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성령강림 후 아홉째 주일, 2018년 7월22일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53.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56.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예수는 누군가?’입니다. 우리는 몇 가지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다윗의 후손, 주, 선한 목자, 길과 진리와 생명 등등입니다. 이런 답의 근거에 관한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3독서는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인근에서 활동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게네사렛 호수로도 불립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예루살렘에서 볼 때 오지에 속합니다. 한반도 지도와 비교하면 예루살렘은 서울이고 게네사렛 호수는 함경북도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중심지인 예루살렘 사람들은 게네사렛 지역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주류에 속한 분이었습니다. 게네사렛 호수 인근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유월절 성지 순례 차 예루살렘에 들어간 뒤에 신성모독과 사회소요죄로 십자가처형을 당했다는 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막 6:30-34절이고, 다른 하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건너뛴 다음에 나오는 막 6:53-56절입니다. 앞 단락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바람에 밥 먹을 시간마저 부족한 예수 일행이 배를 타고 사람들을 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일행을 그냥 놓아주지 않고 다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두 번째 단락은 예수님 일행이 배를 타고 게네사렛에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지역에서 예수님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첫째 단락에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셨다는 것이 강조되었고, 둘째 단락에서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다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침(teaching)과 고치심(healing)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은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고, 치유는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간의 정신과 몸을 구원하는 분이라는 사실이 복음서의 중심 주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로 두 번째 단락을 중심으로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좀더 정확하게 찾아보겠습니다.
옷자락 사건
예수님은 지금 배를 타고 여러 곳을 이동 중입니다. 막 6:45절에 따르면 예수님 일행은 배를 타고 벳새다로 갔다가, 다시 게네사렛으로 왔습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즉 게네사렛 호수 북쪽에 위치하고 게네사렛은 호수 북서쪽에 위치합니다. 게네사렛은 어느 특정한 마을이라기보다는 호수 북서쪽의 비옥한 평야지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에 가버나움, 고라신, 그리고 그 아래로 막달라와 디베랴 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게네사렛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환자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이런 일은 요즘에도 간혹 벌어집니다. 신유 은사가 용하다는 목사나 장로들의 집회에 난치환자나 불치환자를 데리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환자를 침상에 누인 채로 메고 왔다는 걸 보면, 이들은 중환자들로 보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56절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이 구절이 가리키는 장면은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사람들이 가족이나 친구 중에서 크게 병든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이 머물고 있는 지역으로 왔습니다. 환자들 중에서는 혼자 걷기도 힘들어서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갈만한 길목이나 광장이나 시장터에 환자들을 머물게 했습니다. 내전이 벌어져서 병원이 정상적으로 운용되지 못하는 경우에 환자들이 길거리에 그냥 방치된 장면과 비슷합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너무 많은 환자들이 모였기에 예수님이 일일이 기도해줄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나갈 때에 예수님의 옷자락을 환자가 손으로 접촉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기만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은 놀랍게도 모두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복음서의 다른 대목에도 예수님의 치유활동은 종종 나옵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런 것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막 1:21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에게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십니다. 곧 이어지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막 2:1절 이하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이야기에는 예수님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취했다는 설명이 일절 없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을 뿐입니다. 이런 예외적인 보도가 막 5:25절 이하의 혈루증 여인 이야기에 나오긴 합니다. 이 여자는 군중들 틈에 끼어서 예수님 뒤로 다가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에 하혈이 멈추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이 여자를 확인하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에는 추후에라도 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현대인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상식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문제로 논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겁니다. 지금 제가 설교자로 나섰으니까 저의 생각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 여러분의 입장에서 판단해보십시오.
