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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2004.12.5                        
예수의 길, 요한의 길
눅 1:76-79

요한의 출생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과 요한의 출생을 흡사 소프라노와 테너의 이중창처럼 함께 엮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1장5-25절에서 요한의 출생이 예고되고, 이어 26-38절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예고되었으며, 뒤이어서 39-45절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였고, 46-55절에 그 유명한 ‘마리아의 찬양’이 등장합니다. 드디어 57-66절에 요한의 출생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요한이 태어나자 요한의  출생이 예고된 이후 줄곧 언어 장애를 겪던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아의 입이 열렸습니다.
즈가리야가 언어 장애를 당하게 된 이유는 눅 1:5절 이하에 소상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제 계급에 속하는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부부는 늙을 때까지 자녀가 없었습니다. 즈가리야가 사제 직분을 수행해야 할 차례가 되어서 성소에서 분향하고 있는 순간에 하나님의 천사가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본 즈가리야는 “몹시 당황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혔다.”(12절)고 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당연합니다. 성서에 묘사되어 있는 천사의 모습이 어떤지 우리가 재구성할 수는 없지만 일상의 경험과 전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이 사람을 두렵게 한다는 점에서 즈가리야의 그 경험을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이나 생물학자가 생명 현상의 그 깊이를 새롭게 발견했을 때 느끼는 것도 역시 두려움과 연결됩니다. 음악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그 바탕에는 기쁨이 있겠으나 그 낯설음 때문에 두려움도 동반됩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즈가리야에게 천사가 이렇게 이릅니다. 네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으로 하라. 그 아들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 미리오리라고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내 말을 듣고도 네가 나이 많다는 이유로 이 일을 믿지 못하는데, 이 일이 확실하다는 증거로 그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네가 언어 장애를 겪으리라. 대충 이런 천사의 고지를 들은 즈가리아는 실제로 말을 못하게 되었고 그의 늙은 아내는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면 몸에도 이상이 오게 마련인 것처럼 즈가리야는 일상을 뛰어넘는 사건과 만남으로써 일시적인 언어장애를 얻게 되었다가 요한이 태어난 다음에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1:64) 말을 하게 되었고, 우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심어주게 마련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던 이 이야기를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복음서에 간추렸습니다. 그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즈가리야의 ‘찬양’입니다. 흡사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 구전 민요가 있듯이 이 즈가리야도 그런 노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의 길
즈가리야의 노래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68-75절은 야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이며, 76-79절은 새로 태어난 세례 요한에 대한 축하를 겸한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어느 집안의 아기이든지 새로 태어나면 어른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라거나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덕담을 주듯이 즈가리야도 늘그막에 얻는 아들을 위해서 이런 덕담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즈가리야의 이 덕담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베푸실 구원 역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즈가리야의 노래는 단지 요한이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더 나아가서 인류 전체를 향한 것입니다. 또한 이 노래에서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은 예수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부여된 사명은 독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며 그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이 요한이라는 아기의 미래는 앞으로 6개월 후에 태어날 예수님에게 철저하게 의존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 요한의 출생을 놓고 부르는 노래였지만 즈가리야는 자기 아들을 주인으로 내 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님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가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 되어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주의 백성들에게 알리게 되리니.”(76, 77절).
