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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예수는 하나님이다!

요 14:1-14,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11년 5월22일

 

     예수님은 누구인가요? 어리석은 질문처럼 보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답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마태복음 기자가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 세례 요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나, 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고 대답합니다.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그렇게 당연한 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이 세상은 이미 구원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세상은 달라진 게 별로 없습니다. 고난과 불행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도 사람처럼 자식을 둔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질문과 대답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누구냐에 따라서 자신들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절박했으면 요한복음 기자가 요한복음 14-17장까지 자그마치 4장에 걸쳐서 변증했겠습니까. 요한복음 14-17장은 소위 예수님의 고별사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요한복음만의 고유한 말씀입니다. 본문 요 14:1절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불안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공동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요한복음은 학자들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는 기원후 100년 어간에 기록된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경험했던 이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예수님을 본 사람만 몇 명이 남았을 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고 있지만 예수님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모든 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조짐도 없습니다. 신앙의 근본적인 토대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이런 신앙의 근본에 대해서 근심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려고 아버지 집에 가셨으며, 거처가 예비 되면 다시 오신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중간 시기입니다. 중간 시기에는 모든 게 불안한 법입니다. 요한은 그런 불안을 극복하게 하려고 이 고별사를 기록했습니다.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제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도마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는데,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단지 도마만의 말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인 중에서 적지 않는 사람들인 한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 진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공관복음서의 주제와 일치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어떤 곳을 찾을 게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절) 다른 한 제자인 빌립이 등장해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 말도 당연히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절) 그 뒤로 이어지는 말씀도 다 여기에 연결됩니다. 13절과 14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다 들어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모든 걸 구하는 대로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말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주물리학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과 비슷합니다.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결국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신처럼 여기는 전통은 유대교가 아니라 이집트와 로마입니다. 파라오와 시저는 인간이지만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파라오나 시저는 그렇게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 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나사렛 예수는 무기력한 인물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아들입니다.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없었습니다. 살아생전에 거대한 종교단체를 조직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런 이를 신으로, 특히 창조주 하나님과 일치한다고 믿는다는 것은 제 정신으로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복음서에는 여러 종류의 기적이 나옵니다. 오병이어, 물이 포도주 되는 이야기, 죽은 자를 살렸다는 이야기 등등입니다. 그런 기적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성서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의 문헌에도 자주 나옵니다. 동정녀의 몸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복음서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한계를 그대로 인정합니다. 외로워하기도 하셨고, 자신이 감수해야 할 십자가 죽음을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하신 하나님과 비교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으라는 말은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는 요한복음 공동체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근심거리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하나님으로 믿어지나요?

     사도 요한이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십시오. 바로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했습니다.(9절) 예수님을 보았다면 사실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거의 죽고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만 교회에 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의 증언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의 증언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시다고 합니다.(10절) 반복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절) 이게 말이 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분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전혀 차원이 다른 예수님과 하나님이 어떻게 서로의 안에 거한다는 말인가요?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삶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행위였고,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그 증거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이외의 것들은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선지자들에게도 일어난 것들입니다. 예수님께만 일어난 유일한 사건은 부활이었습니다. 그 부활의 빛에서만 그 나머지 사건들도 구원의 현실이 됩니다. 치유, 축귀, 순종, 사명 등도 부활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모든 행복한 삶의 조건들도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을 잃는다면 좋은 직장과 연봉과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이 아들, 즉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요한복음 전체가 이미 그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만이 아니라 모든 복음서의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간다거나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본문도 그런 사태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멀게 느낍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신기한 소문 정도로 듣습니다. 조금 더 나가면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습니다. 그런 정도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문제는 부활이 우리의 삶과 깊숙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이야기로 남거나 아니면 언젠가 부활할 거라는 막연한 느낌으로만 남습니다. 부활이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왜 부활의 영성에 천착하지 못할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이 엄청난 인식과 신앙의 토대가 부활이라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실질적인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요한복음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실질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피안이 아니라 차안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피안적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계 전체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그분을 아주 짧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 역사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인간적 실존에서 살았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서 찾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절대생명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유대인처럼 메시아를 기다리거나, 헬라인처럼 철학에 매달리거나, 로마인처럼 세계를 지배하려고만 했을 겁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와 그의 모든 운명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과의 일치에서만 우리는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참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너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의 일치를 통한 참된 생명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종교적 감수성도 아니고 자기 합리화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영성이자 고유한 삶의 능력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운명과 일치할 수 있는지, 거기서 나오는 삶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신가요? 여러분들은 대부분 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신약성서도 늘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간접적으로 이에 걸맞은 경구만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가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여러분은 그분의 운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참된 깨우침을 가리킵니다. 사랑이라는 말도 됩니다.

     오늘 본문의 첫 마디로 다시 돌아갑니다. 요한 공동체는 근심을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요한의 설명을 다시 들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저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염려해도 여러분의 운명과 미래를 여러분의 뜻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미래를 책임지십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요한복음 1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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