ‘세상에서 없어질’ 것들이라고 보았습니다. 다 지나가고 말 것들입니다. 고린도에서 떵떵거리면서 지혜를 거들먹거리던 이들은 지금 다 어디 갔을까요? 로마 황제들의 모든 것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나름으로 역사에 영향을 끼쳤으니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증적인 학문인 과학을 예로 드는 게 더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지금 유전공학과 컴퓨터공학은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세상살이를 편리하게 만듭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는 마치 옛날에는 겨울철에 장작으로 불을 때서 덥혔지만 이제는 보일러로 덥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그런 차이밖에 없습니다. 다 지나가고 말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영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다른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감추어졌던 것입니다.(7절) 그렇습니다. 궁극적인 것은 모두 감추어져 있습니다. 궁극적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도 감추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생명의 궁극적인 실체를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인체를 아무리 공학적으로 완벽하게 해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생명을 다 아는 건 아닙니다. 세계를 아무리 물리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해도 모든 궁극적인 차원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세계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세계의 신묘막측한 차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계도 그러하다면 그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는 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7b) 우리의 영광이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정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짐작이 갈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만세전에 결정된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말을 허황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존재론적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하거나 측정할 수 없는 차원의 지혜를 말합니다. 이것을 사람의 머리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렇게 말합니다. ‘세상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해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입니다. 이런 일에 유대 종교와 로마 정치가 결탁되었습니다. 당시에 그들은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세상의 질서를 세워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영에 묶여 있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습니다.(12절)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b)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겁니다. 기도와 전도가 그런 증거는 아닙니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으로 증거를 삼을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자기도 모릅니다. 성령만은 아십니다. 그걸 전제하고 하나의 기준을 말씀드린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한 기준인가요? 아닙니다. 형식적으로는 믿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영혼을 던져서 믿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영혼의 깊이에서 이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누가 옆에서 말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기 위해서 최선을 다 기울일 겁니다. 마치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서 평생 구도 정진하듯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좀 몰라도 괜찮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전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지혜와 앎의 근본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을 구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세계로 인도하실 겁니다.

고린도전서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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