요한이 닦아야 할 예수님의 길은 곧 모든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입니다. 이 문장 안에 바로 기독교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보통 우리가 예수님과 구원이라는 단어를 거의 동일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즈가리야가 노래하고 있는 이 신앙고백은 바로 누가 공동체를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매우 절실한 주제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구원받는 길’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렇게 신앙생활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원’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교회 안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제법 자주 사용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구원을 열망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습니다. 우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간다는 구도에서 구원을 생각합니다. 이 말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정당성 여부가 달라집니다. 만약 이 말이 단지 신앙의 내세주의만을 가리킨다면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기독교 신앙이 바로 지상 낙원을 건설하는 데 근본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무시된 채 단지 내세만을 지향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현세와 내세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 사이의 긴장을 놓치게 되면 한편으로는 현실에 포로가 되어 자유가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치우쳐서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 실종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구원 지향적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사실은 이게 훨씬 실질적인 것이지만, 구원의 현실주의와 내세주의 이전에 구원에 대한 관심 여부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구원에 관심을 기울일 거라고 서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안타깝게도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의 메커니즘이 이미 구원의 역동성을 지배해버렸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구원의 영이 살아 숨쉬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느 한 곳에 교회가 개척되었다고 합시다. 아마 처음 시작할 때 목사나 창립 멤버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겠지만 교회의 체계가 잡히면서 교회의 모든 관심은 교회 자체로 집중되기 마렵니다. 교회 건물을 마련하는 일, 교회의 여러 자치기관을 조직하는 일, 혹은 교회 전도를 위한 다양한 이벤트 같은 것에 교회의 모든 힘을 기울입니다. 교회의 이 모든 기구, 조직, 행사는 오직 예수님의 구원에 토대를 두고, 또는 그 구원을 목표로 실행되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거의 사람들의 욕망에 따라서 움직이는 실정입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가 보이지 않는 본질로만 있지 않고 보이는 형태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모임으로써 유지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비본질적이고 인간적인 것들 자체를 우리가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요소들이 교회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않기만 하면, 그래서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입장에 바르게 설 수 있다면 최소한 구원 공동체의 토대를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생활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일상의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종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의 차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길인 구원을 우리의 삶의 근거로 삼는다면 우리의 일상 자체가 그런 구원의 차원에서 늘 새롭게 갱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것은 단지 기도를 정기적으로 올린다거나 예배를 어떻게 드린다는 차원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을 끌어가고 있는 힘의 원천과 연관된 문제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삶에는 이런 구원의 차원이 거의 실종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오늘 우리의 삶이 철저하게 소비 중심적 구도로 이끌려간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삶 자체 보다는 소비에 의해서만 삶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역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소비하려는 욕망에 있습니다. 이런 사태는 현대인들에게 거의 숙명처럼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들이 여기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숙명적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사회가 적절한 소비에 의해서만, 또는 과소비에 의해서만 작동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수출은 잘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내수가 얼어붙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부 쪽에서는 소비를 진작시킬 수 있는 묘안을 짜기에 정신이 없지만 과거의 정부처럼 극단의 조치를 제외한 채 일을 만들어가려고 하다보니 별로 실효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절약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온 지난날의 시대에서 이제는 소비가 미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회로 돌입했다는 것은 단지 삶의 형식이 조금 바뀌었다기보다는 우리의 삶에서 소비가 구원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이런 소비 중심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흡사 동네꼬마들이 구슬치기를 하면서 그것만이 자기들을 구원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소비 만능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런 사태에서 기독교인들은 좀 다를까요?

요한의 길
즈가리야는 아들 요한이 이제 이런 구원의 길을 닦게 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요한은 구원의 길 자체는 아니지만 구원의 길을 닦는 그런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구원 자체인 예수님이 가야할 길을 닦는 역할이라고 한다면 요한의 삶이야말로 길일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왕이 행차할 때는 앞서 길을 정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세례 요한도 역시 그런 일을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의 구원 사건도 역시 이렇게 그 길을 준비한 사람들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일도 역시 이렇게 예수님의 길을 닦는 게 아닐까요?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런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구원 사건도 일어나기 어려운 게 아니까요? 우리의 역할이 바로 예수님에 앞서 그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과 비슷하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재림 사건은 우리를 통해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가 반듯하게 그런 일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그의 재림은 지연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게 무엇일까요? 아마 어떤 사람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그 어떤 행위나 업적으로도 예수님의 재림을, 즉 마지막 심판이며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앞당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의 궁극적인 결정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길을 준비해야 할 우리의 과업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오늘 즈가리야의 노래에 비추어 이 과업을 말씀드린다면 예수님의 구원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이 전도라고 말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교회의 사업과 같은 차원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종말론적 구원을 위한 하나의 징표가 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며, 우리가 가야할 마땅한 길입니다. 여기서 ‘징표’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요. 교회 자체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의 표징일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동양적 공부방식으로 말씀드린다면 교회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달빛을 받아 반사시킬 수 있는 손가락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이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서 자격이 있을까요? 이 엄청난 폭력과 소비와 증오의 질서 안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면서 말입니다. 피터 아이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본이 인간을 교환가치로 만들었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오늘처럼 실감나는 때가 없었다. 자신의 근원으로, 재야로, 그리고 소비의 통치에 대한 반란으로 돌아감으로써 교회는 이러한 거부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신학의 길잡이, 294쪽).
누가복음 1:7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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