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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예수와 헤롯 (눅 13:31-35)

예수와 헤롯

누가복음 13:31-35, 사순절 둘째 주일, 2013년 2월24일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3:31-35절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자리를 피하라고 말합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인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눅 3:1절에 따르면 이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있었고, 그의 동생 헤롯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 무대가 이 헤롯 안피파스의 지역과 겹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일종의 망명을 권고한 겁니다. 예수님을 꽤나 생각해주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위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헤롯의 명령을 전달했거나 아니면 헤롯을 핑계로 예수님에게 겁을 주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당시에 헤롯이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요즘 식으로 바꿔서 말하면 대통령이 어떤 목사를 정적으로 여겨서 국외로 추방시키려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오해될만한 발언이나 행위를 하신 걸까요?


예수님과 헤롯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눅 9:7-9절에 나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또는 엘리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가 다시 살아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헤롯은 마음이 꺼림칙했습니다. 눅 9:9절은 이렇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사건은 마 14:1-12절과 막 6:14-29절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 동생 빌립이 죽자 그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한 일을 대놓고 비판했습니다. 그 일이 빌미가 되어 결국 요한은 참수를 당합니다.


세례 요한은 당대의 의인이자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선지자였습니다. 시대의 양심을 깨우는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오죽 했으면 복음서 기자들이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으로 보았겠습니까. 예루살렘과 유대의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 와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보고 메시야가 아니냐 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요한의 목을 벤 헤롯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꿈속에 요한이 나오는 일이 자주 있었겠지요. 그런데 지금 그 세례 요한이 환생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겁니다. 그가 예수님마저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바리새인들을 보내서 막판 절충을 시도하는 겁니다. 일단 헤롯의 영지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게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말은 곧 계속 갈릴리 지역에 머물러서 여론을 뒤숭숭하게 만들면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암시입니다.


헤롯 왕가는 원래 악명이 높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헤롯 안티파스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헤롯 대왕입니다. 헤롯 대왕은 마태복음 2장에 등장합니다.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은밀한 거래를 시도합니다. 아기 예수를 찾으면 고국으로 돌아갈 때 자기에게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헤롯에게 알리지 않고 돌아갑니다. 헤롯은 두 살 아래의 신생아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1세기에 유대계 로마의 역사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 대왕은 자신의 세 아들을 처형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장례 때는 모든 사람이 슬퍼하도록 각 가정에서 한 사람씩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롯 대왕의 광기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원래 정치라는 게 그렇긴 합니다. 특히 정점에 올라서 있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허세와 폭력을 행사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허세가 허세로 끝난다면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헤롯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사실 헤롯은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환생으로 보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옳았느냐 하는 겁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관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로 생각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대답은 헤롯이 듣고 불편하게 생각했던 그 내용입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다시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다음은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 9:20)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 즉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선지자라는 대답입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는 다 선지자들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데는 일치합니다. 유대교도 그렇고, 이슬람교도 그렇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탁(神託)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과 엘리야,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 성서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모두 고유한 영적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인 개혁입니다. 선지자들은 일종의 혁명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았다는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르게 변화시키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이런 선지자 전통을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로 인해서 왕 중심의 질서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왕은 그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왕자가 왕이 있는 별을 방문했습니다. 왕은 세상을 단순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들을 자기의 신하로 여깁니다. 자기는 왕, 상대방은 모두 신하입니다. 다른 건 용납해도 이런 질서가 흔들리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은 왕들과 긴장관계에 있었습니다. 같은 종교적인 기능을 감당했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입장이 달랐습니다. 제사장은 보수적이어서 왕정 체제 안정에 기여한 반면에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왕정과 투쟁했습니다.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왕의 절대 권력에 도전했습니다. 선지자들 덕분에 고대 이스라엘 왕정이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선지자 전통에 서 있는 분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생각했을 리가 없으며, 헤롯이 아무리 여론에 민감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증거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정치적인 제도입니다. 유혈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주로 그런 방식으로 처형당했습니다. 로마제국은 혁명에 참여했던 수천 명의 노예나 평민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결코 유혈 혁명가가 아니시고, 정치적 주도권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유혈 혁명보다 더 강한 혁명의 힘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선지자 그 이상 되는 분이십니다. 그게 무엇인지를 아시지요? 그것은 아래에서 설명할 두 번째 대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둘째 대답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나온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실패자를 어떻게 궁극적인 승리자로 믿는다는 말인가요? 여러분이 2천 년 전으로 돌아가서 유대인으로 살았다면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베드로도 사실은 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의 고백은 회고의 방식으로 나온 거지, 말을 하고 있는 순간에 실제로 뭔가를 알아서 한 거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 과정을 통해서 천천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고백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이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이 대답이 왜 선지자라는 대답과 차원을 달리하는지, 유혈혁명보다 더 강한 변혁의 힘이 있는지, 그래서 당시 최고 권력을 행사하던 헤롯 안티파스를 두렵게 했는지를 알려면, 즉 헤롯이 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마음먹었는지를 알려면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더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왕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보십시오. 왕도 가지각색이라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좀 힘듭니다. 정말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왕들도 있긴 합니다. 그런 왕들은 접어두고 생각해보십시오. 왕은 인간 욕망의 최고 정점입니다. 왕들이 왕 노릇을 하도록 하는 것은 민중들의 욕망에 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삼상 8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민중들은 사무엘에게 자신들의 욕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 8:19, 20)