우선 오늘 이야기는 고대인들의 세계관에 근거한 보도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시대마다 세계관이, 즉 세계 패러다임이 다릅니다. 고대인들은 하늘에도 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는 하늘의 물이 쏟아지는 현상입니다. 사람의 운명은 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당시의 점성술은 과학이었습니다. 질병은 더러운 귀신에 의해 발생하는 재앙이었습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 대상이 무당이기도 하고, 제사장이기도 하고, 선지자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의사를 찾아갑니다. 고대인들 관점으로 본다면 오늘의 의사는 무당이고 제사장입니다.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이 병을 대처하는 방식이 다른 이유는 주술적인 세계관으로부터 과학적인 세계관으로 패러다임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도 당연히 고대인들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자락 사건이 객관적인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을 벌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옷자락에 손을 댔다고 해서 병이 자동적으로 낫는다고 말할 수 없고,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언젠가 설교 중에 제가 다음과 같은 예를 든 것 같습니다. 아이가 밤중에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야단입니다. 병원에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할머니가 아이를 안고 노래를 부르면서 배를 만져줍니다. 아이가 더 이상 복통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프던 아이가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할머니의 손길이 복부의 체온을 높이고 장(腸)운동을 돕는다면 급체로 인한 복통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의 열광적인 심리 상태를 전제한다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었을 때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으며, 그런 경험이 경우에 따라서 치유 현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술적으로 보이는 치유 자체는 본문에서 핵심이 전혀 아닙니다. 성경기자의 관심은 병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런 일을 야기한 인물이 예수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경험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변증하기 위해서는 중병 환자들이나 장애인들의 치유는 중요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운명에서 이런 중병 환자들과 장애인의 삶은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생존이 위태로울 정도로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들보다 더 우선적으로 구원받아야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설교 본문 앞 단락인 막 6:34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에게 몰려든 군중들을 목자 없는 양이라서 불쌍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군중들을 연민의 정으로 대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 역시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악한 질병과 더러운 귀신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합니다. 그 거룩한 갈망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 사람들이 다 건강해진 세상을 기대합니다. 기대할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을 선취합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위해서 투쟁합니다. 마 11:5절은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인가?’라는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해서 사 35:5절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생존이 절박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 문제로 설왕설래 말이 많습니다. 2019년 시급 최저임금이 8,350원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일주일에 52시간 일한다면 월 1백80만원 수입이 됩니다. 국가 차원에서의 경제 운용은 너무 복잡하기에 전문가들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으니, 저와 같은 비전문가들이 무슨 말을 보탤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의 입장에서만 한 마디 할 수 있습니다. 최저임금은 생존이 절박한 사람들에게 최소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이라서 필요하기도 하고 시급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서 벌어지는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은 또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나가야겠지요.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 전체 경제규모는 최저임금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의 시대정신인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외면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외면하면 짐승의 얼굴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대목에서 한국교회의 역할이 전혀 없다는 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장애인을 고쳤으며 중병 환자를 고쳤다는 사실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함으로써 벌어진 결과입니다. 생존이 위태로운 사람들은 앞에서 인용한 마 11:5절에 따르면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하는 이들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동성애자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예수님이 이런 이들을 치유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당연히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의 인간 존엄성이 회복되는 일에 교회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치료받아야 할 인간 실존
오늘 말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사람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의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우리는 모두 침상에 누운 채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려고 시장광장에 모여 있는 중병환자와 비슷합니다. 우리의 실존은 이처럼 절박합니다. 영적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공격하고 비판함으로써 약간의 위안을 삼습니다. 상대적으로 돈이 많은데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이 관세 전쟁을 벌이는 중입니다. 갑과 을이 싸고, 을과 을이, 을과 병이 싸우는 방식으로 세상이 돌아갑니다. 광장에 텐트를 치고 지내는 내전 피난민들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자신들의 그런 모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실존을 정확하게 뚫어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야만 구원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 영적 실존을 가장 정확하게 가리키는 기독교 경구는 ‘키리에 엘레이송’, 즉 ‘주님,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이런 경구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현대인들은 기분 나빠할 겁니다. 자신들은 불쌍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당당하게 삽니다. 사업도 잘되고, 다른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자식들도 큰 어려움 없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거기다가 인격적으로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자기 삶에 완전히 만족해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인생은 저렇게 사는 거야, 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키리에 엘레이송’이라는 고백을 드리지 않아도 될까요? 저는 이 문제를 이 자리에서 시시비비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저는 그게 안 됩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날이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그만큼 더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분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림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신의 그림에 허점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신학의 대가들도 말년에는 자기 책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싶다는 심정에 이릅니다. 신앙적으로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는 고백을 더 절실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다.’입니다. 마술적인 능력으로 병이 치유된 게 아니라는 말씀은 앞에서 드렸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이 빛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성경기자는 당시의 세계관에 근거해서 그림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에게서 구원의 빛이 우리를 비춘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경험했으며, 그 절망과 어둠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건 신학적인 표현이지 실제로 구원의 빛을 경험했냐고 저에게 묻고 싶으신가요? 여러분도 그런 빛을 경험하고 싶으신가요?
오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한 장면을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저의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병 환자들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예수의 옷자락은 단순히 옷자락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인격이고, 그의 말씀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손을 잡고 하신 ‘달리다굼’(막 5:41)이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며, 호수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워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옷자락입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영혼이 접촉하면 그 말씀이 여러분을 생명의 빛으로 이끌어 들일 것입니다. 그 빛으로 여러분은 세상과 삶을 전혀 새롭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인이 되려고 구도 정진하는 사람에게 어느 순간 언어가 환하게 말을 거는 것과 같은 경험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태도는 삶에 대한 절박성입니다. 다른 말로 생명 외경입니다.
0개 댓글