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기이한 빛
베드로전서 2:1-10, 부활절 넷째 주일, 2011년 5월15일
오늘의 제2독서인 벧전 2:1-10절은 그냥 눈으로 읽어서만은 무슨 뜻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단어 자체가 낯섭니다. 몇 가지 단어를 열거해보겠습니다. 신령한 젖(2), 보배로운 산 돌(4),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 거룩한 제사장(5), 버린 돌과 머릿돌(7),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기이한 빛(9). 여기에 열거된 아홉 개 단어 중에서 한 가지만 설명하려고 해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를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각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5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 전체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이 말이 예배를 잘 드리라는 뜻일까요?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되라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은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로마가톨릭과 달리 개신교회는 모든 신자들을 제사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히 종교적인 업무를 맡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사는 구약의 가장 중요한 종교 행위였습니다. 동물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리고 고기를 태워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의 핵심은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실감이 가지 않을 겁니다. 자기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기껏해야 도덕적인 잘못만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모든 세력은 죄입니다. 교만, 자기열망과 욕망은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오늘의 교육이 학생의 삶을 파괴한다면 그것도 역시 죄입니다. 성서는 그 죄의 결과로 사람은 죽을 운명에 처했다고 말합니다. 제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를 통해서 죽음을 면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의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세상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어떻게 살면 제사장이 되는 걸까요?
많은 분들이 여기서 혼란을 느낍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 자기를 철저하게 희생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지에 선교사로 가거나 어려운 이들을 위한 일에 발 벗고 나섭니다. 직업을 포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결혼을 포기합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평생 나환자를 돌보며 지낸 의사, 신부, 간호,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지금도 문명이 닿지 않는 아프리카나 동남아 지역에서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 덕분으로 그리스도교가 세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을 받습니다. 교회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런 분들의 인생은 누구나 본받을 만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권장할 만합니다. 저의 딸들도 그렇게 살겠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가치가 있는 일들이지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런 자기희생적인 삶을 모두가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삶의 경지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거룩한 제사장의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해하실까 해서 노파심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자기희생적인 삶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귀하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는 절대적인 생명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으신 제사가 바로 신령한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한 제사의 제물입니다. 이 제사를 통해서 우리는 용서를 받게 되었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초보입니다. 그걸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말이 될까요? 세례를 받았으니까 당연히 믿는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세상 사람들도 이걸 인정할까요?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 할 겁니다. 이걸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우선 거룩한 제사장이 된, 되어야 할 우리라도 먼저 분명하게 깨달아야겠습니다.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거룩한 제사가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을 인용하듯이 베드로도 구약을 인용했습니다. 세 군데입니다. 첫 구절은 이사야 28:16절을 인용한 본문 6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배로운 모퉁잇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구절은 시 118:22절을 인용한 본문 7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셋째는 사 8:14절을 인용한 본문 8절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좀 복잡하지요? 여기서 돌이라는 메타포가 등장합니다. 모퉁잇돌, 버린 돌, 부딪치는 돌, 넘어지게 하는 돌이 그것입니다. 돌은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역할이 크게 달라집니다. 집의 기둥을 받치고 있으면 더 한 나위 없이 든든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팽개쳐져 있으면 굉장히 불편한 돌이 됩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딪치는 돌이라는 말씀입니다. 전자는 믿는 이들이고, 후자는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먼저 부딪치는 돌이라는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누구나 직면하기 싫은 사건입니다. 이것을 직면하면 인류의 죄가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무죄한 이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건에 인류가 연루되었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를 따르면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인 빌라도, 그뿐만 아니라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예루살렘 민중들도 똑같이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언행을 신성모독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일종의 인민재판이자 마녀사냥이었습니다. 이런 일에 가담한 사람들은 이 사건을 빨리 잊고 싶은 법입니다. 설령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심리는 비슷합니다. 불의를 방관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결국 예수가 잘 죽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만 저들의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부딪치는 돌과 같습니다.
거꾸로 믿는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입니다. 그 돌을 주춧돌로 삼아 신령한 집으로 세워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통잇돌, 주춧돌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의 삶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신앙의 역설입니다. 버린 돌이 모퉁잇돌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거나 귀찮아하는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가능한 말인가요? 우리의 자가당착은 아닌가요? 이런 우리의 믿음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이비 이단들의 신앙행태와 똑같아 보이는 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한 멋진 집에서 여러분은 살고 있나요?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나요? 그 설계 도면이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내 삶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해명할 자신이 있나요?
힘들 겁니다. 예수를 믿은 뒤에 변화된 모습도 확실한 증거는 아닙니다. 사업이 잘 된다는 사실이나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믿지 않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도 모두 십자가를 불편해 합니다. 그게 우리의 일상적인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예수님을 뜯어 말릴 지경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것을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버린 돌이 모퉁잇돌이 되었다는 말은 부활에서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복되었듯이 한 의로운 선지자의 억울한 죽음과 비슷합니다. 부활로 인해서 십자가는 전혀 다른 빛으로 드러냈습니다. 십자가가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신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가 되었습니다. 믿는 자들이 이런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려면 당연히 부활의 생명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전제조건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세상을 바르게 하려는 개혁자, 도덕선생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제사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부활 경험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궁극적인 생명 경험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난 4월 24일 부활절부터 계속해서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활절 절기가 6월 첫 주일 까지 계속됩니다. 많은 이야기를 듣고 읽고 서로 나누긴 했지만 부활이 실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것에 관해서 관심이 없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평생 교회를 다녔어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걸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겠지요. 신앙생활을 종교적인 교양이나 취미생활로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해도 그럭저럭 교회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오늘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것처럼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지 방법을 알고 싶으신가요? 여기에 어떤 방법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운전이나 수영처럼 배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술가들에게 영감이 스치듯이 말입니다. 방법은 없어도 준비는 필요합니다. 최선의 준비는 먼저 부활을 경험한 이들의 고백을 전해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서와 사도들의 편지를 자주 읽고 귀를 기울입니다.
그 경험을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말입니다.(9절) 기이한 빛이 무엇일까요? 사도들은 부활의 주님을 왜 이런 식으로밖에는 말할 수 없는 걸까요? 이런 것은 좀 막연한 이야기가 아닌가요? 기이하다는 말은 놀랍다는 뜻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놀라운 빛으로 경험했습니다. 여기서 빛을 물리적인 태양빛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고대인들과 달리 빛은 태양으로부터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별들이 빛을 냅니다. 성경이 말하는 빛은 생명의 원천을 가리키는 일종의 메타포(은유)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놀라운 생명의 원천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속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초기 그리스도인에 비해서 너무 세속적입니다. 신앙의 원천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게 확연히 나타납니다. 신앙생활도 세속적으로 합니다. 세속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어쩔 수 없지,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지, 우리가 어떻게 사도들의 신앙을 따라갈 수 있어, 하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다시 기억하고 용기를 내십시오. 사도는 우리에게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놀랍고 기이한 빛의 세계로 들어갈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그 빛이 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이 이미 물러갔습니다. 부활의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십시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