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본문설명
오늘 이야기를 교회 밖의 사람들이 들었다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신자가 된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가 낯설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믿음이 좋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해도 모든 말씀에서 은혜를 받으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만, 무언가를 알고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오늘 이야기는 상당히 곤혹스럽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모세와 엘리야가 무슨 산신령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홀연히 나타났다가 다시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날 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본문이 설명하는 대로 일단 따라가 봅시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뒤 여드레쯤 지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눅 9:28) ‘이 말씀을 하신 뒤’라고 설명하는 걸 보면 본문 사건은 예수님이 당하실 수난에 대한 예고인 22-27절과 깊숙이 연결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는 중에 모습이 변했으며,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합니다.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이걸 직접 본 사람은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자세하게 묘사할 수 없었을 겁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세 명의 제자들은 잠결에 그 장면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 순간에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성서 기자는 그들이 ‘영광’에 싸여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게 될 예수님의 죽음(엑소더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고 하자 베드로가 나서서 엉뚱한 제안을 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에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고,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졌으며,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이 소리가 있은 뒤에 모든 장면은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없고, 영광도 사라지고, 소리도 끝났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 중에서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는 주로 예수님이 병든 사람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을 제 정신이 들게 하며,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시고, 때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 논쟁을 벌이는 이야기를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그런 것과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다는 걸 보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얼 전하려는 것일까요?
하나님 경험
여러분은 본문을 읽으면서 영광이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겁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나타났고(31절) 제자들은 잠결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습니다.(32절) 영광에 싸였다는 말이나 영광스러운 모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헬라어 ‘독사’에서 번역된 영광은 어떤 구체적인 사물이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일상에서도 이런 단어가 쓰이긴 합니다. 졸업식에서 1등 상을 받았을 때 그것은 그 학생에게 영광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상대적인 영광은 성서가 말하는 절대적인 독사와 의미가 다릅니다. 독사를 독일어로는 ‘Herrlichkeit’라고 합니다. ‘Herr’는 ‘주’라는 뜻인데,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영광은 신적인 것의 현현을 가리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우리가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수 없고 단지 간접적으로만 묘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영광과 연관된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29절 말씀에 의하면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변했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영광은 빛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우리말로도 영광을 성하다 영(榮)에, 빛 광(光)을 쓰는데, 여기서도 역시 빛이라는 이미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물리학적인 차원에서 빛 자체를 곧 하나님이라거나 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현현을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개념이 빛이라는 뜻입니다.
영광을 비유하는 또 하나의 다른 단어는 구름입니다. 34절 말씀에 따르면 구름이 일어 그들을 뒤덮었고, 모세와 엘리야가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구름과 하늘은 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이해되었습니다. 35절 말씀에는 구름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구름을 뚫고 들려오는 소리도 역시 영광에 대한 간접적인 묘사입니다. 즉 예수님의 변형, 빛나는 옷, 구름, 하늘로부터 울려나는 소리는 성서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통로였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은 구약성서에 흔하게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했다고 합니다. 구름과 불을 통한 하나님 경험입니다.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을 경험했고, 이사야는 성전에서 거룩한 천사들인 스랍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위에서 설명했듯이 빛과 구름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그걸 전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두 사람’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그것을 훨씬 포괄적으로 암시합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일종의 암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보도하면서 누가는 ‘두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안식일 지난 첫날 새벽에 예수가 매장된 무덤에 이른 여자들이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걸 확인하고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나타났다고 합니다.(눅 24:4)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서도 이 ‘두 사람’을 언급합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는 그 순간에 흰 옷 입은 ‘사람 둘’이 갑자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합니다.(행 1:10) 누가는 변화산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동일한 사건으로 설명하는 중입니다. 각각의 사건은 곧 하나님이 나타난 순간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만이 아니라 그의 공생애에도 하나님이 현현하셨다는 사실이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현재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현현하신 것을 곧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런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부활 승천 사건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그들은 빛, 구름, 소리, 하늘이라는 그 당시 신화적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영광 경험이란 무엇인가?
이런 설명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대개 “그게 옳은 말인가?”, 또는 나와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이군,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왜냐하면 이런 경험들이 우리에게 별로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 또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일치는 우리가 일상에서 별로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빛을 느끼지 못하고 소리도 못하고 어떤 사람이 나타나는 걸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술행위에서는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서편제라는 영화에 보면 소리를 배워봐야 배만 고프다는 아들과 군소리 없이 소리를 배우는 딸에게 소리꾼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소리는 밥보다 좋은 거여!” 그는 득음의 경지를 말하겠지요. 수많은 소리꾼들이 있지만 득음의 경지로 들어간 사람들은 드믑니다. 왜냐하면 그건 일상의 경험과 전혀 다른 존재론적 소리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득음에 들어가면 ‘소리’가 빛처럼 경험됩니다. 소리가 자기의 존재 전체를 사로잡습니다. 소리를 읽기도 하고 보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길을 가다가 버려진 대리석을 발견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주인에게 왜 이 돌을 버렸냐 하고 묻자 주인은 쓸모가 없어서 버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내 눈에는 저 돌 안에 ‘피에타’ 상이 들어있는 게 보이는군요. 그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쓸모없어 보이는 돌이 어떤 사람에게는 예술작품이 들어있는 걸로 보일까요? 미켈란젤로는 어떤 형상을 본 사람입니다. 그에게 빛, 구름, 하늘, 소리가 보이고 들린 것입니다.
훨씬 일상적인 예를 들어보지요. 여러분도 간혹 그런 경험을 할 겁니다. 평소에 전혀 눈에 뜨이지 않던 어떤 것이 어느 순간에 크게 확대되어 내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 개나리나 민들레일 수도 있고, 어떤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초승달이 유난히 빛을 내거나 노을에 물든 하늘이 갑자기 환하게 빛을 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바로 예수님에게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거나 해야만 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우리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에 머물 뿐이지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묻고 싶으시지요. 그걸 누가 가르쳐주겠습니까? 누가 미켈란젤로의 예술적인 눈을 가르쳐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비 한 방울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억지로 가르쳐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궁극적인 하나님 경험은 다른 사람이 대신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그건 생명의 영을 통해서 본인 스스로 배워야하고 깨우쳐야 할 영성입니다. 우리는 다만 신앙생활을 통해서 거기에 이르는 길만 조금 배울 수 있습니다. 일전에 한번 말한 것처럼 아무도 대신 죽어줄 수 없듯이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을 실체로 경험하는 건 오직 그 사람이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영광과 십자가
그렇지만 신앙공동체를 영적으로 인도해야 할 목사로서 “당신들이 알아서 해라.” 하고 설교를 끝낼 수는 없겠지요. 부분적으로나마 보충해야겠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그들이 어떤 태도로 살았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저는 앞에서 오늘 본문이 22-27절과 긴밀히 연결된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26절은 변화산의 중심 주제인 영광을 한발 앞서 제시합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스럽게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 하느님 경험이 오늘 본문인 변화산 사건이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 사건입니다. 영광에 싸여 오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기 전에 예수님은 22절에 당신이 받아야 할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24절이 중요합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다는 말씀을 단순하게만 보면 순교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초기 기독교는 우리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순교의 위기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실제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이 말씀이 무조건 순교를 가리키는 건 아닙니다. 순교는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입니다.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다가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결과가 순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역시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만 중요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는 결과적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에게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맡긴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의 길을 찾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참혹했지만 그것은 부활의 단초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맡긴 사람은 분명히 자기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예수님이 영광에 싸여 다시 오실 때 영광의 실체 안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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