오늘 우리에게 왕은 누굴까요? 오늘날은 대통령보다 재벌이 왕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는 모두 경제 발전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그걸 대신 해 줄 사람을 왕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아무리 독재자라고 해도 경제만 발전시키면 다 용납됩니다. 삼성의 부도덕성에 대해서 발언하지 못합니다. 연봉만 많이 주면 무노조 경영도 용납됩니다. 삼성이 망하면 우리 모두 망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삼성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을 발현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재벌과 거기에 연루된 세력이 오늘날 대한민국 민중들에게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초기 기독교의 고백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사람들의 물질적 욕망 체제에 대한 거부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에게만 붙는 ‘퀴리오스’(주)라는 타이틀을 예수님에게 돌렸습니다. 구원은 로마 황제나 헤롯왕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이게 선지자 전통과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선지자들은 기존 체제를 인정하고 변혁을 요구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혁명까지 요구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모두 기존 질서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정치 민주화, 경제 민주화를 가리킵니다. 그런 것마저 사실은 요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꾸준히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기껏해야 복지 향상에 머뭅니다. 여러분들이 다 경험하셨듯이 복지가 향상된다고 해서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더 큰 욕망이 거기에 끼어듭니다. 그걸 실현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목표를 세웁니다. ‘사랑의교회’가 3천억 원이 더 드는 교회당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발로인지, 욕망의 발현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복합적인 걸까요? 우리는 반복해서 왕을 세웁니다. 그 일에 방해거리가 나오면 모두 세련된 방식으로 십자가에 달아 제거해버립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거부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기독교가 그런 세계 질서를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내세주의나 탈역사주의에 떨어지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세상은 다 악하고 망할 거니까 포기하고 예수님의 재림만 바라보자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세계와 등을 지고 산 기독교 소종파들도 제법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현실 거부가 아니라 현실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보는 겁니다. 새롭게 보는 토대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부활의 빛으로 현실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예를 들어 등산을 생각해보십시오. 에베레스트 정상에 이미 선 시각으로 등정 과정을 보는 겁니다. 고통스러운 순간이나 즐거웠던 순간이 다 새롭게 보일 겁니다. 상대적으로 조금 쉽게 정상에 선 사람이나 어려운 길을 거친 사람이나 정상에서의 희열은 똑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생명의 정상에 선 사람들입니다. 황홀한 생명의 빛에 휩싸여 있습니다. 삶 자체가 부활의 빛으로 새로워졌습니다.


헤롯과 같은 영악하고 포악한 왕들은 기독교 신앙을 거북하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왕권은 두려워할만한 힘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도 헤롯의 위협을 크게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기준에서 밀려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완전히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을 겁니다.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헤롯이 위협하든 말든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눅 13: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헤롯의 위협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헤롯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예수님만이 참된 그리스도, 메시아,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을 뒤따르십시오. 그로 인해서 고난도 당하겠지만 궁극적인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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